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역사
제임스 수즈먼 지음, 박한선.김병화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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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 사람이 종사할 수 있는 일의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공놀이도 선수들이 하면 일이 되고 남들과 웃고 떠드는데 너무 웃겨서 사람들이 돈을 주면서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면 그것도 일이 된다.

요즘엔 심지어 많이, 복스럽게 먹는 것을 정성스럽게 찍는 것조차도 일이 된다.

이렇게 일의 근원을 유추해 본다고 하면 흔히 수렵 채집 생활부터 시작해 농경, 상업, 수공업 등등 경제 발전사에 맞게 일 역시 변화해왔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즉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활동에서 일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이 논리를 동물 관찰부터 시작해나간다.

생각보다 많은 동물들이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에 주목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작은 새라 할지라도 남는 에너지를 사용하기 위해 인간이 보기에는 무의미해 보이는 활동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인류의 발달사를 통해 살펴본 인간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이를 엔트로피 법칙으로 풀어나간다.

엔트로피는 반드시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인류가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 이상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순간 인류는 그 에너지를 소모하기 위해 새로운 일을 찾아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다.

인류가 수렵채집을 하던 시절에도 불의 사용으로 인해 잉여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시기가 있었다.

불은 인간종의 역사에서 최초의 위대한 에너지 혁명일뿐만 아니라

최초의 위대한 노동 절약 테크놀로지이기도 했다. - 중략 -

우리가 알기에 한 해의 많은 기간 동안 비교적 혹독한 여건에서 살면서

경제활동을 하는 호모 사피엔스 성인들 집단은 보통 매주 15시간 내지 17시간

일하여 본인들 및 생산 활동을 하지 않는 같은 수의 부양가족을 먹여 살린다.

(pg 126-127)

놀랍게도 이렇게 시간이 많아진 결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언어'다.

현재까지 연구된 결과에 따르면 언어는 특정 시점에 굉장히 광범위하게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고 한다.

바로 그 점이 지금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가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의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정 종족에서 먼저 탄생해 외부로 전파되었다면 비슷비슷한 형태로 전수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여하간 저자에 따르면 이 언어의 탄생 시점이 인류가 불을 사용한 시점과 비슷하다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이미 인류는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자유 시간이 생겨도 편안해지지 못하고 뭔가로 마음을 채워야 할 필요가 진화 과정에서

지루함이 주는 부담을 없애줄 능력을 갖춘 자를 선택하라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유능하고, 똑똑하고, 상상력 있고, 음악적, 언어적으로 기민한 자들,

그러니까 언어를 이용하여 이야기하고, 재미있게 해주고, 매혹시키고,

차분하게 안정시키고, 즐겁게 하고, 영감을 고취시키고, 유혹할 수 있는 자들이 선호된다.

(pg 134)

불의 사용 덕분에 고대의 인간 공동체가 혼자서는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

또 재능 있는 이야기꾼이나 샤먼처럼 자신들의 가치를 비물질적 형태로 제공하는 사람들도 먹여 살리기가 쉬워졌다.

(pg 135)

이후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농경 사회로의 전환과 도시의 형성, 산업혁명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까지 인류의 성장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도 핵심은 생산력 확대로 인한 '잉여 에너지의 확대'이다.

산업혁명 초기까지만 해도 생산력의 확대가 인구증가에 상쇄되어 그 효과가 크지 않았지만 산업화가 고도화되면서 잉여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서비스 산업 종사자 비율이 농업 및 제조업 종사자에 비해 월등히 많은 선진국형 경제 체제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사실은 수렵채집인들이 적은 시간만 일해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었던 것에 반해 지금 우리는 주 40시간 이상을 일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시절 인류의 욕구가 매우 소박한 것들이었고 그 욕구를 손쉽게 채워줄 수 있는 자연환경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늘어나는 자유 시간만큼 우리의 욕구도 키워왔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여러 일을 창조하며 진화해왔다는 의미가 된다.

식량 생산에 시간이나 노력을 전혀 쓰지 않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대규모로

모여 살게 되면서 그들은 잡다한 상황과 호기심과 지루함의 혼합물에 유도되어

자신들의 에너지로 할 만한 다른 창조적인 일을 찾아 나섰다.

(pg 306)

농경 공동체에서는 사람들이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집중했으나,

도시와 소도시에서는 상이한 필요와 욕망들이 사람들의 야심을 부추겨

그들이 일하는 방식과 이유를 만들어가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pg 317)

재밌게도 우리 인류는 이미 동물로서의 필요를 충분히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생산력을 보유했지만 노동 시간을 줄이지는 못하고 있다.

실제로 인간이 적은 노동 시간을 원하는지도 이 책에 의하면 의심해 봄직하다.

개인적으로 이해는 안가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주 52시간 근무제 폐지에 상당수의 노동계층이 동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래의 사례가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1950년대까지는 켈로그의 공장에서 주당 30시간 노동이 정규로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켈로그 공장 직원의 4분의 3이 8시간 근무와 주당 40시간 노동으로 돌아가는

편을 선호하는 쪽으로 표를 던져 경영진을 놀라게 했다. - 중략 -

그들은 미국의 전후 유복한 시기에 시장에 나오는 끊임없이 수준이 높아지며 끝없이

등장하는 소비재를 구매하기 위해 더 긴 시간 일하여 더 많은 봉급을 받고 싶어한 것이다.

(pg 362)

저자에 따르면 이런 현상이 등장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느끼는 '필요'라는 것이 이미 생물로서의 기본 욕구를 한참 뛰어넘은 것이며 여기에는 한계가 없어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

인간이 도시에 모여 살기 시작한 이후 언제나 그들의 야심은 자급농부들이 느끼는

결핍감과는 다른 종류의 결핍감,절대적 필수품보다는 열망, 질투,

욕망의 언어로 발언된 형태의 결핍감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종류의 상대적 결핍감은 더 오래 일하고,

사회적 사다리를 더 높이 올라가고 동료 이웃들을 따라잡게 만드는 박차 역할을 한다.

(pg 320)

이는 최근에 읽었던 '가짜 노동'이라는 책에서도 지적되었던 것인데, 이 책에서도 비슷한 논지가 등장해 반가웠다.

이 책에서도 '가짜 노동'에서 지적한 '불쉿 직업(bullshit jobs)'을 소개하고는 있지만 기본 논지는 잉여 에너지 발생이 일과 노동 시간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것 정도로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읽은 후 최근 노동 시장에서 노동시간 감소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진짜 이유를 탐색하고 싶다면 '가짜 노동'이라는 책을 추천한다.)

어찌 됐든 인류의 진보는 사회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정치 체계만 봐도 왕이 명령하면 그저 따르기만 했던 것에서 지금은 기초 자치단체부터 대표성을 갖는 대리인을 선출해 운영하고 있다.

예전의 왕정과 비교하면 얼마나 많은 행정 인력이 추가로 필요해졌을지(왕이 죽기 전까지 종신 집권을 할 때 민주정에서는 4-5년에 한 번씩 전국적인 선거를 치러야 한다.) 상상해 보면 저자의 주장이 이해가 될 것이다.

건축물의 구조가 복잡할수록 그것을 짓고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더 많아져야

한다는 엔트로피의 영원한 명령은 인간의 신체에든 사회에든 똑같이 적용된다.

곡식밭을 빵덩이로 변형시키는 데 에너지가 드는 것과 똑같이 진흙을 벽돌로,

벽돌을 건물로 변형시키는 데도 일이 투입된다.

그에 따라 특정 시간대에 특정 사회가 띠는 복잡성 정도는 그들이 획득한 에너지 분량을

측정하는 유용한 척도가 되며, 이 정도의 복잡성을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작업 분량(문자 그대로 물리적인 의미의)의 척도이기도 하다.

(pg 233)

430페이지 정도로 살짝 두꺼운 데다 주제도 쉬운 주제는 아니어서 읽기에 아주 편한 책은 아니다.

하지만 사례가 정말 많이 등장하고 중간중간 그림 자료도 제법 실려있어서 지루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아쉬웠던 부분을 하나 꼽으라면 요즘 책답지 않게 오타가 너무 많고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더러 있다는 것이다.

물론 원문 자체의 호흡이 다소 길고 어렵게 쓰였을 것이라 생각은 하지만 번역된 글을 국어 사용자 입장에서 좀 더 세심하게 검수해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책이 잘 팔려서 부디 다음 판본에서는 오타나 비문이 대폭 수정되기를 바란다.

좋든 싫든 인류의 삶에서 일이라는 것을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일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은 곧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과 같다.

그런 측면에서 한 권으로 인류의 발전사를 훑어보기에 아주 좋은 책이다.

대중적인 접근성이 얼마나 좋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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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쟁이 사과만 신나는 파티 제제의 그림책
휴 루이스-존스 지음, 벤 샌더스 그림, 김경희 옮김 / 제제의숲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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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 할머니와 함께 등장했던 심술쟁이 사과가 이번에는 파티 이야기로 다시 돌아왔다.

지난 작품에서도 기존의 유아용 동화답지 않게 획일화된 모습을 단호하게 거부하던 심술쟁이 사과가 이번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었다.



사실 지난 작품 같은 경우에는 어른들 눈으로는 살짝 당혹스럽기까지 한 내용이었다.

어른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 생각하는 (나 같은)동양의 선비가 보기에는 더욱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이가 너무 좋아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부모가 읽어주고 싶은 책 말고 아이가 읽고 싶어 하는 책은 뭔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다.

그랬기에 이번 책도 분명히 좋아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역시나 퇴근 후 책을 보여주자마자 그때까지 하고 있던 게임까지 뒷전으로 한 채 책부터 읽어본다.



이번 책은 잔소리 할머니의 생일잔치에 초대받은 심술쟁이 사과의 이야기다.

역시 심술쟁이 사과는 파티를 엉망으로 만들기 위해 다른 친구들을 골탕 먹이는 등 장난에 몰두한다.

아이는 그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깔깔거리며 웃기 바쁘다.

아이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눈은 가렸지만 노출된 잇몸의 면적으로 얼마나 즐거워하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다행히(?) 지난 작품보다는 덜 당황스럽게 끝났다.

그래도 할머니에게 말이라도 공손히 하라는 메시지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원문이 영어였을 테니 말 끝에 'please'를 붙여라 정도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이가 책을 좋아하지 않으면 책을 들고만 있어도 좋겠다 싶고, 아이가 책을 좀 본다 싶으면 조금 더 수준 있는 책을 봤으면 좋겠고, 아이가 책을 좋아한다 싶으면 내용도 좋은 책을 봤으면 싶은 것이 부모의 욕심일 것이다.

모든 아이가 책을 좋아할 수는 없듯이 모든 책이 재미와 교훈, 감동 등 많은 조건을 충족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책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라면, 그래서 아이가 '읽고 싶어' 하는 책을 고민하는 부모라면 이 책이 상당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조언하고 싶다.

책 읽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책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고 그러려면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자주 접하게 해줘야 한다.

이 책은 단언컨대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이 될 것이다.

이전 작품 서평: https://blog.naver.com/qhrgkrtnsgud/22270099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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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7 미키7
에드워드 애슈턴 지음, 배지혜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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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SF 장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최근 한국의 위상이 급격히 높아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봉준호 감독이 내년에 이 작품을 모티브로 영화를 만든다는 소개에 끌려 접하게 된 책이다.

소설은 SF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배경 위에서 시작된다.

인류의 생존지를 확장하기 위해 적합해 보이는 행성들에 파견되어 테라포밍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인공 미키는 그중에서도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기 위한 '익스펜더블'이다.

단어의 뜻이 의미하듯 그는 일회용품처럼 소모되는 인원으로 죽고 나면 죽기 전까지의 기억이 인쇄된 새로운 몸으로 다음 임무에 투입된다.

'미키7'이라는 의미는 그전까지 총 여섯 번의 미키가 죽었다는 의미가 된다.

뜻하지 않게 미키7이 죽지 않은 채로 미키8이 깨어나게 되면서 스토리는 시작된다.

당연하게도 그의 삶이 '불멸'이냐 아니냐가 작품의 주요한 질문이 된다.

'테세우스의 배' 비유 역시 꽤나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의 삶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있어 옮겨본다.

(pg 19)

탐사대의 상당수가 죽어버리는 등의 극한 상황이 아니라면 복제인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키7이 미키8과 같이 존재한다는 것을 숨겨보려 노력하는 과정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라 보면 된다.

복제인간이라는 소재 자체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 쓰임을 일회용품으로 설정한 부분이 참신하다.

작품 속 사회에서도 이를 윤리적으로 바람직하게 보고 있지만은 않아서 미키를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의 이중적인 태도(꺼림칙하지만 불쌍하게도 생각하는)나 다음 익스펜더블을 생산하는 시기와 방법 등 복제인간이 무분별하게 쓰이는 것을 막고 있는 세세한 설정도 좋았다.

하지만 소설의 전개 자체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스토리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작품 속 딜레마가 이제는 조금 식상한 '테세우스의 배'에 그치고 있다는 점도 다소 아쉬웠다.

"나는 미드가르드 시절의 미키 반스를 기억하고 그 미키 반스가 자란 집도 기억해.

그의 첫 키스도, 그가 마지막으로 엄마를 본 날도, 이 망할 탐사에 자원한 것도 기억나.

그 모든 것들을 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인 것처럼 기억이 나.

그렇다고 내가 미키 반스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걸 누가 알겠어?"

(pg 297)

소설에서도 '악역'이 주인공 못지않게 중요한데, 작품 속 악역을 굳이 찾자면 탐사대의 사령관인 마샬 정도가 될 텐데 어찌 됐든 생소한 행성에 도착해 테라포밍을 성공해야 한다는 공동의 목적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의외성을 보여주기가 좀 어려웠던 것 같다.

정리하자면 소재의 참신함이 스토리의 참신함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그래서 다소 평범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읽는 재미 면에서는 충분했다.

마냥 어두울 수 있는 소재지만 너무 어둡지 않게 유머도 잘 섞여있는 편이고 섹슈얼한 부분도 중간중간 끼워 넣어서 읽는 과정이 지루한 작품은 결코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섹슈얼한 부분에서도 생각해 볼 거리가 있는데, 미키처럼 기억을 공유하는 복제인간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살아있는 미키7을 두고 미키8과 잔 여성을 과연 '바람을 피웠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를 미키7이나 미키8이 질투할 수 있는 일인지도 한번 생각해 볼 만한 주제인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이 이를 영화화한다고 하는데 이 역시 '설국열차'처럼 소재만을 차용한 독자적인 스토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원작을 그대로 영화화하는 감독도 아닐뿐더러 작품의 오리지널 스토리 자체가 참신함이 조금 떨어지기 때문에 되려 감독의 손길을 거친 뒤 어떤 매력적인 작품이 나와줄지 기대가 된다.

게다가 미키 역으로 로버트 패틴슨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있어 기대감을 더해준다.

개인적으로는 미키가 그리 진중한 캐릭터는 아니기 때문에 보다 가벼운 느낌을 주는 배우였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워낙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니 기본 이상은 충분히 보여줄 것이라 기대한다.

아직 개봉하려면 시간이 꽤 많이 남았기 때문에 봉준호 감독의 신작을 기다리는 팬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작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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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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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재미'다.

글을 읽으면서 흐름을 따라가는 재미.

그런 면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작품을 만났다.

이미 많이 알려진 작가인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예상컨대 앞으로 꽤 자주 보게 될 것 같다.

소설은 정신적으로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그런대로 사회화가 되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 남자의 시각으로 진행된다.

어느 날 중학교 동창이었지만 안면은 없었던 한 여성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녀가 과거에 아주 유명한 밀실 살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딘가 뒤틀린 구석이 있는 그녀에게 빠져들면서 그는 과거의 그 미궁 같았던 사건을 추적하게 된다.

책의 분류가 추리소설인 만큼 밀실 살인 사건의 진범을 알아가는 것이 책의 핵심이겠지만 사실 진범은 책의 중반쯤이 지날때쯤 대충 예상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인물이 진범이라는 것을 믿고 싶어 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에이..아니겠지..설마..'하는 마음으로 사건의 전말에 한 걸음씩 다가간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무슨 내용이 나올지 궁금해서 책을 쉽게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사실 사건의 전말이나 흐름이 예상 불가능한 것도 아닌데 이 재미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책을 덮고 가장 먼저 든 느낌은 '음울함'이었다.

이 책은 시종일관 음울함이 지배한다.

소설의 화자가 과거에 불행한 기억을 가진 어딘가 음울한 인물이기도 하거니와 그 음울함 자체가 그가 이 사건을 접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네가 그 사건을 궁금해하는 이유를 알려줄까?

그 사건의 깊은 곳에서, 그 수수께끼의 깊은 곳에서, 자네 자신을 보고 있지?

자신 속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부분이 기묘하게도 그 사건에 반응을 하지?

그 사건의 진상에 가까이 다가가면 자신 속의 그 정체 모를 부분도 해명된다는 듯이.

언젠가 자신을 망가지게 할 터인 자네 자신의 핵심을."

(pg 67)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 불행한 기억이 전혀 없는 사람의 삶을 상상할 수가 없긴 하지만 어린 시절 잠깐이라도 불행했던 기억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딘가 한구석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거나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어떤 느낌인지 대충 알 것이다.

그 느낌이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쭉 이어진다.

그런데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하기 때문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그 느낌을 안다면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읽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생은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당연한 얘기죠.

다시 일어 설 수 없는 인생 따위 없어요. 문제는 내게 그럴 마음이 없다는 거예요.

다시 살 수 있느냐 없느냐, 그런 게 아니라."

(pg 81)

책 뒤편에 실린 역자 후기에 작가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너무 감명 깊게 읽어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언급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정작 '인간실격'에서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내가 이 책에서 매력을 느꼈던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은 내 스스로의 답은 이렇다.

'인간실격'에서의 음울함이 끝이 없는 음울함, 즉 스스로의 삶을 끝내지 않는 한 멈출 수 없는 음울함이라고 한다면 이 작품 속 음울함에는 극복에 대한 열의가 숨어 있다.

소설의 화자는 물론이고 밀실 살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여성 역시 자신의 음울함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남은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가 작품 속에서 충분히 느껴진다.

역자 해설에서 이를 '위악'이라는 단어로 설명한 부분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해석보다는 나 자신이 내린 결론이 더 마음에 들어서 이를 남겨두고 싶다.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요소 중 어디 한구석이 망가졌다는 것을 '자각'한 개인은 더 이상 구제불능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는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개인이라 할지라도 구제불능인 타인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 책의 화자와 그가 만난 여성은 서로를 구제해 주었다.

작품은 별다른 에피소드 없이 열린 결말처럼 끝이 났지만 나는 그들이 여생을 다른 사람처럼 충분히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세계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이다.

누가 죽건 누가 살건, 별다를 것 따위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pg 221)

이 작품이 2011년에 있었던 일본의 대지진 사건 이후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인간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거대한 자연재해를 겪은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인간의 어두운 면에 더욱 집중하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인물들은 '현실'을 살고 싶어 했다.

이러나저러나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치유받는다.

밀실 살인사건이라는 추리소설의 겉옷을 입었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찰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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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이 묻힌 곳 일본문학 컬렉션 3
에도가와 란포 외 지음, 안영신 외 옮김 / 작가와비평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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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집은 읽는데 부담이 없어서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거나 관심 있는 주제가 나오면 찾아보는 편인데, 이 책은 화려한 저자 라인업이 돋보였다.

일본의 추리소설이 꽤 유명하고 인기도 많은데 일본 소설 중에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책들이 꽤 된다.

그 상의 주인공인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아직 한 번도 접해보지 않아서 이 책을 통해 읽어보고 싶었다.

그의 작품 외에도 인간실격으로 유명한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까지 실려있다고 해서 기대가 컸다.

다른 세 명의 작가는 이 책으로 처음 접하는 작가들이라 새로운 작가들의 작품까지 만나볼 수 있는 기회였다.

첫 시작은 에도가와 란포의 'D언덕의 살인 사건'과 '심리 테스트'라는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아케치 고고로'라는 명탐정이 등장한다.

이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이 본 책에 실린 두 작품 외에도 꽤 되는 모양이다.

명탐정 코난이나 소년탐정 김전일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 중 '아케치 고고로'에서 따온 이름이 들어있을 정도로 지금까지도 일본 탐정물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작품이라 한다.

1920년대에 나온 작품이어서 지금 읽으면 추리소설로서는 '그냥 평범한데?'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이러한 추리소설 장르의 시작을 열었다는 것이 이 작품의 의의일 것이다.

이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아내 죽이는 법'과 '비밀'이 실려있다.

작가의 작품은 처음 접하는 것이었는데 단편이지만 몰입도가 상당해서 작가의 장편을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아내 죽이는 법'은 특이하게도 두 사람의 대화로 스토리가 진행되는데 짧은 길이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치밀한 전개를 보여주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으로는 '범인'이라는 단편이 실려 있다.

돈 문제로 가족을 죽이게 되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로는 그리 재미있게 읽지 못했던 '인간실격'보다 이 작품이 더 재미있었다.

'추리'나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죄를 짓게 되는 사람의 심리와 범행 후 행적들이 꽤나 현실적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이 외에 사카구치 안고와 나쓰메 소세키라는 작가의 미스터리 단편 소설이 한 작품씩 실려있다.

개인적으로는 미스터리 쪽은 그다지 취향이 아닌지 두 작품 모두 앞에 나온 작품들에 비하면 감흥이 조금 떨어졌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분위기가 굉장히 독특해서 읽는 즐거움은 부족하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벚꽃이 만발한 숲에서'는 일본판 '전설의 고향'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오래된 작품들이 많아서 일본의 초창기 추리, 미스터리 작품들이 어떤 느낌인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온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이 장르의 작품과 작가가 끊임없이 나와주는 모양이다.

300페이지 정도로 얇고 작은 책이지만 여러 작가의 작품이 실려 있어서 읽는 재미는 충분했다.

굳이 장르소설의 팬이 아니더라도 일본 소설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봄직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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