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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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하버드와 그 밖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소득 상위 1퍼센트(연간 63만 달러 이상) 출신의 학생은 하위 50퍼센트 가정 출신 학생보다 많다.

노력과 재능 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는다. - 중략 -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pg 51)




마이클 샌델이라는 반가운 이름이 다시 서점에 등장했다.

'정의'라는 키워드를 통해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들을 만나온 그가 이번에는 '능력주의'에 관한 책을 펴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해에 읽은 대니얼 마코비츠의 '엘리트 세습'이라는 책과 일맥상통하는 주제여서 더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이 책 역시 미국 사회에 널리 퍼진 학력을 바탕으로 한 능력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하버드와 그 밖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소득 상위 1퍼센트(연간 63만 달러 이상) 출신의 학생은 하위 50퍼센트 가정 출신 학생보다 많다.

노력과 재능 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는다. - 중략 -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pg 51)


아메리칸 드림이란 누구나 노력하면 원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실상은 점점 더 계층간 이동이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고소득자는 아이를 명문대에 진학시키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퍼붓고 이들과 경쟁해야 하는 저소득층 아이들은 

진짜 천부적인 재능이 있지 않는 한 '게임이 되지 않는' 상황에 놓여 있다. 


저자는 이런 능력주의가 공동체를 약화시키는 근본 원인이라 지적한다.

능력주의의 수혜를 받고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이 명확히 나뉘며 이는 인종, 성별로 인한 차별과도 다르다는 것이다.


엘리트 계층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성취는 온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반대로 사회의 취약계층은 요즘 말로 하면 '노오오오오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비난에 직면해 있고, 

저소득층 스스로도 일면 그렇게 믿게 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 만하다는 것이다. -중략-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한다. 패자 스스로마저도 말이다. 

일자리가 없거나 적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준다. (pg 53)


능력주의가 타고난 배경이나 성별, 인종과는 무관하게 공정함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나타난 데이터로 보면

태어난 배경, 특히 부모의 경제력이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위 명문대라 불리는 S.K.Y 입학생 통계를 보면 해가 갈수록 고소득층 자녀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입학 전형 등으로 여러 장치들을 두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같은 대학 내에서도 어떤 전형으로 

입학했는지를 두고 아이들끼리 차별한다는 뉴스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같은 대학 내에서도 그러니 대학 서열이 확연히 나뉘는 우리 사회에서 다른 대학 출신자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능력'이라는 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우연히 현재 사회에서 과도하게 인정해주고 있는 것일 따름이지 

그 능력의 유무가 현대 사회가 보여주는 현저한 임금 격차를 불러오는 타당한 이유라는 증거도 없다는 것도 보여준다.

일례로, 자산관리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보다 사회적으로나 능력적으로 우월하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들의 소득 격차는

어마어마하다. 이를 순전히 능력에 따른 보상 차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현대 사회의 '임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능력'에 기반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능력주의는 다양한 측면에서 현대 사회에 악영향을 준다. 


첫째, 노골적인 불평등이 이어지고 사회적 이동성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는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책임자이며, 

우리가 얻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라는 메시지가 사회적 연대를 약화하며, 세계화에 뒤쳐진 사람들의 사기를 꺾는다.

두 번째, 대학 학위가 그럴 듯한 일자리를 얻고 품격 있는 삶을 살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는 주장은 '학력주의 편견'을 조성하며, 

그로써 노동의 명예를 줄이고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위신을 떨어뜨린다. 

셋째,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고 가치중립적인 전문가들의 손에 맡길 때 가장 잘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은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일반 시민의 정치권력을 거세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pg 125-126)


저자는 책의 상당한 분량을 통해 능력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는데 특히 아래의 대목이 흥미로웠다.


대졸 엘리트가 그보다 못한 교육 수준의 대중을 어떻게 낮춰 보는지를 넘어, 

이 연구보고서의 저자들은 몇 가지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 냈다. 

첫째, 그들은 교육 받은 엘리트가 교육 수준이 낮은 대중보다 깨어 있어서 더 관용적이라는 익숙한 생각이 어긋남을 포착했다. 

그들에 따르면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는 보다 못한 교육 수준의 대중에 비해 편견이 결코 적지 않다. 

다만 편견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더욱이 엘리트는 그런 편견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는 반대할지 모르나, 

저학력자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는 '그러면 어때?'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pg 160)


즉, 교육 수준과 편견의 수준은 별 상관이 없고 각자 편견을 갖는 부분이 다를 뿐이라는 결론이 나왔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한 조사를 진행한다면 굉장히 유사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능력주의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면서 정치 측면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좋은 대학 출신의 엘리트들이 정치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아래의 대목은 눈 여겨 볼만 한 점이다. 


2000년대 미국과 서유럽에서 비대졸자 시민은 단지 업신여겨질 뿐이 아니다. 

선출 공직에 전혀 참여할 수가 없다. 미 의회에서는 하원의원 95퍼센트와 상원의원 100퍼센트가 대졸자다. -중략-

그리고 지난 50년 동안 의회는 인종, 민족, 성별에 있어서는 더 다원화되었다. 

그러나 학력과 출신계층에서는 훨씬 일원화되었다. -중략-

미국 노동자의 약 절반은 육체노동, 서비스직, 사무직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선출 전 그런 직업을 갖고 있던 연방의회 의원은 2퍼센트에 못 미친다. -중략-

영국 전체를 통틀어 70퍼센트는 비대졸자다. 국회의원의 경우에는 12퍼센트만 그렇다. 

하원의원 열 중 아홉이 대졸자이며 넷 중 하나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나왔다. (pg 162)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 체계에서 전체 인구 구성과는 아주 동떨어진 일부 집단이 

통치를 대신 해주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인종, 성별은 다원화 되었지만 학력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오히려 일원화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기준이 경제적 계층 차이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현황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21대 국회의원 300명 중 103명이 SKY출신이라는 뉴스를 찾을 수 있었다.

(출처: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1137/clips/491)

전체의 3분의 1이 넘는데 실제 SKY에 입학하는 학생 비율을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비율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나라를 통치하는데 당연히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여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저자가 친히 반박도 해주고 있다. 


빵빵한 학력을 갖춘 고학력 리더들이 더 좋은 정책을 개발하고 더 합리적인 정치 담론을 이루지 않겠는가?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미국 연방의회와 유럽 국회들에서 오가고 있는 정치 담론을 슬쩍만 들어 봐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중략-

그리고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pg 164-165)


이 구절을 읽고 나니 우리나라 정치는 너무 좌, 우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당에 180석을 몰아주고도 나라가 변하지 않는 이유를 이 능력주의 기반의 엘리트 정치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놈들이나 그 놈들이나 잘 사는 엘리트 출신들임에는 차이가 없으므로 일반 사람들의 삶을 잘 모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그들을 정치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논리는 당연히 아니다. 

그저 그들이 대표해야 할 비율에 비해 과도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 뿐이다. 


저자는 그래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했을까?

'엘리트 세습'에서도 대입 전형과 관련한 여러 해결책이 제시되었던 것처럼 저자도 특이한 해결책들을 제시한다.

그 중에는 일정 정도의 기준만 통과했다면 차라리 제비뽑기로 대입을 결정하자는 파격적인 제안도 포함되어 있다. 

아이들을 줄 세우기 위해 소수점 몇 자리까지 극한의 경쟁을 통해 순위를 정하지 말고, 

일정 기준 이상이면 차라리 운에 맡기는 것이 공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양성 확보도 충분히 가능하다. 예를 들어 소수민족이거나 장애인이면 2표를 주는 방식 등으로 보완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현재 아이비리그 등 소위 명문대의 프리미엄이 많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대입자 스스로도 자신이 그 대학을 다니는 것이 온전한 자신의 노력이 아닌 일정 부분 운에 기반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저자는 그렇게 되는 것이 대학이 경제력 세습을 위한 기구가 아닌 교육 기관으로서 존재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현재 미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기부 입학 역시 차라리 판매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제안한다. 

현재의 기부 입학은 당사자 역시 부모가 말하지 않는 이상 자신이 기부 입학으로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체계이지만, 

판매 방식이라면 누구나 해당 학생이 돈으로 학교를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저자의 표현대로 '과도하게 뻐기는' 현상도 자연스레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대학에서 녹을 먹는 입장에서 보면, 현실 가능성을 떠나 이런 논의가 시작이라도 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인 모습은 미국과 다르지만 우리 사회 역시 능력주의가 사회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데,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인식은 아직 부족한 것 같다. 

오히려 점점 더 능력주의 위주로 돌아가야 한다는 담론이 지배적인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대입에서의 정시 확대 요구이다. 

수능 역시 부모의 경제력에 비례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전 계층에서 이를 지지한다는 것은 

능력에 따라 줄을 세우는 것이 공정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능력주의에 대한 폐해는 다른 매체에서도 종종 봐왔던 터라 아주 새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현대 사회가 능력주의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지금 이런 논의들이 나온다는 것이 반갑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 대학이 있기 때문에 더 관심이 가는 주제이기도 하다.

앞으로 관련 논의들이 더 진전되어 보다 매력적인 대안들을 찾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이클 샌델의 책이 인기 있는 이유기도 하지만 현학적인 표현 없이 어렵지 않게 쓰여져 있어서 이전에 읽었던 '엘리트 세습'과 비교하면 

훨씬 쉽게 읽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이전의 '정의' 열품에 이어 '능력주의'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대중적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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