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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타 1~2 세트 - 전2권 ㅣ 사람 3부작
d몬 지음 / 푸른숲 / 2021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화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지난 번 '데이빗' 이라는 작품을 통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던
작가의 다음 작품이 발간되었다고 하여 반가운 마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물론 원래 웹툰이고 연재도 오래 전에 끝났지만 아직 아날로그의 마음을 간직한 인간인지라 종이책으로 보고 싶은 욕망이 아직 강해서
책이 나올 때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지난 번 데이빗이 돼지의 몸에 담겨 태어난 인간의 영혼을 통해 '인간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면,
이번에는 자아를 가진 프로그램을 통해 인간의 정의를 묻는다.
전작인 데이빗은 내용을 대충 알고 봐도 재미가 있었던 반면, 에리타의 경우 조금이라도 스포일러를 당하면 사실상 재미가 상당히
반감될 수 밖에 없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최대한 스포에 주의하며 쓰려고 노력은 하겠으나, 데이빗의 팬이라면 에리타는 아무런 정보 없이 그냥 보기를 추천한다.
에리타의 세계관은 먼 미래에 인간이 영생을 바라며 만들었던 포루딘이라는 물질에서 시작된다.
포루딘은 세포를 보존할 수 있었지만 대기중에 노출되면 독성을 띄는 물질이었고, 무분별하게 포루딘을 생산하던 인류는 결국
멸종에 이른다. (이 때 포루딘에 노출된 인체는 단순히 사망하는 것이 아니라 기괴한 모습의 괴물이 된다.)
포루딘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한 과학자가 자신의 딸을 살리고 인류를 멸종에서 구원하고자 만들어낸 만능 로봇 가온과 그가 돌보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자 과학자의 딸 에리타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과거 회상 장면을 제외하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대화가 가능한 등장인물은 총 셋이며 이들 모두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온전한' 인간의 카테고리에서는 벗어나 있다.
셋 다 자기 자신을 인지하고는 있지만(즉, 자아가 있지만) 자신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자와
자신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자가 만난다.
작가는 이 둘의 차이를 보여주면서 과연 진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외관상으로 인간과 차이가 없고, 스스로도 자신이 인간이라 믿는 프로그램은 인간인가?
심지어 누구도 그가 프로그램인지를 모른다면?
개인적으로는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제기되었던 질문이 다시금 떠올랐다.
프로그래밍화 된 존재지만 스스로가 자신을 인간이라 믿으며 사는 것과 매트릭스 속 베터리지만 가상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 인간이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사실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해 볼 때에도 비슷한 결론이 도출된다.
사실 인간은 타인이 나를 인간으로 인지해줄 때에만 진정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늑대소년이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지만 사회화된 인간이 될 수는 없다는 것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자신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인간과 같이 사고하고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판단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심지어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각능력과 신체능력까지 가졌다면?
개인적으로는 이 경우에는 인간으로 부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존재가 자신을 사람으로 인정해달라고 주장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또한 흔히 말하는 '통속의 뇌'도 등장하는데, 통속의 뇌와 밖에서 활동하는 인공지능을 비교해보게도 만든다.
물론 독자 입장에서는 같이 서사를 함께하는 존재들에 더 애정이 갈 수밖에 없는 구조는 조금 아쉬웠지만 말이다.
만화 에리타는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져주며 단순한 만화 읽기에서 복잡한 철학적 생각들을 해보게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 '자아의 인식' 자체가 상당히 중요한 변수라고 생각하는데,
에리타 속 인물들은 이미 자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물론 그 자아의 인식 자체도 프로그래밍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내 나름의 결론을 내기가 쉬웠다.
이전 작품인 데이빗이 다 읽고난 뒤에도 데이빗을 사람으로 봐야 할까, 아닐까를 고민하게 했다면
에리타는 '이건 사람이라고 봐야지'라는 결론이 보다 쉽게 나오는 느낌이었다.
전작인 데이빗보다는 책이 살짝 두꺼워진 느낌이지만 중간중간 전투신도 있고 컷들의 크기도 커서 읽는 속도는 더 빨랐던 것 같다.
던져주는 질문들이 데이빗보다는 가볍다는 느낌을 받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d몬이라는 작가가 준비한 사람 3부작 중 2편을 끝냈다.
마지막이라고 하는 브랜든은 또 어떤 질문들을 던져줄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