악마와 함께 춤을 - 시기, 질투, 분노는 어떻게 삶의 거름이 되는가
크리스타 K. 토마슨 지음, 한재호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감정으로 살아가면 좋겠다고 생각은 할 수 있겠지만 살다 보면 부정적 감정을 배제하고 살기가 매우 어렵다.

부정적인 감정은 그 자체로 매우 소모적이기에 감정 자체를 최소화하거나 애써 긍정적인 감정으로 바꾸려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게 마련이고 그러한 책도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시각에 도전하면서 부정적 감정 역시 우리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임을 주장하고 있다.

저자가 주목하는 부정적 감정에는 분노, 시기와 질투, 앙심과 경멸 등의 감정이 있다.

저자는 이 감정들을 과거의 철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먼저 정리한다.

대체로 두 가지 접근법으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부정적인 감정이 인간을 악하게 만들기 때문에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감정 절제형 성인)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감정이 사회적이나 개인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때도 있으므로 적절하게 상황에 따라 긍정할 수도 있다는 입장(감정 수양형 성인)이다.

놀랍게도 저자는 두 가지의 접근법 모두 틀렸다고 주장한다.

먼저 저자는 우리가 감정을 동등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조금만 생겨도 과하다고 생각하고 긍정적인 감정은 그 감정에 휘둘리고 있어도 과하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기쁨이나 연민에 젖어 있는 사람은 전혀 의심하지 않을까?

즐거운 사람은 그저 행복하고 안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되는가?

하지만 이것 또한 이중 잣대의 결과다.

즐거운 사람의 긍정성이 현실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 거라면?

(pg 93)

부정적인 감정 역시 긍정적인 감정과 마찬가지로 발현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생물학적인 진화의 결과이든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태생적 조건 때문이든 간에 어찌 됐든 부정적 감정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을 막을 수도, 막아야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렸던 사람들을 우리는 '성인'이라 부르며 칭송했지만 사실 모든 인류가 성인이 되고자 노력할 수는 없다.

저자는 오히려 성인의 삶이란 곧 인간으로서의 삶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만 달성 가능한 상태이므로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자기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으라는 뻔한 조언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접근법 역시 부정적인 감정이 긍정적인 감정보다 열등하다는 논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저자는 이러한 입장에도 단호히 반대한다.

그럼 어쩌라는 걸까?

저자는 그저 부정적인 감정 역시 나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손이 못생기게 태어났다고 해서 손을 잘라버리면 삶이 불편하게 되듯이 부정적인 감정 역시 싫다고 삶에서 거세해 버린다면 온전한 인간의 삶을 살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자아 역시 나 자신의 일부이므로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며 살라고 말한다.

잘 살면 그만이다. 나쁜 감정은 좋은 삶을 방해하지 않는다.

나쁜 감정은 당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나타내는 신호가 아니다.

이것들은 정확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즉 당신이 자신의 삶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면 두려운 마음이 들더라도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pg 265)

사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단순한 편이다.

하지만 그 핵심에 도달하는 과정이 꽤나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과거 철학자들의 주장과 그 주장에 담긴 함의, 그리고 그 주장에 반대하는 저자의 이유가 나열되는데 솔직히 모든 논리에 쉽게 동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철학 교양서가 줄 수 있는 지적인 사고실험의 재미는 꽤 탁월한 편이었다.

책에서 꽤 많은 사례를 들고 있으므로 읽으면서 각자가 자신이 허용할 수 있는 부정적 감정의 선은 어디쯤일지를 가늠해 보면 재미난 시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라인드 웨딩
제이슨 르쿨락 지음, 유소영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히든 픽처스'라는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이름을 제대로 알린 저자의 신작이 나와 읽어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딸의 결혼이라는 소재로 전작 못지않은 긴장감을 보여주었다.

작품은 장성한 딸을 둔 남성의 시각으로 진행된다.

그는 어린 시절 군 복무를 마친 후 결혼해 딸을 낳았지만 아내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혼자가 되었지만 누나의 도움과 고된 택배 일로 딸을 부족함 없이 키워냈다.

하지만 딸이 사춘기를 지날 무렵부터 의견 충돌이 잦아졌고 몇 년째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딸은 뜻밖에도 재벌 2세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며 아빠도 참석해달라고 말한다.

모처럼 닿은 딸과의 연락과 결혼이라는 기쁜 소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민감한 안테나에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들이 포착되기 시작하면서 이 결혼에 숨겨진 비밀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가 작품의 초반 스토리이나, 이후의 서술에 의도치 않은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므로 저자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아래는 생략하기 바란다.)

이번 작품에서도 초반부터 이어지는 긴장감을 마지막까지 잘 이끌어 간다.

사실상 사건이라고 할만한 일은 작품의 중반 이후에 등장하지만, 한 인물 안에서 딸의 안전을 걱정하는 마음과 자신의 걱정이 기우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서로 상충하면서 일어나는 내면의 긴장이 상당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특히나 자식이 있다면 작품 속 아버지의 시선에 공감하는 바가 많을 것 같다.

부모라면 누구나 세상 누구보다 자식을 잘 안다고 자부하겠지만 사실 자식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다.

언젠가 어머니가 아내에게 '이제 네가 내 아들을 더 잘 아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진 적이 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어머니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아내만은 아닐 것 같다.

어머니에게는 항상 하나밖에 없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가 쓰는 자녀의 서사는 그리 신빙성이 없어요.

우리는 자신이 자식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누구도 자식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해요.

(pg 249-250)

중반 이후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지만 그러면서 오히려 내면의 갈등은 더 커지게 된다.

동양 특유의 유교적 시각을 접어두고서라도 일반적인 사람의 시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비밀이 숨겨져 있어서 사건의 진상을 유추해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매우 자극적이며 지저분한 이야기라는 점만 언급해 둔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재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진상이 비교적 빨리 밝혀짐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긴장감이 전혀 감소하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웠다.

모든 진실을 알고 나서도 아버지로서의 자아와 사회적 정의, 도덕을 추구하는 자아가 끊임없이 갈등하기 때문이다.

자식을 키워본 경험이 있다면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한 번쯤 고민해 보면 좋을 주제일 것이다.

전작이 다소 판타지스러운 소재를 다룬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면 이번 작품은 매우 현실적인 편이다.

물론 자식이 재벌 2세와 결혼하는 일은 극히 드물 것이고 현실의 재벌이 작품 속 재벌과 유사할 것 같지도 않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돈이 많다면 저렇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 법한 스토리라 허황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400페이지가 넘어 꽤 두툼한 편이지만 저자 특유의 속도감과 매끄러운 번역 덕분에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자의 명성에 걸맞은 충분한 재미를 보장하는 작품이므로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재미나게 읽을 것이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우주난민특별대책위원회
제재영 지음 / 마인드마크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특이한 제목을 가진 SF 소설이다.

제목처럼 작품의 배경 설정도 굉장히 독특하고 재미있다.

서울에 외계인이 산다.

물론 생김새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보이게 해주는 슈트를 입고 살아야 한다.

이들은 '플라 2.5'라는 별에서 온 '플라인'들로 자신들의 별에 문제가 생겨 지구로 대규모 이주를 해왔다.

오랜 기간 지구에서 섞여 살던 이들은 수년 전 고향별과 비슷한 별을 찾아 이주를 위해 우주로 떠나게 되었지만, 일부는 떠나는 대신 지구에서의 삶을 유지하고자 했다.

남은 이들은 철저한 신분 등록을 통해 정해진 구역에서만 살아야 하는데, 이들이 일으키는 여러 사건들을 마치 영화 '맨 인 블랙'처럼 처리하는 4명의 공무원이 있다.

작품은 이 공무원들이 보여주는 좌충우돌 민원 처리 에피소드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라면 장편소설이지만 특이하게도 하나의 굵직한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잔잔한 여러 사건들이 계속해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작품을 부르는 명칭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상물로 치면 하나의 큰 스토리가 쭉 이어지는 드라마가 아니라 한때 유행했던 시트콤처럼 매회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식이다.

초반에는 일이 없어 사무실에서 화분이나 키우며 시간을 죽이던 이들이지만 나중에는 엄청난 속도로 헤엄치는 도망자, 트럭에 채 실리지도 않을 정도로 크게 자라버린 우주 작물, 스스로 걷고 춤추는 버드나무까지 우주인들이 연루된 기상천외한 사건들에 휘말리게 된다.

이런 놀라운 사건들을 굉장히 공무원스럽게, 책임감 있으면서도 귀찮은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하는 그들의 모습이 잔잔한 재미를 불러일으켰다.

뭔가 굵직한 사건이 하나쯤 터지려고 하는 것 같을 무렵에 책이 끝나버리는데 저자가 계속해서 시리즈로 이어나갈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가 확실하고 작품의 소재도 늘리려고 하면 얼마든지 늘릴 수 있게 확장성이 좋아 보여서 저자의 역량에 따라 재미난 시리즈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길지 않은 에피소드들의 나열이고 각각의 연관성도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책장을 넘겨갈수록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성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마지막에는 그들과 꽤 정이 든 것 같은 기분으로 책을 덮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SF 소설들과는 결이 매우 다른, 긍정적인 의미에서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작품이었다.

심각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낸다거나 어려운 과학 지식이 난무하는 무거운 SF 작품이 부담스러운 독자라면 이 작품이 보여주는 발랄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추운 날씨에 따뜻한 실내에서 가볍고 즐거운 분위기의 소설을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해 줄 만한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쥐독 이기원 디스토피아 트릴로지
이기원 지음 / 마인드마크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기술의 발달이 인류를 더 평등하게 만들 것이라는 전망도 있고,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인지 미래를 상상하는 SF 작품들에서는 불평등이 극에 달한 미래 사회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 작품 역시 그러한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품의 배경은 약 100년 후의 서울이다.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인류의 대부분이 절멸하고 서울은 10개의 대기업 연합이 다스리는 도시국가인 '뉴소울시티'가 된다.

도시는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는데, 1구역은 상류층 거주지로 마인드 업로딩 방식을 통해 복제 신체를 계속해서 갈아탐으로써 죽음도 극복한 곳이다.

2구역은 10개의 대기업 소속 노동자들이 사는 공간으로 철저하게 생산만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체제에서 버려진 이들이 모이는 제3의 구역이 바로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쥐독'이다.

2구역에서 근근이 먹고살던 '민준'은 어느 날 자신의 임금으로는 평생 구경도 하지 못할 값비싼 물건이 공장에 들어오자 충동적으로 이를 훔치고 쫓기는 몸이 되어 쥐독으로 도망친다.

쥐독에서 그 물건의 가치는 상상 이상이기에 물건을 노린 세력의 위협을 받게 되고 이를 물리쳐가며 버티던 중 '태일'이라는 남성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그가 이 불합리한 체제를 뒤엎기 위한 반란군의 수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와 함께 지배계층에 맞서게 된다는 내용이다.

물이 새는 줄도 모르고 방주 안에만 갇혀 두려움에 떨기보단 갑판으로 나와

폭우와 해일이라는 진실을 마주하며 죽어갈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

(pg 181)

매력적인 배경과 인물, 그리고 쉽게 예상하지 못할 결말까지 전반적으로 꽤 재미있게 읽은 것 같다.

다만 초중반까지는 어디선가 본듯한 설정과 개연성이 살짝 부족한듯한 전개 때문에 몰입이 다소 어려웠다.

예를 들면 평범한 공장 노동자 출신인 민준이 어떻게 쥐독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불량배들을 이길 정도로 강한지, 법이 없는 곳인 쥐독에 고가의 물건을 지닌 민준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왜 그리 쉽게 나타나는지, 죽음을 극복할 정도의 과학기술을 축적한 지배계층이 왜 노동자들을 개별적으로 감시하지 않아 반란군 추적에 애를 먹는지 등등 설명이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어 의문점이 좀 남았다.

하지만 민준과 태일의 만남 이후로는 혁명 준비와 실행이 급박하게 진행되면서 긴장감도 높아지고 서사의 매력도 올라가 읽는 재미가 좋았다.

저자가 공간적인 배경은 유지하고 시대적인 배경만 달리한 작품을 더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마치 파운데이션 시리즈처럼 '뉴소울시티'라는 동일한 장소에서 서로 다른 시간대의 인물들이 또 어떤 이야기를 펼쳐갈지 궁금해진다.

아쉬움이 살짝 남기는 했지만 저자가 만들어 낸 매력적인 인물들과 반전이 인상적이었기에 그 작품들도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수명
루하서 지음 / 델피노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한 번쯤은 '이 아이를 위해서는 대신 죽어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아이를 감싸 부모는 죽었지만 아이는 살아남은 경우도 있고,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다 숨지는 부모 등 실제로 그런 사례도 적지 않다.

만약 불치병으로 곧 죽게 될 아이에게 내 수명을 나눠줄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저자는 이 상상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너무도 한국스러운 배경 속에 녹여냈다.

먼저 배경이 되는 기술로 자신의 수명을 굉장히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기계가 소개된다.

당연히 사고로 인한 죽음은 예측할 수 없으며 지금처럼 지낸다면 대략 언제쯤 죽을지를 측정해 주는 기계다.

물론 현재의 건강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생활습관에 따라 측정값은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측정된 수명을 일정 부분 타인에게 나눠줄 수 있는 기술도 개발된다. (증여자의 수명이 감소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저소득층은 수명을 팔고 부유층은 수명을 사 영생을 누리는 세상이 되는 식상한 전개를 떠올리기 쉽지만, 저자는 이러한 점을 방지하기 위해 법적으로 여러 장치들을 고안해 둔 사회를 그려냈다.

수명의 나눔은 평생 단 한 명에게만 그것도 혈액형이 같은 직계 가족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결혼이나 입양으로 가족이 되는 경우에도 1년 이상이 경과해야 하며, 입양의 경우 입양의 대상자에게 증여는 가능하나 그 대상으로부터 수명을 받을 수는 없는 등의 법적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가능한 일을 법적으로 막아둔다면 당연히 다양한 편법과 불법이 판을 치게 마련이다.

이 작품에서도 수명 암거래를 위한 앱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고아로 자란 한 남성으로 죽마고우였던 친구가 수명을 측정한 뒤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절망 속에 죽어버린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전 여자친구가 나타나 위로를 건네고 급속도로 가까워진 그들은 결국 결혼하지만, 1년 후 자신의 수명을 증여받은 그녀는 갓 태어난 딸을 버리고 비정하게 그를 떠나버린다.

슬픔을 이겨내고 홀로 남은 딸을 키워내던 그는 자신의 딸이 불치병에 걸려 남은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복수심과 슬픔으로 얼룩진 그가 어떤 행보를 보이게 되는지가 작품의 주요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비겁한 선택이라고 할지라도 지금은 아주 조금이나마 덜 무너지는 쪽이 간절히 필요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내가 미약하게 남아있는 힘으로라도 간신히 버틸 수 있게.

(pg 162)

솔직히 작품의 소재 자체는 다소 허황되게 느껴지긴 했지만, 저자가 이러한 소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인간의 본성은 잘 캐치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이기적이지만 동시에 이타적이고 그 균형점은 한 인간의 생애 주기 안에서도 늘 달라지게 마련이다.

생물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수명을 최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그것이 매우 짧은 순간이라 하더라도 이타적일 때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사족이지만 결말 부분에 위에서 언급한 여러 설정 중 입양과 관련된 오류가 있다.

물론 편법으로 행했다고 하면 그만이겠으나, 스토리상으로 아무리 불법이라 하더라도 형식적인 절차를 지키려고 노력한 인물들의 행보를 고려하면 큰 오류가 아닐까 싶다.

다만 그 오류가 이야기의 메시지나 감동에 주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300페이지 초반으로 분량이 그리 길지 않고 글과 전개도 매끄러워서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초반부터 차츰차츰 고조되는 긴장감도 좋았고 후반부의 반전도 꽤 훌륭하며 감동도 있는 결말이어서 읽고 난 후의 느낌이 개운했다.

허황된 소재가 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꽤나 재미있게 읽어서 더 짧게 느껴지는 것 같다.

딸을 향한 처절한 사랑을 보여주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읽어도 후회하지 않을 작품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