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로지 - 히어로 만화에서 인문학을 배우다
김세리 지음 / 하이픈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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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빌런은 스스로를 결코 악한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의를 구현한다고 믿는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들을 엄밀히 구분해야만 한다. 

힘이 있음에도 약자 편에 서는 자들은 영웅이다. 

힘 있는 자들에게는 감히 대적하지 못하면서 약자만을 괴롭히는 자는 빌런이다. (pg 282)



엔드게임 이후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몸살을 겪으면서 전 세계 영화 시장을 주름잡던 마블의 위세도 다소 꺾인 느낌이다.

하지만 2030은 물론 그 윗세대까지 슈퍼히어로라는 다소 유치해보이는 소재로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둔 것은 놀라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만화 기반의 캐릭터들에게 푹 빠지게 만드는 마블의 방대하고도 매력적인 세계관을 소재로 한

인문학 책이 나왔다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읽기 시작했을 때의 첫인상은 저자가 MCU로 대표되는 마블의 영화들은 물론이고 경쟁사라 할 수 있는 DC코믹스까지도 

초기작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충실하게 섭렵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속된 말로 '진성 덕후'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세세한 부분까지 책에 녹여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곳곳에 보였다.


특히 개인적으로도 슈퍼히어로 관련 그래픽노블 중 최고로 꼽는 '왓치맨'과 '다크나이트 리턴즈'에 대한 분석이 인상적이었다.

그 두 작품에서 보여지는 슈퍼히어로들은 우리가 흔히 만화책에서 기대하는 권선징악의 전형적인 히어로물과는 확연히 다르다.


간단히 말하면 슈퍼히어로들끼리의 분쟁이라고 보면 되는데, 양쪽이 모두 대의적인 명분에서는 '선'의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한 쪽을 명백하게 '악'으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단순히 악당이 나쁜 짓을 하면 슈퍼히어로가 나타나 이를 응징하는 단순한 패턴에서 벗어나 슈퍼히어로란 무엇이며

그 존재가 어떤 도덕적 딜레마를 불러 일으키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하면 된다. 

작가는 이 두 작품에서 시작해 마블의 초대박 이벤트였던 '시빌워'로 논지를 확장해 나간다. 


그러면서 마블의 히어로들이 고대부터 인류에게 존재했던 '신화'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마블이 그리스 로마 신화나 북유럽 신화처럼 종교와 결합된 형태는 아니지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를 상상해보고 그들을 통한 도덕적, 철학적 질문들을 던져주고 있다는 것이다.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MCU를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마블의 캐릭터들을 그들과 유사한 신화속 인물들과 비교하면서 

소개해주는데, 그러면서 저자가 내린 슈퍼히어로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이를 통해 슈퍼 히어로라는 존재의 기본적인 가닥이 잡힌 셈이다.

초인적인 힘, 혹은 그에 준하는 또 다른 힘(재력이나 권력)이 수반된 상태, 

확고부동한 그들의 윤리의식(다시 말해 정의관), 가면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충족되었다면 그는 슈퍼 히어로라 불릴 만하다. (pg 71)



저자가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소개해가면서 궁극적으로 다루고자 한 문제는 '시빌워'를 비롯한 최근의 슈퍼히어로물에서 보이는 

히어로들 간 가치관의 충돌이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슈퍼히어로물에서의 정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고 있다. 


캡틴 아메리카가 '미국의 이상'을 상징하는 히어로라면, 아이언맨은 '미국의 현실'을 상징하는 히어로이며, 

어떻게 보면 미국 정부의 행태를 대변하는 히어로이다. (pg 109)


위 구분은 다분히 코믹스 기반의 구분이기는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보여준다. 

'현실 감각이 다소 떨어지는 이상의 추구'와 '이상을 포기한 현실에의 순응' 사이의 갈등이기 때문이다. 

독자에 따라서 어느 쪽이 옳다고 쉽게 편을 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물론 그래픽노블 역시 다수의 독자를 타겟으로 한 가벼운 장르이므로 결과적으로는 작가가 어느 한 쪽 편을 들게끔 유도하지만,

그 대립이 주는 주제는 생각해볼만한 도덕적 질문을 던져준다. 


저자는 양쪽의 주장을 벤담의 '공리주의'와 칸트의 '정언명령'을 빌어 해석한다. 

긴 이야기를 요약하면, 저자는 '슈퍼히어로가 추구해야 할 정의란 결코 공리주의에 기반을 두어서는 안된다'라는 입장이다. 


우리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행위나 방식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정의 자체를 선택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선택적 정의란 있을 수 없다. 정의가 선택이라는 명제 자체가 이미 그것이 정의가 아님을 증명한다.

감히 선택할 수 없는 것, 이미 우리 마음속에 정답을 갖고 태어난 것. 

이것이 바로 '정의의 정의(The definition of justice)'이다. (pg 280)


즉, 결과적으로 잘 되었다 하더라도 행동의 의도와 수단이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았다면 그 행동은 영웅적일 수 없고 

결과가 참담했다 할지라도 행동의 의도와 수단이 도덕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행동은 영웅적이라는 뜻이다. 


위에서 저자가 예로 들었던 '왓치맨'의 결말을 보면, 뉴욕 인구의 절반을 희생해 냉전을 종식하고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쪽과

거짓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평화는 의미가 없으므로 이를 폭로해야 한다는 쪽이 나뉘게 된다. 

저자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지는 명백하다. 


종합적인 느낌으로는 '마블로 학문을 해보겠다' 라는 의미로 지어진 '마블로지'라는 제목의 거창함에 비하면, 

내용이 그렇게까지 알차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마블이나 DC의 원작 코믹스를 두루 섭렵하지 않았다면 책을 읽어감에 있어서 약간 소외감(?)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다. 

(저자가 '이 정도는 알겠지' 하고 써 내려간 부분이 이해가 안될 수 있다.)


하지만 두께도 얇고 글씨도 큰 편이라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아서 이쪽에 흥미가 있다면 충분히 재미나게 읽어봄직한 책이다. 

(실제로 나도 처가댁에 놀러간 주말 사이에 모두 읽었을 정도로 재미는 충분했다.)

진지빨고 이게 맞네 틀리네 논쟁할 수준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던 캐릭터들과 유사한 신화 속 인물들을 만나보고 

최근의 슈퍼히어로물에서 보이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사색에 잠시 빠져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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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들
태린 피셔 지음, 서나연 옮김 / 미래와사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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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우리는 외롭지 않으려고 바쁘게 지내고, 사회생활과 사랑하는 사람, 아이들에게서 목적의식을 찾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려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던 것들은 언제라도 빼앗길 수 있다.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기분이 나아진다. 

온 세상이 나와 마찬가지로 허술하고 외롭다. (pg 421-422)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재밌게 읽었다.

너무 재밌게 읽어서 내 서평이 이 작품을 접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미친 스토리를 이렇게 재미나게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몰입감이 대단한 작품을 만났다.


스토리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기 때문에 최대한 스토리 스포를 자제하려고 하는데,

기본 스토리를 안적으면 글 진행이 어려워서 출판사에서 적어둔 정도만 옮긴다. 


상상해보자. 내 남편에게 두 명의 아내가 더 있다고.
난 다른 아내들을 만난 적이 없고,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 이 독특한 합의 때문에 남편을 일주일에 단 하루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남편을 너무 사랑하니까. 아니, 남편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나 자신을 타이른다.
하지만 어느 날, 빨래를 하다가 남편의 주머니에서 종이를 발견한다. 해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에게 발행된 청구서다. 

해나가 다른 아내라는 것은 단박에 알 수 있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난 그녀를 추적하고, 거짓으로 우정을 나누기 시작한다. 해나는 내가 누구인지 꿈에도 모른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러 나온 해나의 몸에는 숨길 수 없는 멍이 보인다. 그녀는 남편에게 학대받고 있다. 

물론 그 남편은 내 남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 폭력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이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리고 남편의 비밀스러운 세 번째 아내는 누구일까?

(출처: 네이버 책 소개,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657809)


위 책 소개만 봐도 미친 스토리라는 것이 잘 느껴진다.

읽고서 '와이프가 셋이라고? 완전 좋겠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필시 미혼일 것이다.

결혼 생활을 좀 했다면 느낄 수밖에 없다. 

배우자는 하나로 매우 충분하며 인류가 일부일처제를 택한 것은 위대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여하간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아내가 셋 있는 남자의 두 번째 아내다.

(주인공의 이름 조차도 스포가 될 것 같아 그냥 주인공이라 쓰기로 했다.)

남편은 매주 목요일에만 만나고 다른 날은 다른 아내들에게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지는 작품 속에서 확인 가능한데, 사실 이 관계의 현실 가능성은 작품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무슨 소린지는 읽어보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심경 변화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엄청 상세한 편이다. 

세밀한 심리 묘사 덕분에 내가 저런 상황을 겪어봤을리도 없고, 심지어 여성도 아닌데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엄청 잘 되는 느낌이었다.

심지어는 몰려드는 감정의 강도가 너무 쎄서 중간중간 책을 내려놔야 할 정도였다.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은 감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작품의 큰 줄기는 주인공이 다른 아내들의 신상을 알게 되면서 겪는 심리적인 변화이다. 

처음에는 기묘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남편을 사랑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지독하게 독특한 우리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그게 바로 사랑이다. 그렇지 않은가?

배우자에게 딸린 것도 함께 해결하는 것이 사랑이다. 내 배우자에게는 다른 여자 둘이 딸려 있다. (pg 51)


쉬 이해가 가진 않지만 누군가를 너무도 사랑하면 그 사람의 단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듯이 

그녀는 남편을 일주일에 하루라도 차지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하지만 다른 아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과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다른 아내들에게는 자신에게 없는 다른 매력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질투와 불안감이 그녀를 덮친다. 


이런 심경 변화 덕분에 사건은 결국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작품의 마지막까지도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도무지 끝을 예상할 수 없는 미궁을 헤쳐가는 듯한 긴장감을 이어간다. 


덕분에 4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두께임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이 읽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외롭지 않으려고 바쁘게 지내고, 사회생활과 사랑하는 사람, 아이들에게서 목적의식을 찾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려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던 것들은 언제라도 빼앗길 수 있다.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기분이 나아진다. 

온 세상이 나와 마찬가지로 허술하고 외롭다. (pg 421-422)


작가가 페미니스트인 것 같은데 스토리에 페미니즘적 시각이 거부감 없이 잘 담겨 있는 것도 장점이다. 

최근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가스라이팅'의 위험성도 간접적으로 경험해볼 수 있다. 

가부장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 가스라이팅에 능한 남자에게 이용당하는 주인공의 삶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도 크게는 '인간 관계'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인간 관계가 그렇겠지만 사실 일방적인 관계는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가깝게 지내는 사이일수록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더욱 중요해지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배우자는 하나로 충분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평생을 살아도 옆에서 잠든 사람의 속도 잘 모르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물론 '절대 바람은 피지 말아야겠다' 정도의 저렴한 감상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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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여니 양자역학이 나왔다 - 읽을수록 쉬워지는 양자역학 이야기
박재용 지음 / Mid(엠아이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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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돌이인 주제에 양자역학을 이해해 보겠다며 이 책 저 책을 기웃거리고 있다.

불행히도 그 중 서평쓰기에 성공한 책은 단 하나도 없었다.

분명 읽긴 다 읽었는데 책을 덮은 후 뭘 읽었는지 정리하자니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 역시 나의 양자역학 짝사랑의 연장선상에서 접하게 된 책이다.

뭔가 제목부터 '쉽게 설명해줄게 츄라이 츄라이'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결과적으로는 이 책이 내가 서평을 남길 수 있는 첫번째 양자역학 책이 되었지만 사실 쓰는 입장에서도 썩 개운한 기분은 아니다. 

지금도 내가 양자역학에 대해 뭘 알고 있는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책을 덮은 후의 감상을 먼저 짧게 남기자면 문돌이 입장에서는 이 책 역시 결코 쉽지는 않았다.

기존에 양자역학을 쉽게 설명해주는 책을 조금이나마 접해본 입장에서도 모르는 용어들이 너무 많아서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특히나 'A라는 것이 있는데 이 것이 B와 만나면 C의 상태가 되고 우리는 이를 D라고 부른다'라는 식의 설명이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데, 

문장 속 A부터 D까지 전부 모르는 용어인 경우가 많으니 당연히 이해가 더딜 수밖에 없다. 


물론 나의 이해 부족이 저자나 책의 잘못은 아니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해한 바를 조금 정리해 두려고 한다. 


먼저 양자역학은 엄청나게 작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

물론 그 작은 것이 모여 우리가 사는 세상을 형성하고 있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현실 세계(거시 세계)와 양자 수준의 미시 세계는 적용되는 물리법칙이 다르다. 

때문에 양자역학 관련 서적을 처음 접하면 이해가 쉽지 않은 것이다. 


가장 먼저 입자와 파동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상 생활에서는 모든 것들을 입자와 파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것이 입자인지 파동인지를 알면 그 움직임을 측정하고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 수준으로 시각을 좁히면 입자와 파동의 경계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 시작점이 바로 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 책에서도 기나긴 역사 속에서 빛의 입자성 혹은 파동성을 증명하고자 애썼던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결과만 정리하자면 결국 빛은 입자와 파동 두 가지의 성질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세상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에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돌고 있는데, 

이 전자 역시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것이 양자역학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이중슬릿 실험과 슈레딩거의 고양이을 비롯한 양자역학의 재미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시작된다. 

전자라는 것이 관측하는 순간 입자처럼 움직이고 그냥 두면 파동의 형태로 움직인다는 것이 결론이기 때문이다. 

파동이라는 것은 동시에 여러 군데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므로 당연히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전자라는 것의 위치 역시 마치 행성들이 태양 주변을 돌듯 원자핵 주변을 전자가 일정한 궤도로 뺑뺑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존재할 수 있는 확률로만 계산할 수 있다고 한다. 

결국 확률이 0이 아닌 이상 그 범위 내 어디든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익숙해 보이는 왼쪽 그림이 아니라 오른쪽 그림처럼 표현된다는 의미이다. (그림: pg 64)


결국 우리 몸도 원자로 이루어졌다고 본다면, 우리 몸 속의 전자들도 관측하지 않으면 파동이 된다.

(물론 바로 옆 원자들이 서로를 관측하는 셈이니 결코 관측되지 않는 형태로 존재할 수 없겠지만)

바로 이 부분에서 각종 SF물에 등장하는 워프니, 멀티버스니, 시공간의 초월이니 하는 개념들이 파생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현실과 괴리된 사례 대신 우리 실생활 속에서 양자역학적 지식으로 밝혀낸 것들을 함께 알려준다. 

물론 양자역학이 어떻게 여기에 관여하고 있는지를 전문적으로 풀면 독자 대부분이 이해를 못할테니

'이런 이런 부분이 양자역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더라' 정도의 설명이 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그 중 가장 신기했던 것이 광합성의 원리이다.

사실상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체는 식물의 광합성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생명의 근원적인 활동인데,

이 광합성 과정에 양자역학적 움직임이 없다면 식물이 이 정도의 속도로 광합성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또한 양자역학이 일반 대중들에게도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유명 IT 회사들에서 만들고 있는 양자컴퓨터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이 책에서는 양자 컴퓨터에 대한 소개도 비교적 상세히 해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일반적인 컴퓨터와 무엇이 다른지 궁금했는데 일면 궁금증이 해소된 것 같다. 

 

세상이 발전할수록 컴퓨터에 요구하는 성능은 계속 높아지고 이 요구를 수용하려면 선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속도로 선폭이 좁아지면 결국 이 양자터널링 현상이 발목을 잡게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양자컴퓨터인 것이지요. (pg 156-157)


컴퓨터에 들어가는 반도체의 집적도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반면 크기는 계속해서 작아지고 있는데 이런 기술 개발 과정이 반복되어 

결국 그 크기가 양자역학적으로 유의미할 정도로 작아져서 양자터널링 현상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전류가 흘렀다 끊겼다 하면서 데이터를 전송하는 것이 반도체인데, 인근 반도체와의 거리가 너무 좁아서 양자터널링이 

발생하면 계속해서 전류가 흐르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매일 쓰는 컴퓨터의 기술 개발이 이 정도인 것도 신기하고 이를 양자컴퓨터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한 부분이었다. 


총평을 하자면 이 책은 저자가 쉽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여실히 보인다.

그림도 많고 서술도 친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전공자가 보기에 쉬운 책은 결코 아니었다. 

설명하고자 하는 개념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히려 양자역학의 기초적인 지식을 조금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얻을 것이 더 많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족이지만, 책에 옥의 티가 있다. 

아래의 그림은 책의 148페이지인데, 도체와 부도체 그림이 서로 뒤바뀌어 있다. 

설명을 읽으면 이해가 가긴 하지만, 설명을 돕는 그림인데 그림이 틀려 있으니 처음에는 엄청 헷갈렸다. 

내가 이해한 바 내에서는 이것밖에 못찾았지만, 혹시라도 다음 판본이 나온다면 이런 오류들이 다 수정되길 바란다. 

(pg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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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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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하버드와 그 밖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소득 상위 1퍼센트(연간 63만 달러 이상) 출신의 학생은 하위 50퍼센트 가정 출신 학생보다 많다.

노력과 재능 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는다. - 중략 -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pg 51)




마이클 샌델이라는 반가운 이름이 다시 서점에 등장했다.

'정의'라는 키워드를 통해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들을 만나온 그가 이번에는 '능력주의'에 관한 책을 펴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해에 읽은 대니얼 마코비츠의 '엘리트 세습'이라는 책과 일맥상통하는 주제여서 더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이 책 역시 미국 사회에 널리 퍼진 학력을 바탕으로 한 능력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하버드와 그 밖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소득 상위 1퍼센트(연간 63만 달러 이상) 출신의 학생은 하위 50퍼센트 가정 출신 학생보다 많다.

노력과 재능 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는다. - 중략 -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pg 51)


아메리칸 드림이란 누구나 노력하면 원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실상은 점점 더 계층간 이동이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고소득자는 아이를 명문대에 진학시키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퍼붓고 이들과 경쟁해야 하는 저소득층 아이들은 

진짜 천부적인 재능이 있지 않는 한 '게임이 되지 않는' 상황에 놓여 있다. 


저자는 이런 능력주의가 공동체를 약화시키는 근본 원인이라 지적한다.

능력주의의 수혜를 받고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이 명확히 나뉘며 이는 인종, 성별로 인한 차별과도 다르다는 것이다.


엘리트 계층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성취는 온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반대로 사회의 취약계층은 요즘 말로 하면 '노오오오오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비난에 직면해 있고, 

저소득층 스스로도 일면 그렇게 믿게 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 만하다는 것이다. -중략-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한다. 패자 스스로마저도 말이다. 

일자리가 없거나 적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준다. (pg 53)


능력주의가 타고난 배경이나 성별, 인종과는 무관하게 공정함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나타난 데이터로 보면

태어난 배경, 특히 부모의 경제력이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위 명문대라 불리는 S.K.Y 입학생 통계를 보면 해가 갈수록 고소득층 자녀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입학 전형 등으로 여러 장치들을 두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같은 대학 내에서도 어떤 전형으로 

입학했는지를 두고 아이들끼리 차별한다는 뉴스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같은 대학 내에서도 그러니 대학 서열이 확연히 나뉘는 우리 사회에서 다른 대학 출신자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능력'이라는 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우연히 현재 사회에서 과도하게 인정해주고 있는 것일 따름이지 

그 능력의 유무가 현대 사회가 보여주는 현저한 임금 격차를 불러오는 타당한 이유라는 증거도 없다는 것도 보여준다.

일례로, 자산관리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보다 사회적으로나 능력적으로 우월하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들의 소득 격차는

어마어마하다. 이를 순전히 능력에 따른 보상 차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현대 사회의 '임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능력'에 기반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능력주의는 다양한 측면에서 현대 사회에 악영향을 준다. 


첫째, 노골적인 불평등이 이어지고 사회적 이동성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는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책임자이며, 

우리가 얻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라는 메시지가 사회적 연대를 약화하며, 세계화에 뒤쳐진 사람들의 사기를 꺾는다.

두 번째, 대학 학위가 그럴 듯한 일자리를 얻고 품격 있는 삶을 살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는 주장은 '학력주의 편견'을 조성하며, 

그로써 노동의 명예를 줄이고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위신을 떨어뜨린다. 

셋째,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고 가치중립적인 전문가들의 손에 맡길 때 가장 잘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은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일반 시민의 정치권력을 거세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pg 125-126)


저자는 책의 상당한 분량을 통해 능력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는데 특히 아래의 대목이 흥미로웠다.


대졸 엘리트가 그보다 못한 교육 수준의 대중을 어떻게 낮춰 보는지를 넘어, 

이 연구보고서의 저자들은 몇 가지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 냈다. 

첫째, 그들은 교육 받은 엘리트가 교육 수준이 낮은 대중보다 깨어 있어서 더 관용적이라는 익숙한 생각이 어긋남을 포착했다. 

그들에 따르면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는 보다 못한 교육 수준의 대중에 비해 편견이 결코 적지 않다. 

다만 편견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더욱이 엘리트는 그런 편견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는 반대할지 모르나, 

저학력자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는 '그러면 어때?'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pg 160)


즉, 교육 수준과 편견의 수준은 별 상관이 없고 각자 편견을 갖는 부분이 다를 뿐이라는 결론이 나왔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한 조사를 진행한다면 굉장히 유사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능력주의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면서 정치 측면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좋은 대학 출신의 엘리트들이 정치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아래의 대목은 눈 여겨 볼만 한 점이다. 


2000년대 미국과 서유럽에서 비대졸자 시민은 단지 업신여겨질 뿐이 아니다. 

선출 공직에 전혀 참여할 수가 없다. 미 의회에서는 하원의원 95퍼센트와 상원의원 100퍼센트가 대졸자다. -중략-

그리고 지난 50년 동안 의회는 인종, 민족, 성별에 있어서는 더 다원화되었다. 

그러나 학력과 출신계층에서는 훨씬 일원화되었다. -중략-

미국 노동자의 약 절반은 육체노동, 서비스직, 사무직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선출 전 그런 직업을 갖고 있던 연방의회 의원은 2퍼센트에 못 미친다. -중략-

영국 전체를 통틀어 70퍼센트는 비대졸자다. 국회의원의 경우에는 12퍼센트만 그렇다. 

하원의원 열 중 아홉이 대졸자이며 넷 중 하나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나왔다. (pg 162)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 체계에서 전체 인구 구성과는 아주 동떨어진 일부 집단이 

통치를 대신 해주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인종, 성별은 다원화 되었지만 학력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오히려 일원화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기준이 경제적 계층 차이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현황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21대 국회의원 300명 중 103명이 SKY출신이라는 뉴스를 찾을 수 있었다.

(출처: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1137/clips/491)

전체의 3분의 1이 넘는데 실제 SKY에 입학하는 학생 비율을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비율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나라를 통치하는데 당연히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여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저자가 친히 반박도 해주고 있다. 


빵빵한 학력을 갖춘 고학력 리더들이 더 좋은 정책을 개발하고 더 합리적인 정치 담론을 이루지 않겠는가?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미국 연방의회와 유럽 국회들에서 오가고 있는 정치 담론을 슬쩍만 들어 봐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중략-

그리고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pg 164-165)


이 구절을 읽고 나니 우리나라 정치는 너무 좌, 우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당에 180석을 몰아주고도 나라가 변하지 않는 이유를 이 능력주의 기반의 엘리트 정치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놈들이나 그 놈들이나 잘 사는 엘리트 출신들임에는 차이가 없으므로 일반 사람들의 삶을 잘 모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그들을 정치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논리는 당연히 아니다. 

그저 그들이 대표해야 할 비율에 비해 과도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 뿐이다. 


저자는 그래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했을까?

'엘리트 세습'에서도 대입 전형과 관련한 여러 해결책이 제시되었던 것처럼 저자도 특이한 해결책들을 제시한다.

그 중에는 일정 정도의 기준만 통과했다면 차라리 제비뽑기로 대입을 결정하자는 파격적인 제안도 포함되어 있다. 

아이들을 줄 세우기 위해 소수점 몇 자리까지 극한의 경쟁을 통해 순위를 정하지 말고, 

일정 기준 이상이면 차라리 운에 맡기는 것이 공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양성 확보도 충분히 가능하다. 예를 들어 소수민족이거나 장애인이면 2표를 주는 방식 등으로 보완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현재 아이비리그 등 소위 명문대의 프리미엄이 많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대입자 스스로도 자신이 그 대학을 다니는 것이 온전한 자신의 노력이 아닌 일정 부분 운에 기반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저자는 그렇게 되는 것이 대학이 경제력 세습을 위한 기구가 아닌 교육 기관으로서 존재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현재 미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기부 입학 역시 차라리 판매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제안한다. 

현재의 기부 입학은 당사자 역시 부모가 말하지 않는 이상 자신이 기부 입학으로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체계이지만, 

판매 방식이라면 누구나 해당 학생이 돈으로 학교를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저자의 표현대로 '과도하게 뻐기는' 현상도 자연스레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대학에서 녹을 먹는 입장에서 보면, 현실 가능성을 떠나 이런 논의가 시작이라도 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인 모습은 미국과 다르지만 우리 사회 역시 능력주의가 사회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데,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인식은 아직 부족한 것 같다. 

오히려 점점 더 능력주의 위주로 돌아가야 한다는 담론이 지배적인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대입에서의 정시 확대 요구이다. 

수능 역시 부모의 경제력에 비례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전 계층에서 이를 지지한다는 것은 

능력에 따라 줄을 세우는 것이 공정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능력주의에 대한 폐해는 다른 매체에서도 종종 봐왔던 터라 아주 새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현대 사회가 능력주의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지금 이런 논의들이 나온다는 것이 반갑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 대학이 있기 때문에 더 관심이 가는 주제이기도 하다.

앞으로 관련 논의들이 더 진전되어 보다 매력적인 대안들을 찾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이클 샌델의 책이 인기 있는 이유기도 하지만 현학적인 표현 없이 어렵지 않게 쓰여져 있어서 이전에 읽었던 '엘리트 세습'과 비교하면 

훨씬 쉽게 읽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이전의 '정의' 열품에 이어 '능력주의'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대중적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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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인상깊은 구절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걸 바란단다. 그러다 안 되면 평범함을 바라지.

그게 기본적인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이다, 평범하다는 건 사실 가장 이루기 어려운 가치란다. (pg 90)



5월 한 달, 이직한 보람도 없이 주말이고 평일이고 정신없이 보낸 나에게 간만에 소설 한 권 읽을 여유를 주기로 했다.

배송이 이상하게 늦어져서 토요일에 받았는데 주말에 받은 김에 아이는 유튜브 키즈에게 맡기고 모처럼 책 속에 빠져 들었다. 

별 기대없이 그냥 잘 팔린다길래 선택한 책인데 다행히(?) 몰입도가 상당해서 손에서 놓을 수 없이 읽어 나갔다.


작품의 주인공인 윤재는 머릿 속 아몬드만한 사이즈의 편도체에 이상이 있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다. 

좋다, 싫다, 기쁘다, 슬프다 등 아무런 느낌 없이 그냥 사건들이 일어나면 이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만 있다. 

어릴 적 윤재의 병을 알게 된 엄마와 외할머니는 필사적으로 아이를 사회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 뜻밖의 사건으로 엄마와 외할머니를 잃은 윤재는 학교에서 '곤이'라는 문제아를 만난다.

어릴 적 부모를 잃어버려 범죄의 길로 접어든 곤이는 자신의 가족이 눈 앞에서 죽어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둘 사이에 일어나는 내면의 변화들이 소설의 주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줄거리로 정리하면 별 것 없어 보이는 이야기일 수 있는데, 작가의 문장력 덕분인지 이상하게(?) 재미가 있다. 

260여 페이지 정도로 길이도 길지 않은 덕분에 배송 온 당일에 다 읽은 몇 안되는 책이 되었다. 

집사람이 뭔 내용이길래 벌써 다 봤냐고 묻길래 대충 스토리를 전달했더니 '그게 재밌다고?'라는 반응이었다. 

나도 스토리를 통해서는 그 이상 설명을 못하겠어서 일단 좋았던 점을 추려보려 한다. 


일단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는 묘사가 생각보다 현실감 있었다.

감정이 없으니 모든 현상을 무미건조한 느낌으로 볼 것 같은데 그 무미건조함 속에 뭔가 울림이 있는 느낌이랄까. 


늘 한 가지 정답을 제시하던 엄마의 가르침에는 좀 위배됐지만 나는 그런 결말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치 이 세상에 정해진 답은 없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남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서 꼭 정해진 대응을 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모두 다르니까.

나같이 '정상에서 벗어난 반응'도 누군가에겐 정답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g 74-75)


등장인물이 많지는 않은데 각기 명확한 특징들이 있어서 좋았다.

불운하게 태어났지만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던 윤재와 유복하게 태어났지만 나쁜 사람들 손에서 자라난 곤이의 차이도 

극명하게 볼 수 있다. 


엄마는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중략-

우린 가족이니까 손을 잡고 걸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반대쪽 손은 할멈에게 쥐여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서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내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pg 171-172)


작가의 말을 보면, 작가가 '내 자식이 이래도 나는 자식을 사랑할 수 있을까' 싶은 캐릭터로 윤재와 곤이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결국 자식에게 있어서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책이 '영어덜트' 카테고리로 구분되어 있고 청소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지만, 

상기의 이유 때문에 어린 자식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도 한번쯤 읽어봄직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를 조금 더 확대해보자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는지도 사람의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한 번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는 낙인이 찍히고 나면 그 낙인을 벗어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인터넷을 보면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 같지만, 

진짜 그렇다면 교육도, 종교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은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소설일 뿐이지만 이 책에는 '사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어서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내용 상 감상에 담지 못했지만 가슴에 남았던 구절들을 옮겨둔다.


할멈의 표현대로라면, 책방은 수천수만 명의 작가가 산 사람, 죽은 사람 구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구 밀도 높은 곳이다.

그러나 책들은 조용하다.

펼치기 전까진 죽어 있다가 펼치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쏟아 낸다. 

조곤조곤, 딱 내가 원하는 만큼만. (pg 132)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pg 245)


여담이지만 읽으면서 영상물로 제작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작가가 영화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한다.

청소년들이 책 읽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영상물로 보면 상상의 여지가 사라지는 것 같긴 할테니 내심 이해가 간다. 

당장 수중에 들어올 돈 보다 그런 가치를 소중히 하는 작가라고 하니 뭔가 더 마음에 드는 기분이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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