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로지 - 히어로 만화에서 인문학을 배우다
김세리 지음 / 하이픈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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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빌런은 스스로를 결코 악한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의를 구현한다고 믿는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들을 엄밀히 구분해야만 한다. 

힘이 있음에도 약자 편에 서는 자들은 영웅이다. 

힘 있는 자들에게는 감히 대적하지 못하면서 약자만을 괴롭히는 자는 빌런이다. (pg 282)



엔드게임 이후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몸살을 겪으면서 전 세계 영화 시장을 주름잡던 마블의 위세도 다소 꺾인 느낌이다.

하지만 2030은 물론 그 윗세대까지 슈퍼히어로라는 다소 유치해보이는 소재로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둔 것은 놀라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만화 기반의 캐릭터들에게 푹 빠지게 만드는 마블의 방대하고도 매력적인 세계관을 소재로 한

인문학 책이 나왔다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읽기 시작했을 때의 첫인상은 저자가 MCU로 대표되는 마블의 영화들은 물론이고 경쟁사라 할 수 있는 DC코믹스까지도 

초기작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충실하게 섭렵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속된 말로 '진성 덕후'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세세한 부분까지 책에 녹여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곳곳에 보였다.


특히 개인적으로도 슈퍼히어로 관련 그래픽노블 중 최고로 꼽는 '왓치맨'과 '다크나이트 리턴즈'에 대한 분석이 인상적이었다.

그 두 작품에서 보여지는 슈퍼히어로들은 우리가 흔히 만화책에서 기대하는 권선징악의 전형적인 히어로물과는 확연히 다르다.


간단히 말하면 슈퍼히어로들끼리의 분쟁이라고 보면 되는데, 양쪽이 모두 대의적인 명분에서는 '선'의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한 쪽을 명백하게 '악'으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단순히 악당이 나쁜 짓을 하면 슈퍼히어로가 나타나 이를 응징하는 단순한 패턴에서 벗어나 슈퍼히어로란 무엇이며

그 존재가 어떤 도덕적 딜레마를 불러 일으키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하면 된다. 

작가는 이 두 작품에서 시작해 마블의 초대박 이벤트였던 '시빌워'로 논지를 확장해 나간다. 


그러면서 마블의 히어로들이 고대부터 인류에게 존재했던 '신화'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마블이 그리스 로마 신화나 북유럽 신화처럼 종교와 결합된 형태는 아니지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를 상상해보고 그들을 통한 도덕적, 철학적 질문들을 던져주고 있다는 것이다.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MCU를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마블의 캐릭터들을 그들과 유사한 신화속 인물들과 비교하면서 

소개해주는데, 그러면서 저자가 내린 슈퍼히어로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이를 통해 슈퍼 히어로라는 존재의 기본적인 가닥이 잡힌 셈이다.

초인적인 힘, 혹은 그에 준하는 또 다른 힘(재력이나 권력)이 수반된 상태, 

확고부동한 그들의 윤리의식(다시 말해 정의관), 가면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충족되었다면 그는 슈퍼 히어로라 불릴 만하다. (pg 71)



저자가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소개해가면서 궁극적으로 다루고자 한 문제는 '시빌워'를 비롯한 최근의 슈퍼히어로물에서 보이는 

히어로들 간 가치관의 충돌이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슈퍼히어로물에서의 정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고 있다. 


캡틴 아메리카가 '미국의 이상'을 상징하는 히어로라면, 아이언맨은 '미국의 현실'을 상징하는 히어로이며, 

어떻게 보면 미국 정부의 행태를 대변하는 히어로이다. (pg 109)


위 구분은 다분히 코믹스 기반의 구분이기는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보여준다. 

'현실 감각이 다소 떨어지는 이상의 추구'와 '이상을 포기한 현실에의 순응' 사이의 갈등이기 때문이다. 

독자에 따라서 어느 쪽이 옳다고 쉽게 편을 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물론 그래픽노블 역시 다수의 독자를 타겟으로 한 가벼운 장르이므로 결과적으로는 작가가 어느 한 쪽 편을 들게끔 유도하지만,

그 대립이 주는 주제는 생각해볼만한 도덕적 질문을 던져준다. 


저자는 양쪽의 주장을 벤담의 '공리주의'와 칸트의 '정언명령'을 빌어 해석한다. 

긴 이야기를 요약하면, 저자는 '슈퍼히어로가 추구해야 할 정의란 결코 공리주의에 기반을 두어서는 안된다'라는 입장이다. 


우리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행위나 방식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정의 자체를 선택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선택적 정의란 있을 수 없다. 정의가 선택이라는 명제 자체가 이미 그것이 정의가 아님을 증명한다.

감히 선택할 수 없는 것, 이미 우리 마음속에 정답을 갖고 태어난 것. 

이것이 바로 '정의의 정의(The definition of justice)'이다. (pg 280)


즉, 결과적으로 잘 되었다 하더라도 행동의 의도와 수단이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았다면 그 행동은 영웅적일 수 없고 

결과가 참담했다 할지라도 행동의 의도와 수단이 도덕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행동은 영웅적이라는 뜻이다. 


위에서 저자가 예로 들었던 '왓치맨'의 결말을 보면, 뉴욕 인구의 절반을 희생해 냉전을 종식하고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쪽과

거짓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평화는 의미가 없으므로 이를 폭로해야 한다는 쪽이 나뉘게 된다. 

저자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지는 명백하다. 


종합적인 느낌으로는 '마블로 학문을 해보겠다' 라는 의미로 지어진 '마블로지'라는 제목의 거창함에 비하면, 

내용이 그렇게까지 알차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마블이나 DC의 원작 코믹스를 두루 섭렵하지 않았다면 책을 읽어감에 있어서 약간 소외감(?)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다. 

(저자가 '이 정도는 알겠지' 하고 써 내려간 부분이 이해가 안될 수 있다.)


하지만 두께도 얇고 글씨도 큰 편이라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아서 이쪽에 흥미가 있다면 충분히 재미나게 읽어봄직한 책이다. 

(실제로 나도 처가댁에 놀러간 주말 사이에 모두 읽었을 정도로 재미는 충분했다.)

진지빨고 이게 맞네 틀리네 논쟁할 수준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던 캐릭터들과 유사한 신화 속 인물들을 만나보고 

최근의 슈퍼히어로물에서 보이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사색에 잠시 빠져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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