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타 1~2 세트 - 전2권 사람 3부작
d몬 지음 / 푸른숲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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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화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지난 번 '데이빗' 이라는 작품을 통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던 

작가의 다음 작품이 발간되었다고 하여 반가운 마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물론 원래 웹툰이고 연재도 오래 전에 끝났지만 아직 아날로그의 마음을 간직한 인간인지라 종이책으로 보고 싶은 욕망이 아직 강해서

책이 나올 때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지난 번 데이빗이 돼지의 몸에 담겨 태어난 인간의 영혼을 통해 '인간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면, 

이번에는 자아를 가진 프로그램을 통해 인간의 정의를 묻는다. 


전작인 데이빗은 내용을 대충 알고 봐도 재미가 있었던 반면, 에리타의 경우 조금이라도 스포일러를 당하면 사실상 재미가 상당히

반감될 수 밖에 없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최대한 스포에 주의하며 쓰려고 노력은 하겠으나, 데이빗의 팬이라면 에리타는 아무런 정보 없이 그냥 보기를 추천한다.



에리타의 세계관은 먼 미래에 인간이 영생을 바라며 만들었던 포루딘이라는 물질에서 시작된다.

포루딘은 세포를 보존할 수 있었지만 대기중에 노출되면 독성을 띄는 물질이었고, 무분별하게 포루딘을 생산하던 인류는 결국 

멸종에 이른다. (이 때 포루딘에 노출된 인체는 단순히 사망하는 것이 아니라 기괴한 모습의 괴물이 된다.)


포루딘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한 과학자가 자신의 딸을 살리고 인류를 멸종에서 구원하고자 만들어낸 만능 로봇 가온과 그가 돌보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자 과학자의 딸 에리타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과거 회상 장면을 제외하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대화가 가능한 등장인물은 총 셋이며 이들 모두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온전한' 인간의 카테고리에서는 벗어나 있다.

셋 다 자기 자신을 인지하고는 있지만(즉, 자아가 있지만) 자신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자와 

자신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자가 만난다.

작가는 이 둘의 차이를 보여주면서 과연 진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외관상으로 인간과 차이가 없고, 스스로도 자신이 인간이라 믿는 프로그램은 인간인가? 

심지어 누구도 그가 프로그램인지를 모른다면?


개인적으로는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제기되었던 질문이 다시금 떠올랐다. 

프로그래밍화 된 존재지만 스스로가 자신을 인간이라 믿으며 사는 것과 매트릭스 속 베터리지만 가상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 인간이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사실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해 볼 때에도 비슷한 결론이 도출된다.

사실 인간은 타인이 나를 인간으로 인지해줄 때에만 진정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늑대소년이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지만 사회화된 인간이 될 수는 없다는 것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자신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인간과 같이 사고하고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판단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심지어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각능력과 신체능력까지 가졌다면?

개인적으로는 이 경우에는 인간으로 부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존재가 자신을 사람으로 인정해달라고 주장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또한 흔히 말하는 '통속의 뇌'도 등장하는데, 통속의 뇌와 밖에서 활동하는 인공지능을 비교해보게도 만든다.

물론 독자 입장에서는 같이 서사를 함께하는 존재들에 더 애정이 갈 수밖에 없는 구조는 조금 아쉬웠지만 말이다. 



만화 에리타는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져주며 단순한 만화 읽기에서 복잡한 철학적 생각들을 해보게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 '자아의 인식' 자체가 상당히 중요한 변수라고 생각하는데, 

에리타 속 인물들은 이미 자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물론 그 자아의 인식 자체도 프로그래밍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내 나름의 결론을 내기가 쉬웠다. 

이전 작품인 데이빗이 다 읽고난 뒤에도 데이빗을 사람으로 봐야 할까, 아닐까를 고민하게 했다면 

에리타는 '이건 사람이라고 봐야지'라는 결론이 보다 쉽게 나오는 느낌이었다. 


전작인 데이빗보다는 책이 살짝 두꺼워진 느낌이지만 중간중간 전투신도 있고 컷들의 크기도 커서 읽는 속도는 더 빨랐던 것 같다. 

던져주는 질문들이 데이빗보다는 가볍다는 느낌을 받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d몬이라는 작가가 준비한 사람 3부작 중 2편을 끝냈다.

마지막이라고 하는 브랜든은 또 어떤 질문들을 던져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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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다섯 개 부탁드려요 - 21세기 신인류, 플랫폼 노동자들의 ‘별점인생’이야기
유경현.유수진 지음 / 애플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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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상깊은 구절
"기업에서 다음 달 월급을 10만 원 깎는다고 하면 다들 난리가 날테지만, 플랫폼에서는 매달 단가를 500원 깎으며 
 '왜? 라이더들이 많으니까.'라고 하면 매우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하죠.
 AI라든지 알고리즘이 내놓은 거의 신적인 결정이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면 비합리적인 사람처럼 보일 뿐이니까요." (pg 121)


집사람이 쿠팡 새벽배송을 처음 사용했던 날이 생각난다.
잠들기 전에 주문한 아이 기저귀가 출근하려고 문을 열자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출근 인사를 마치고 기저귀 박스를 집안에 내려놓자 집사람이 '세상 진짜 좋아졌다'라는 말을 했었다.
나는 불현듯 '이걸 갖다준 사람은 대체 몇 시에 일을 시작한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 스치고 지나쳤던 문제의식을 제대로 조명한 책이 나왔다. 
이 책은 소위 말하는 긱 워커, 각종 플랫폼을 통해 단기성 계약을 통한 노동을 제공하는 플랫폼 노동자들에 주목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배달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면서 배달기사들의 수입이 짭짤하다는 둥, 자영업 때려치우고 배달 시작한다 등등의 뉴스들도 제법 들려왔다. 
정부를 까기 위한 문구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가 결국 전 국민의 배달기사화냐라는 식의 조롱도 들려올 정도였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의 배달기사들은 진짜 떼돈을 벌고 있을까?


이 책은 배달기사 등 각종 플랫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인터뷰한 책이다.
책의 제목에 포함된 '별 다섯 개'는 플랫폼 노동자들이 일을 한 후 고객들로부터 받는 평가를 의미한다.
이 평점이 결국 다음 일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별점에 상당한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최근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자영업자들이 힘든 이유'라면서 진상 리뷰를 쓰는 음식점 이용자들에 대한 비판들이 올라오고는 하는데, 
음식점 외에도 가사노동, 운전, 배달, 메이크업, 심지어는 애완견 산책까지 내가 모르고 있던 다양한 분야의 플랫폼이 구축되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플랫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제공한 서비스를 기반으로 소득을 얻고 고객들이 좋은 평가를 내리면 계속해서 다음 일을 수주받을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평소에 잘 하다가도 최근에 평점이 몇 번 깎이면 결국에는 일거리를 받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플랫폼 노동자 입장에서는 플랫폼에서 일을 받지 못하면 결국 실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의미이다. 

플렉스를 매일 울고 웃게 하는 배송 단가와 배정 물량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쿠팡의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수년간 누적된 수요와 공급 데이터를 바탕으로 매일매일 새로운 '채용 조건'을 만들어 낸다. (pg 17)

그러면서도 자신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부차적으로 소요되는 모든 비용과 위험은 온전히 본인들의 몫이다.
이들이 모두 개인사업자들이기 때문이다. 
배달을 예로 들면, 배달 수단인 차량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온전히 배달기사가 부담한다. 
때문에 유가가 치솟으면 때로는 최저시급보다 못한 급여를 받게 될 수도 있다.
최저임금이 아무리 오른다 해도 이들이 받는 수수료는 이와 무관하게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평점이 중요한 플랫폼에서는 노동자들이 보다 많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더 많은 비용을 투입하게 된다.
예를 들어 가사노동이라면 본래 계약은 청소만 해주는 것이지만 사비를 들여 구입한 방역 제품으로 소독까지 서비스로 해주는 등 
부가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 받는 수수료 단가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그저 높은 별점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비용을 추가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사용자 측면에서는 그러한 경쟁이 서비스의 품질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출혈경쟁이 되고 있을 뿐이고, AI로 돌아가는 플랫폼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플랫폼에서는 인공지능 알고리즘과 데이터를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권력의 정도가 달라진다.
이런 구조 속에서 플랫폼 기업의 책임은 한없이 가벼워지고 비용은 낮아지는 반면, 모든 부담은 노동자에게 전가된다. 
결국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장시간 근로를 하거나 불안정한 노동을 감수해야 하며, 
이런 구조적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pg 58)

"기업에서 다음 달 월급을 10만 원 깎는다고 하면 다들 난리가 날테지만, 플랫폼에서는 매달 단가를 500원 깎으며 
 '왜? 라이더들이 많으니까.'라고 하면 매우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하죠.
 AI라든지 알고리즘이 내놓은 거의 신적인 결정이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면 비합리적인 사람처럼 보일 뿐이니까요." (pg 121)
 
이렇게 사람을 갈아 넣음으로써 돌아가는 플랫폼들은 막대한 자금을 끌어모으며 우리 삶의 전 영역을 지배하겠다는 듯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반면 체스판을 설계한 플랫폼 기업은 해마다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2009년 창업한 우버는 2019년 뉴욕 증시 상장 당시 1200억 달러(135조 원)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으며 
단숨에 100년 기업 GM과 포드를 뛰어넘었다. 
우버 기사들의 시간당 수입이 캘리포니아주 최저 임금에도 못 미치는 8.5달러인 것과는 사뭇 다른 결과다. (pg 204)
 
우리나라에서도 2조를 줘도 안판다고 했던 '배달의 민족'은 결국 5조에 팔렸다. 
배민이 처음 스타트를 끊은 것이 2010년이니 불과 10년만에 이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플랫폼 기업들이 이렇게 돈을 쓸어담고 있을 때 그 속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은 과연 얼마나 개선되었을까.

팬데믹 시대, 배송 박스를 든 쿠팡 플렉스들은 마치 어릴 적 우리에게 선물을 전해 주던 산타클로스 같은 존재다.
산타클로스가 목숨을 걸고 굴뚝을 통과해야 했다면, 팬데믹 시대 산타클로스는 감염병의 위험을 무릎쓰고 더 많은 활동을 해야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산타클로스보다 선물 박스에 더 관심이 많다. (pg 25)

아래의 페이지는 내 손으로는 차마 타자로도 못치겠어서 사진으로 옮긴다. 
 
(pg 112)

실상은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면서 상대방의 서비스를 이용할 뿐인데도 마치 그 사람을 본인이 산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얼마나 못 배워 먹었으면 상대가 저런 말과 행동을 모두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못할까 싶기도 하고,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면서 자신의 우월함을 느끼고 싶어하는 부류들은 대체 평소에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걸까 싶은 
생각마저 드는 구절이었다. 

위에서 소개한 대로, 플랫폼 노동의 어두운 측면에 많은 포커스를 맞춘 책이다. 
하지만 경력 단절이 있거나 특별한 경력이 없는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이 노동시장에 쉽게 뛰어들 수 있다는 장점도 분명 존재하고, 
자신이 고객을 찾아다니지 않더라도 고객이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점 역시 플랫폼의 매력 중 하나이다. 
사실 위에서 제시한 대부분의 단점들이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에 많은 인력이 몰리고 그렇기 때문에 단가가 낮아지고 있는 것이므로
그 장점들이 사실 단점을 야기하는 측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플랫폼에 기반한 경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호황을 누릴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속에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이 또 다른 플랫폼의 이용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정식 고용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플랫폼 노동자들이 대체하고 있다. 
극도로 유연화된 노동시장 속에서 노동의 단가는 계속 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일개 소비자에 지나지 않는 입장에서 무슨 뾰족한 대책이 생각날리는 없지만, 
그저 플랫폼 노동자들의 현실을 이해하고 그들을 대함에 있어서 최소한의 예우라도 갖추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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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 조지 오웰 서문 2편 수록 에디터스 컬렉션 11
조지 오웰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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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정부가 후원하지 않은 책에 대해 정부 부처가 검열의 권한을 조금이라도 갖는 현상은 분명히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사상의 자유와 발언의 자유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정보부 같은 정부 기구의 직접적인 간섭이 아니다.

출판사와 편집자가 박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여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특정한 주제들의 출판을 꺼리고 있다.

이 나라에서 지식인의 비겁함은 작가나 기자가 직면하는 최악의 적이다. (pg 9)



읽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보게 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심지어 갖고 있던 책을 두 번 읽은 것이 아닌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다른 버전을 소장하게 되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책과는 달리 초판본 서문과 우크라이나판 서문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끌렸지만, 

예쁘게 단장된 표지도 눈길을 끌었다. 



에디터스 컬렉션이라는 시리즈로 발간되는 것 같은데, 이름답게 앞 표지만 보아도 소장 욕구를 마구 자극한다. 

표지에는 나폴레옹일 것으로 보이는 돼지가 눈을 날카롭게 치켜들고 농장 뒤편에 존재감을 드러내며 바라보고 있다. 

색감이 예쁜 핑크색이어서 보기에 좋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소설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표지 작가는 조지 오웰을 좋아하는 터키인이라 하는데, 원작에 대한 애정이 그림에 잘 표현된 것 같아서 더 좋았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책의 표지도 고난의 삶을 살았던 조지 오웰의 고뇌에 찬 듯한 모습이 담겨 있어서 좋긴 하지만, 

오래 되기도 했고 뭔가 너무 '세계명작전집'스러운 느낌이 강해서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썩 매력적으로 보일 것 같지는 않다. 



동물농장이라는 작품에 대해서는 별도로 내용을 기술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번역가가 달라지긴 했지만, 이전에 소장하고 있던 책의 번역도 좋았고 이번 책도 좋았어서 딱히 차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 접한 버전에 실린 초판본 서문과 우크라이나판 서문이었는데, 길이는 짧지만 많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초판본 서문에는 조지 오웰이 영국에서 처음 동물농장을 책으로 내려고 했을 때의 어려움이 기술되어 있다. 

그 때 작가가 느낀 어려움을 아래의 문단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부가 후원하지 않은 책에 대해 정부 부처가 검열의 권한을 조금이라도 갖는 현상은 분명히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사상의 자유와 발언의 자유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정보부 같은 정부 기구의 직접적인 간섭이 아니다.

출판사와 편집자가 박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여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특정한 주제들의 출판을 꺼리고 있다.

이 나라에서 지식인의 비겁함은 작가나 기자가 직면하는 최악의 적이다. (pg 9)


즉, 정부 부처에서 출판을 막는 것이 아니라 여론이 두려워 출판사 스스로가 몸을 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소련을 비판하는 소설을 발간하는데 왜 영국 출판사들이 눈치를 볼까 처음에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등장하는 사회적 배경을 읽다보니 금새 이해가 되었다. 


소련이 혁명 이후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노동 해방'을 표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에 대한 비판이 자칫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보일 수 있었던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더 실제적인 이유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어쨌든 소련 역시 독일에 대항하는 연합군이었기 때문에 

동맹국을 비판하는 것을 주저했던 사회적 분위기도 형성되어 있었다. 


소련에 열광하는 현재 분위기는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전반적인 약화를 나타내는 증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만약 정보부가 나서서 이 책의 출판을 적극적으로 막았다 해도, 영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에 무비판적으로 충성하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므로, 소련의 이익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들은 검열뿐만 아니라

고의적인 역사 위조조차 기꺼이 참아 넘긴다. (pg 22)


하지만 조지 오웰은 자신이 사회주의자로서 당시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사회주의가 아닌 전체주의임을 

동물농장이라는 작품을 통해 비판하고자 했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주장을 가로막지 말라는 메시지도 단호하게 전달한다. 


사상과 발언의 자유에 반대하는 모든 주장에 대해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

여기에 나는 간단히 답한다. 

나는 그런 주장을 납득할 수 없으며, 지난 400년 동안 우리 문명은 그 반대의 주장 위에 건설되었다고. 

지난 10년 동안 나는 지금의 소련 정권이 대체로 사악한 존재라고 믿었다. 

그리고 내게는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있다. (pg 24)


이어 등장하는 우크라이나판 서문에서는 조지 오웰이 직접 기술한 자신의 인생사가 짧게 소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조지 오웰이 왜 작품들을 썼고 어떻게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동물농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돼지와 인간이 마치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이는 본인이 의도한 것과는 다르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

나도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에는 '돼지가 모습만 다른 인간이 된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의도한 바가 두 계층 사이의 불협화음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다시 작품을 접하니 

돼지는 결국 인간과는 또 다른 형태의 지배계층이었다는 것이 더 명확하게 이해되는 것 같았다. 


현재 소장하고 있는 두 책 모두 소설 내용은 동일하지만, 함께 실린 서문이 달라서 둘 다 소장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소장한 두 권 외에도 버전이 엄청 많은데, 이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책에 어떤 서문이나 에세이가 포함되어 있는지

잘 보고 선택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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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의 섬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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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그는 눈앞의 여자를 이 섬을 탈출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있었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어린 시절로부터, 아내와 친구들로부터, 그들의 모든 애정과 요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정신이란 텅 빈 도시를 영원히 헤매고 다니기 위해서. (pg 183-184)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콘크리트'와 고립을 상징하는 '섬'이라는 단어가 합쳐져 묘한 느낌을 주는 제목에 끌렸다.

띠지에 '로빈슨 크루소의 전복적 오마주'라는 문구가 적혀있는데,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섬에서 벌어지는 고립과 생존의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졌다. 


보통 소설을 소개하면서 스토리에 대한 스포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워낙 옛날 작품이기도 하고 

스토리를 안다고 해서 작품의 매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되어 스토리와 감상을 섞어 기술하고자 한다. 



잘나가는 건축가로 살아온 로버트 메이틀랜드라는 한 남자가 런던 근교의 입체 교차로를 지나다 교통사고를 내게 된다. 

차가 도로 아래로 추락하면서 다리에 큰 부상을 입게 되는데, 떨어진 곳이 하필이면 고속도로로 둘러싸인 교통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엄청나게 많은 차들이 매시간 주변을 지나가지만 누구도 그곳에 사고로 고립된 사람이 있을 것이라 쉽게 예상할 수 없는 그런 곳.

메이틀랜드는 부서진 차에 실린 자신의 짐과 주변 환경을 이용해 섬에서 탈출하고자 노력한다. 


작품 속 교통섬의 느낌이 나는 사진을 찾아보았는데, 아래처럼 고가도로로 둘러싸인 널찍한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속에 부서진 채로 방치된 방공호, 극장 건물 등의 잔해들과 메이틀랜드의 차와 마찬가지로 사고로 버려진 차들이 잔뜩 있는 

널직한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Under the Westway 

(사진 출처: https://www.r2h.co.uk/j-g-ballards-concrete-island)


일단 이런 교통섬에 갇힌다는 설정 자체가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이 작품의 배경이 1970년대라는 것이다.

휴대폰이나 GPS 같은 시설이 전무하고 도로의 비상전화도 부상당한 다리로 가기에는 거리가 제법 된다고 묘사되어 있다. 

물론 현대사회라 하더라도 교통사고로 휴대폰이 파손되거나 비가 많이 와서 고장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니 요즘이라고 아주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읽으면서 몇 년 전에 본 '김씨표류기'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물론 이 책이 훨씬 전에 나온 것이니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영화가 이 책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그 영화가 고립이라는 주제를 조금은 코믹하게 풀어냈다고 한다면, 이 작품에서의 고립은 처절하고 냉소적인 느낌을 준다.

아내와 자식, 내연녀까지 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던 그는 이 섬에서 한 순간 잡초와 같은 존재로 전락한다. 


그는 열린 문을 통해 안쪽을 기웃거리며 그의 다리로 손을 뻗는 짓밟힌 풀잎들 사이에서 좌석에 기댔다.

이 강인한 잡초야말로 행동과 생존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존재였다. (pg 73)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존재인 잡초. 

그는 잡초와 쓰레기로 가득찬 섬에서 탈출을 시도하지만 부상만 늘려가고 체력은 소진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비틀거리는 동안, 메이틀랜드는 육신에 대한, 그리고 염증에 부어오른 다리의 고통에 대한 관심이 흐릿해져감을 깨달았다.

그는 육체를 부분으로 나누어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중략-

섬을 그 자신이라 여기게 된 그는 폐차 무더기 쪽의 자신의 자동차를, 철조망 울타리를, 

그리고 뒤편에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중략-

그는 자신의 육신을 성체성사에 봉헌하는 성직자처럼 큰 소리로 선언했다. "나는 섬이로다." 

하늘에서 빛살이 드리웠다. (pg 89-90)


책의 중반부를 지나면서 그 섬에 사실은 원주민이 둘이나 있었고, 이들은 스스로를 섬에 가둔 존재들이어서 메이틀랜드 때문에 외부인이

섬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가면서 그는 기묘한 변화를 보여준다.


그는 눈앞의 여자를 이 섬을 탈출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있었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어린 시절로부터, 아내와 친구들로부터, 그들의 모든 애정과 요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정신이란 텅 빈 도시를 영원히 헤매고 다니기 위해서. (pg 183-184)


그에게 섬이란 것이, 그리고 고립이라는 것이 사실 그가 바라던 바였을지도 모른다. 

책임과 의무가 동반되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오는 권태감과 피로감을 떨쳐내고 싶었을수도 있겠다. 

비록 버려진 음식으로 연명하는 삶이지만 온전한 고독감, 

자기 자신마저 더이상 인지되지 않을 정도의 처절한 고독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섬과 자신을 일체화한 그는 결국 다시 혼자 섬에 남겨지게 된다. 


초반부를 읽을 때만 하더라도 도심 속 섬에서의 고립이라는 소재로 어떻게 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230여 페이지로 두꺼운 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길게 풀 수 있는 소재라는 생각이 별로 안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SF문학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달린 작가의 작품답게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고 읽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보면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겹쳐졌다. 

우리는 서로 부대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고독할 수 있는 시간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최근 한국의 중년 남성들에게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열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와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고 싶어하면서 자신만의 섬에 틀어박히고도 싶은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책의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메이틀랜드 역시 탈출하고 싶지만 탈출하고 싶지 않은 기묘한 느낌을 준다.

무의미한 탈출 시도를 계속하는 메이틀랜드를 보며 되지 않을 시험을 계속 붙들고 있는 장수생 청년들의 모습도 겹쳐보였다. 
어쩌면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는 것보다 그 목적을 향해 힘쓰는 자신의 모습에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지 않은 작품이지만 작품 자체가 다소 어둡고 처절한 느낌이어서 쉽게 손이 넘어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접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드는 걸 보니 역시 거장은 거장인가보다 싶다. 
발전된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조명해주는 작품들을 좋아하는 개인 성향에는 아주 잘 맞는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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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로지 - 히어로 만화에서 인문학을 배우다
김세리 지음 / 하이픈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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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빌런은 스스로를 결코 악한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의를 구현한다고 믿는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들을 엄밀히 구분해야만 한다. 

힘이 있음에도 약자 편에 서는 자들은 영웅이다. 

힘 있는 자들에게는 감히 대적하지 못하면서 약자만을 괴롭히는 자는 빌런이다. (pg 282)



엔드게임 이후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몸살을 겪으면서 전 세계 영화 시장을 주름잡던 마블의 위세도 다소 꺾인 느낌이다.

하지만 2030은 물론 그 윗세대까지 슈퍼히어로라는 다소 유치해보이는 소재로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둔 것은 놀라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만화 기반의 캐릭터들에게 푹 빠지게 만드는 마블의 방대하고도 매력적인 세계관을 소재로 한

인문학 책이 나왔다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읽기 시작했을 때의 첫인상은 저자가 MCU로 대표되는 마블의 영화들은 물론이고 경쟁사라 할 수 있는 DC코믹스까지도 

초기작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충실하게 섭렵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속된 말로 '진성 덕후'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세세한 부분까지 책에 녹여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곳곳에 보였다.


특히 개인적으로도 슈퍼히어로 관련 그래픽노블 중 최고로 꼽는 '왓치맨'과 '다크나이트 리턴즈'에 대한 분석이 인상적이었다.

그 두 작품에서 보여지는 슈퍼히어로들은 우리가 흔히 만화책에서 기대하는 권선징악의 전형적인 히어로물과는 확연히 다르다.


간단히 말하면 슈퍼히어로들끼리의 분쟁이라고 보면 되는데, 양쪽이 모두 대의적인 명분에서는 '선'의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한 쪽을 명백하게 '악'으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단순히 악당이 나쁜 짓을 하면 슈퍼히어로가 나타나 이를 응징하는 단순한 패턴에서 벗어나 슈퍼히어로란 무엇이며

그 존재가 어떤 도덕적 딜레마를 불러 일으키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하면 된다. 

작가는 이 두 작품에서 시작해 마블의 초대박 이벤트였던 '시빌워'로 논지를 확장해 나간다. 


그러면서 마블의 히어로들이 고대부터 인류에게 존재했던 '신화'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마블이 그리스 로마 신화나 북유럽 신화처럼 종교와 결합된 형태는 아니지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를 상상해보고 그들을 통한 도덕적, 철학적 질문들을 던져주고 있다는 것이다.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MCU를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마블의 캐릭터들을 그들과 유사한 신화속 인물들과 비교하면서 

소개해주는데, 그러면서 저자가 내린 슈퍼히어로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이를 통해 슈퍼 히어로라는 존재의 기본적인 가닥이 잡힌 셈이다.

초인적인 힘, 혹은 그에 준하는 또 다른 힘(재력이나 권력)이 수반된 상태, 

확고부동한 그들의 윤리의식(다시 말해 정의관), 가면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충족되었다면 그는 슈퍼 히어로라 불릴 만하다. (pg 71)



저자가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소개해가면서 궁극적으로 다루고자 한 문제는 '시빌워'를 비롯한 최근의 슈퍼히어로물에서 보이는 

히어로들 간 가치관의 충돌이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슈퍼히어로물에서의 정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고 있다. 


캡틴 아메리카가 '미국의 이상'을 상징하는 히어로라면, 아이언맨은 '미국의 현실'을 상징하는 히어로이며, 

어떻게 보면 미국 정부의 행태를 대변하는 히어로이다. (pg 109)


위 구분은 다분히 코믹스 기반의 구분이기는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보여준다. 

'현실 감각이 다소 떨어지는 이상의 추구'와 '이상을 포기한 현실에의 순응' 사이의 갈등이기 때문이다. 

독자에 따라서 어느 쪽이 옳다고 쉽게 편을 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물론 그래픽노블 역시 다수의 독자를 타겟으로 한 가벼운 장르이므로 결과적으로는 작가가 어느 한 쪽 편을 들게끔 유도하지만,

그 대립이 주는 주제는 생각해볼만한 도덕적 질문을 던져준다. 


저자는 양쪽의 주장을 벤담의 '공리주의'와 칸트의 '정언명령'을 빌어 해석한다. 

긴 이야기를 요약하면, 저자는 '슈퍼히어로가 추구해야 할 정의란 결코 공리주의에 기반을 두어서는 안된다'라는 입장이다. 


우리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행위나 방식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정의 자체를 선택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선택적 정의란 있을 수 없다. 정의가 선택이라는 명제 자체가 이미 그것이 정의가 아님을 증명한다.

감히 선택할 수 없는 것, 이미 우리 마음속에 정답을 갖고 태어난 것. 

이것이 바로 '정의의 정의(The definition of justice)'이다. (pg 280)


즉, 결과적으로 잘 되었다 하더라도 행동의 의도와 수단이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았다면 그 행동은 영웅적일 수 없고 

결과가 참담했다 할지라도 행동의 의도와 수단이 도덕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행동은 영웅적이라는 뜻이다. 


위에서 저자가 예로 들었던 '왓치맨'의 결말을 보면, 뉴욕 인구의 절반을 희생해 냉전을 종식하고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쪽과

거짓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평화는 의미가 없으므로 이를 폭로해야 한다는 쪽이 나뉘게 된다. 

저자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지는 명백하다. 


종합적인 느낌으로는 '마블로 학문을 해보겠다' 라는 의미로 지어진 '마블로지'라는 제목의 거창함에 비하면, 

내용이 그렇게까지 알차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마블이나 DC의 원작 코믹스를 두루 섭렵하지 않았다면 책을 읽어감에 있어서 약간 소외감(?)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다. 

(저자가 '이 정도는 알겠지' 하고 써 내려간 부분이 이해가 안될 수 있다.)


하지만 두께도 얇고 글씨도 큰 편이라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아서 이쪽에 흥미가 있다면 충분히 재미나게 읽어봄직한 책이다. 

(실제로 나도 처가댁에 놀러간 주말 사이에 모두 읽었을 정도로 재미는 충분했다.)

진지빨고 이게 맞네 틀리네 논쟁할 수준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던 캐릭터들과 유사한 신화 속 인물들을 만나보고 

최근의 슈퍼히어로물에서 보이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사색에 잠시 빠져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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