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역사
제임스 수즈먼 지음, 박한선.김병화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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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 사람이 종사할 수 있는 일의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공놀이도 선수들이 하면 일이 되고 남들과 웃고 떠드는데 너무 웃겨서 사람들이 돈을 주면서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면 그것도 일이 된다.

요즘엔 심지어 많이, 복스럽게 먹는 것을 정성스럽게 찍는 것조차도 일이 된다.

이렇게 일의 근원을 유추해 본다고 하면 흔히 수렵 채집 생활부터 시작해 농경, 상업, 수공업 등등 경제 발전사에 맞게 일 역시 변화해왔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즉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활동에서 일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이 논리를 동물 관찰부터 시작해나간다.

생각보다 많은 동물들이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에 주목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작은 새라 할지라도 남는 에너지를 사용하기 위해 인간이 보기에는 무의미해 보이는 활동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인류의 발달사를 통해 살펴본 인간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이를 엔트로피 법칙으로 풀어나간다.

엔트로피는 반드시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인류가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 이상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순간 인류는 그 에너지를 소모하기 위해 새로운 일을 찾아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다.

인류가 수렵채집을 하던 시절에도 불의 사용으로 인해 잉여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시기가 있었다.

불은 인간종의 역사에서 최초의 위대한 에너지 혁명일뿐만 아니라

최초의 위대한 노동 절약 테크놀로지이기도 했다. - 중략 -

우리가 알기에 한 해의 많은 기간 동안 비교적 혹독한 여건에서 살면서

경제활동을 하는 호모 사피엔스 성인들 집단은 보통 매주 15시간 내지 17시간

일하여 본인들 및 생산 활동을 하지 않는 같은 수의 부양가족을 먹여 살린다.

(pg 126-127)

놀랍게도 이렇게 시간이 많아진 결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언어'다.

현재까지 연구된 결과에 따르면 언어는 특정 시점에 굉장히 광범위하게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고 한다.

바로 그 점이 지금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가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의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정 종족에서 먼저 탄생해 외부로 전파되었다면 비슷비슷한 형태로 전수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여하간 저자에 따르면 이 언어의 탄생 시점이 인류가 불을 사용한 시점과 비슷하다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이미 인류는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자유 시간이 생겨도 편안해지지 못하고 뭔가로 마음을 채워야 할 필요가 진화 과정에서

지루함이 주는 부담을 없애줄 능력을 갖춘 자를 선택하라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유능하고, 똑똑하고, 상상력 있고, 음악적, 언어적으로 기민한 자들,

그러니까 언어를 이용하여 이야기하고, 재미있게 해주고, 매혹시키고,

차분하게 안정시키고, 즐겁게 하고, 영감을 고취시키고, 유혹할 수 있는 자들이 선호된다.

(pg 134)

불의 사용 덕분에 고대의 인간 공동체가 혼자서는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

또 재능 있는 이야기꾼이나 샤먼처럼 자신들의 가치를 비물질적 형태로 제공하는 사람들도 먹여 살리기가 쉬워졌다.

(pg 135)

이후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농경 사회로의 전환과 도시의 형성, 산업혁명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까지 인류의 성장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도 핵심은 생산력 확대로 인한 '잉여 에너지의 확대'이다.

산업혁명 초기까지만 해도 생산력의 확대가 인구증가에 상쇄되어 그 효과가 크지 않았지만 산업화가 고도화되면서 잉여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서비스 산업 종사자 비율이 농업 및 제조업 종사자에 비해 월등히 많은 선진국형 경제 체제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사실은 수렵채집인들이 적은 시간만 일해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었던 것에 반해 지금 우리는 주 40시간 이상을 일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시절 인류의 욕구가 매우 소박한 것들이었고 그 욕구를 손쉽게 채워줄 수 있는 자연환경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늘어나는 자유 시간만큼 우리의 욕구도 키워왔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여러 일을 창조하며 진화해왔다는 의미가 된다.

식량 생산에 시간이나 노력을 전혀 쓰지 않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대규모로

모여 살게 되면서 그들은 잡다한 상황과 호기심과 지루함의 혼합물에 유도되어

자신들의 에너지로 할 만한 다른 창조적인 일을 찾아 나섰다.

(pg 306)

농경 공동체에서는 사람들이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집중했으나,

도시와 소도시에서는 상이한 필요와 욕망들이 사람들의 야심을 부추겨

그들이 일하는 방식과 이유를 만들어가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pg 317)

재밌게도 우리 인류는 이미 동물로서의 필요를 충분히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생산력을 보유했지만 노동 시간을 줄이지는 못하고 있다.

실제로 인간이 적은 노동 시간을 원하는지도 이 책에 의하면 의심해 봄직하다.

개인적으로 이해는 안가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주 52시간 근무제 폐지에 상당수의 노동계층이 동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래의 사례가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1950년대까지는 켈로그의 공장에서 주당 30시간 노동이 정규로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켈로그 공장 직원의 4분의 3이 8시간 근무와 주당 40시간 노동으로 돌아가는

편을 선호하는 쪽으로 표를 던져 경영진을 놀라게 했다. - 중략 -

그들은 미국의 전후 유복한 시기에 시장에 나오는 끊임없이 수준이 높아지며 끝없이

등장하는 소비재를 구매하기 위해 더 긴 시간 일하여 더 많은 봉급을 받고 싶어한 것이다.

(pg 362)

저자에 따르면 이런 현상이 등장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느끼는 '필요'라는 것이 이미 생물로서의 기본 욕구를 한참 뛰어넘은 것이며 여기에는 한계가 없어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

인간이 도시에 모여 살기 시작한 이후 언제나 그들의 야심은 자급농부들이 느끼는

결핍감과는 다른 종류의 결핍감,절대적 필수품보다는 열망, 질투,

욕망의 언어로 발언된 형태의 결핍감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종류의 상대적 결핍감은 더 오래 일하고,

사회적 사다리를 더 높이 올라가고 동료 이웃들을 따라잡게 만드는 박차 역할을 한다.

(pg 320)

이는 최근에 읽었던 '가짜 노동'이라는 책에서도 지적되었던 것인데, 이 책에서도 비슷한 논지가 등장해 반가웠다.

이 책에서도 '가짜 노동'에서 지적한 '불쉿 직업(bullshit jobs)'을 소개하고는 있지만 기본 논지는 잉여 에너지 발생이 일과 노동 시간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것 정도로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읽은 후 최근 노동 시장에서 노동시간 감소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진짜 이유를 탐색하고 싶다면 '가짜 노동'이라는 책을 추천한다.)

어찌 됐든 인류의 진보는 사회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정치 체계만 봐도 왕이 명령하면 그저 따르기만 했던 것에서 지금은 기초 자치단체부터 대표성을 갖는 대리인을 선출해 운영하고 있다.

예전의 왕정과 비교하면 얼마나 많은 행정 인력이 추가로 필요해졌을지(왕이 죽기 전까지 종신 집권을 할 때 민주정에서는 4-5년에 한 번씩 전국적인 선거를 치러야 한다.) 상상해 보면 저자의 주장이 이해가 될 것이다.

건축물의 구조가 복잡할수록 그것을 짓고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더 많아져야

한다는 엔트로피의 영원한 명령은 인간의 신체에든 사회에든 똑같이 적용된다.

곡식밭을 빵덩이로 변형시키는 데 에너지가 드는 것과 똑같이 진흙을 벽돌로,

벽돌을 건물로 변형시키는 데도 일이 투입된다.

그에 따라 특정 시간대에 특정 사회가 띠는 복잡성 정도는 그들이 획득한 에너지 분량을

측정하는 유용한 척도가 되며, 이 정도의 복잡성을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작업 분량(문자 그대로 물리적인 의미의)의 척도이기도 하다.

(pg 233)

430페이지 정도로 살짝 두꺼운 데다 주제도 쉬운 주제는 아니어서 읽기에 아주 편한 책은 아니다.

하지만 사례가 정말 많이 등장하고 중간중간 그림 자료도 제법 실려있어서 지루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아쉬웠던 부분을 하나 꼽으라면 요즘 책답지 않게 오타가 너무 많고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더러 있다는 것이다.

물론 원문 자체의 호흡이 다소 길고 어렵게 쓰였을 것이라 생각은 하지만 번역된 글을 국어 사용자 입장에서 좀 더 세심하게 검수해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책이 잘 팔려서 부디 다음 판본에서는 오타나 비문이 대폭 수정되기를 바란다.

좋든 싫든 인류의 삶에서 일이라는 것을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일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은 곧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과 같다.

그런 측면에서 한 권으로 인류의 발전사를 훑어보기에 아주 좋은 책이다.

대중적인 접근성이 얼마나 좋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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