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과 우주론 - 블랙홀 박사가 들려주는 우주학당 강의 노트
박석재 지음 / 동아엠앤비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해 말부터 우주 관련 교양서를 몇 권 읽게 되었는데 순수한 문과의 눈으로 우주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콩나물시루에 물 빠지듯 읽은 후 기억에 얼마 남지는 않아도 계속 읽다 보면 무언가 남는 게 있겠지 싶어 쉬워 보이는 우주 과학 책이 나오면 읽어보려고 시도하는 편이다.

이 책 역시 그런 시도의 연장선에서 읽어보게 되었다.

'블랙홀 박사'라고 불릴 만큼 평생을 블랙홀 연구에 바쳐온 저자가 청소년은 물론 나 같은 문돌이 성인들을 위해 블랙홀의 정체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책이다.

책 표지에 세 명의 할아버지 도사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중간중간 중요한 개념들을 그림으로 보여줄 때 등장해서 이해를 돕는다.

우주 과학 서적에는 흔히 아인슈타인을 닮은 캐릭터가 등장하기 마련인지라 저자가 한국스러운 캐릭터가 나와서 설명하는 것이 과학을 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직접 창조한 캐릭터라 한다.

(요즘 이런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런지 저자가 머리말에서 그림 실력이 부족해 여자 도사는 못 그려 죄송하다고 미리 밝혀두고 있다.)

역시나 우주를 이해하는 초석은 상대성이론인지라 이 책의 시작 역시 상대성이론으로 시작한다.

물론 그 자체로 책 한 권이 부족할 개념이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점만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간다.

2장에 드디어 이 책의 중심 주제인 블랙홀이 등장한다.

블랙홀의 개념 자체는 1910년대에 처음 등장했지만 블랙홀의 압도적인 질량이 비현실적이라 믿은 당시 사람들은 그저 상상의 개념으로 취급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963년에 이르러 수학적으로 블랙홀의 존재가 증명됨에 따라 블랙홀의 연구가 다시금 탄력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서 SF의 필수 개념인 웜홀 이야기를 비롯해 별이 블랙홀이 되기까지 별의 일대기를 별의 크기별로 분류해 알려준다.

중간중간 '코스모스 군도 여행'이라는 가상의 여행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앞서 설명한 개념들을 한 번 더 알려줌으로써 이해를 돕는다.

사실 청소년용으로 나온 책이라 생각해서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안에 내용은 생각보다 쉽진 않았다.

달리 표현하자면 문체는 친절한데 설명이 아주 친절한 편은 아니었다.

적은 분량에 많은 개념을 설명해야 해서 그런지 짧은 설명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들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그려진 그림들이 부족한 텍스트를 꽤 많이 보완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본래 블랙홀을 비롯한 우주 과학의 기본 개념들이 그리 쉬운 것들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18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에 이 정도의 개념을 녹여냈다는 점은 훌륭했다.

이 책을 읽은 후 다른 책들로 시야를 넓혀갈 수 있다면 우주 공부에 재미를 느끼기 위한 초석으로서는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생이 문돌이인지라 과학 지식을 수식 없이 이해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런 책들이 많이 나와줘서 나 같은 사람들도 과학을 조금이나마 가깝게 느낄 수 있지 않나 싶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 - 그 모든 우연이 모여 오늘이 탄생했다.
슈테판 클라인 지음, 유영미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뭔가 연애소설 느낌의 제목이지만 내용은 꽤 알찬 과학 지식을 담고 있는 교양서다.

원제는 독일어로 'Alles Zufall', 우리말로 '우연의 모든 것'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원제가 책의 주제를 더 함축적으로 잘 요약하고 있다.

하지만 원제는 너무 재미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나름 잘 바꾼 제목이라 할 수 있겠다. (이래서 문과들의 활약도 중요하다.)

이 책은 운동방정식을 알면 물체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고전 물리학자들의 시각(즉 세상이 운명적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던)이 현대 양자역학 등 최신 과학 이론들에 힘입어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연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시각으로 변화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 주는 책이다.

원자 수준의 작은 입자를 대상으로 하는 양자역학에서는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측정하는 순간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입자부터가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기본 전제다.

저자는 우리가 태어나는 과정 역시 우연의 산물이라 말한다.

부모 중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하필 그날 관계를 갖지 않았다면, 임신인 줄 모르고 독한 약물을 복용했다면 등등 우리의 탄생과 관련된 부모님들의 오만가지 행동들은 모두 우연의 산물이다.

게다가 우리가 지금의 모습으로 자라나게 된 것 역시 우연의 산물이다.

부모가 바란 우리의 모습과 우리의 현재 모습이 아주 일치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도 전자의 위치와 속도처럼 피드백 효과가 있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시스템에는 변수가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모두 고려한 예측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준다고 믿는 유전적인 요인과 후천적인 요인 모두가 만족할만한 예측을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탄생뿐 아니라 진화라는 긴 관점에서도 생물은 역시 우연을 통해 살아남았다.

구조적으로 더 단순해 보이는 생물이 진화 과정상 훨씬 후대에 발생한 종인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다윈은 자연의 다양성을 우연으로 설명한다.

어떤 생물도, 인간의 어떤 특성도, 계획에 따른 것은 없다.

진화가 무슨 일을 불러왔건 간에 목표도 의도도 없었으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겠다는 야망 같은 것은 더더욱 없었다.

중요한 건 그저 살아남는 것이었다. - 중략 -

어쩌다 우연히 생겨났고, 그것이 필요하거나 크게 장애가 되지 않아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밖에는 별다른 존재 이유를 발견할 수 없는 특징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파란 눈이 더 나을 것도 없고 갈색 눈이나 초록색 눈이 더 나은 것도 아니다.

(pg 118)

물론 종교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의 삶이 다 높으신 어떤 뜻에 따라 계획된 대로 흘러간다고 믿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부분은 과학의 관점에서 논증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논의에서 제외한다.

어떤 이론을 검증하려면 그 이론에서 출발한 예측이 현실과 일치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만약 현실과 맞지 않으면 우리는 그 이론을 폐기하고,

현실과 일치하면 그 이론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더 나은 테스트로 검증한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결정론에서는 이런 테스트가 불가능하다.

제한된 이성을 가진 인간들로서는 그 이론에서 출발한 어떤 예측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pg 57)

어찌 됐든 우연이 우리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라는 것은 여러 과학 이론들로 증명할 수 있겠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어쩌면 온 우주에 우리뿐일지도 모를 지적 생명체로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보다 특별하기를 바란다.

나의 탄생이 그저 우연의 산물이기보다는 특별한 어떤 목적의 결과물이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주변에서 운명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될 일들도 많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책에 등장하는 사례처럼 9.11테러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하필 추락할 비행기에 탑승해 생을 마감한다거나 잃어버린 아들을 자신이 운전하는 택시에서 마주친 사람의 사례처럼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역시 수학적 확률에 따라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우연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뇌가 수많은 무작위 속에서 무엇이든 연관성을 찾으려는 쪽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것을 다양한 예시를 통해 증명한다.

그리고 세상이 우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므로 우리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온전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분 나빠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는 예측할 수 없음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스스로 정할 수도, 예언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내린 많은 결정들은 우연한 것처럼 보인다.

자기 연관성이 초래하는 많은 결과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가 자신을 꿰뚫어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pg 85)

게다가 예측 불가능한 행동이 생존에 유리한 지점들이 반드시 존재했다.

바다에서 가장 처음 육지를 밟은 생물은 그 이전에는 어느 개체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했다는 것이고 이것을 시작으로 현존 인류까지 진화해왔으니 예측 불가능성이 반드시 나쁜 개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예측 불가능한 행동은 경쟁에 유리하고, 협력과 신뢰를 가능하게 한다.

인간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 뇌가 복잡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의도를 숨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자연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놓은 듯하다.

(pg 171)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어차피 우연으로 돌아가는 세상, 막 살면 그만이라는 메시지로 끝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연을 최대한 활용할 수는 있을 것이라 말한다.

한 번에 큰 변화를 주려 하지 말고 단계를 나눠 조금씩 움직인다면 우리 앞에 펼쳐지는 우연의 한계를 나름 한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작은 걸음으로 겸손하게, 하지만 성공적으로 전진하는 것에 그리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최종적이고, 단호한 해결책을 찾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기대는 비현실적이다.

삶을 변화시키려고 하거나 변화시켜야 할 경우 작은 걸음으로 가는 것이 최상의 길이다.

(pg 321)

양자역학뿐 아니라 진화생물학, 행동심리학, 뇌과학 등 다양한 영역에 걸친 풍부한 사례를 통해 우리 세상을 '우연'이 만들어가고 있음을 설명해 주고 있어서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뭔가 잡지식이 굉장히 늘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서술도 친절한 편이고 현학적이거나 이론적인 설명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읽기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무신론자이자 유물론자인지라 개인적으로 저자의 주장이 아주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사례가 워낙 많아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우리 세상이 우연이라는 멋진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된 책이었다.

우연은 우리에게 신중함을 가르쳐준다.

이것이 바로 우연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우연은 현재에 민감하게 만든다.

현재야말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아니던가?

우연에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은 생동감 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pg 3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울이TV 방울이의 하루 상식 레벨업 코믹북 2 방울이TV 방울이의 하루 상식 레벨업 코믹북 2
스튜디오 왓츠비 지음, 방울이TV 원작 / 서울문화사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딸아이가 만화로 된 책은 혼자서도 곧잘 읽어서 만화로 되어 있으면서 내용도 좋은 책은 얼마든지 읽게 해주고 싶은 요즘이다.

지난해 말쯤 1권이 발매된 방울이 시리즈인데 이번에 2권이 나와서 이번에도 아이에게 선물할 수 있게 되었다.

1권을 너무 좋아했던 터라 2권이 왔다는 소식에 퇴근한 애비 얼굴보다 훨씬 반가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루 상식 레벨업'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만큼 어린이가 생활하면서 알아두면 좋을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다.

이번에는 특히 주인공인 방울이가 편의점 아르바이트 체험을 해보는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바코드 찍는 방법, 카드를 긁는 방법 등 아주 기초적인 부분까지 묘사되어 있었다.

덕분에 아이들도 자주 만나게 되는 편의점 언니, 오빠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우리가 편하게 물건을 구입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뒤에서 얼마나 많은 노고가 필요한지를 자세히 알아볼 수 있었다.

미성년자에게는 복권을 판매하지 않는 것이나 술, 담배를 살 때에는 반드시 신분증 검사가 필요하다는 사실 등 어린이들이 구매할 수 없는 물건들에는 무엇이 있는지도 알려주고 있는 부분이 좋았다.

그밖에도 다양한 상식들이 실려 있다.

집사람이나 내가 주말에는 커피를 자주 마시는 편인데, 커피를 많이 마시면 생기는 부작용에 대한 지식도 알려준다.

어른들이 하는 건 다 따라 해보고 싶은 것이 어린이의 마음일 텐데 이 부분을 읽고서 굳이 커피를 입에 대보지 않아도 어른들이 왜 마시지 말라고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난 1권에서는 기상캐스터라는 직업에 대해 자세히 다뤘다면 이번 2권에서는 스튜어디스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방울이가 여자아이여서 여성들이 주로 하는 직업을 먼저 다루는 모양인데, 다음 편에서는 특정 성별이 많이 종사하는 직업군이 아닌 일반적인 직업들도 다뤄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아를 하다 보니 아이들 책도 많이 접하게 되는데 가끔 아이들 책도 만들기 참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부모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이왕이면 내용도 좋고 재미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 둘을 충족하는 책을 만들기란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내용도 좋고, 아이가 몇 번이고 읽는 걸 보면 재미도 있는 모양이라 일단 안심이 된다.

앞으로 시리즈가 더 나올 것 같은데 나올 때마다 아이가 읽고 싶어하지 않을까 싶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 기자의 할 일, 저널리즘 에세이
김성호 지음 / 포르체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직 기자가 쓴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에 대한 에세이다.

그리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안 봐도 비디오'라는 말이 있다.

이 책을 읽기 전 내 느낌이 그랬다.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이야 모르는 바 아니고, 열심히 해봐야 '기레기' 소리나 들어야 하는, 절이 싫어 떠난 중이 어떤 말을 했을지 조금은 뻔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도 담백하지만 솔직해 보이는 제목이 결국 책장을 넘기게 만들었다.

(e북으로 읽었는데 해당 콘텐츠에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아서 발췌문에 페이지를 표기하지 못했다.)

책 내용은 솔직히 예상한 범위를 넘지 않는다.

인쇄 매체는 언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고 클릭 하나에 울고 웃어야 하는 언론사의 현실.

그렇기 때문에 팩트 체크는 사치요, 주어지는 보도자료 적당히 편집해 조회 수 잘 나올 제목이나 궁리하는 기자들의 행태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물가 상승률 정도나 반영되는 최저임금 상승에는 거품을 물고 반대하지만 자신이 얻어먹을 밥값이 줄어들었다며 김영란법을 욕하는 그들을 표현하기에 '기레기'라는 단어만큼 잘 어울리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언론사도 결국은 회사입니다.

당장 먹고살아야 하고, 갈수록 더 잘 먹고 잘 살아야 합니다.

무너지는 수익 모델을 뒤로한 채 고고하게 취재하고 보도하는 건

어려운 데다 바람직한 일도 아닙니다. - 중략 -

클릭 수가 돈이 되는데 자극적인 기사를 마다할 회사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저자는 그런 동료 기자들에게서 느낀 환멸과 자신 역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자괴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인으로서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들을 마치 술 한잔하며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제 몫의 부끄러움을 매일 감당해내는 소수의 기자와 무엇이 부끄러운 건지도 까먹은

다수의 기자가 무참하게 섞여 있는 게 한국 언론의 오늘입니다.

언론인으로서 그가 해낸 성취들 중에는 얼마 전까지도 큰 이슈가 되었던 수술실 CCTV 이슈가 있다.

저자는 수술실에서 발생한 불법 의료 행위들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만나며 집요하게 기사로 이 문제를 공론화했고 그 결과 관련 법령의 입법이라는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최근에 성형외과 CCTV 유출 사건을 빌미로 관련 법령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던데 저자가 이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해진다.)

저자는 특히 저널리즘과 자긍심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래서인지 언론에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에게 귀 기울였던 사례들이 기억에 남는다.

누구나 살다 보면 한 번은 억울한 일을 경험할 수 있지만 언론은 힘없는 자들의 억울함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저자 역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기사를 썼지만 '어른의 사정으로' 기사를 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내가 부자였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처럼 보이지 않았다면

이런 취급을 받지는 않았겠지요?"

세상엔 사소한 억울함이 널려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겪었는데 어디 하소연할 수 없어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습니다.

남이 보기엔 큰 일 아니니 참고 넘어가라 하지만

본인은 억울하여 넘길 수 없는 때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억울함은 억울함을 풀 길 없는 이들에게 집중됩니다.

뿐만 아니라 조직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공익제보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그리고 그런 기사를 작성한 자신에게 어떤 피해가 왔었는지도 굉장히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세상에 정의가 점점 사라진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이유를 이런 사례들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생각합니다. 어째서 누군가는 공익제보를 하는지요.

예견된 위험을 감수하며 모두를 위한 목소리를 기꺼이 내는 이들을요.

그들을 그런 결정으로 이끄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인류애든 정의감이든 그런 거창한 것들이

가장 평범한 인간들에게 깃들어 있는 순간들을 떠올립니다.

기자라서 즐거웠던 많은 일들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는

바로 그런 이들과 만나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언론이 언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상은 최근에 일어난 것도,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조직 자체가 '이윤 추구'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언론 역시 기업의 편, 자본의 편, 힘 있는 자들의 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에게 일반적으로 공유되는 기댓값이 있다.

적어도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책임.

그 책임을 조금만 더 무겁게 느껴주기를 바라는 것이 일반 대중들의 기대일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란 끝내 진실에 닿을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자의 불행도 그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기자는 제가 진실에 닿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끝없이 진실을 좇아야 하는

운명을 가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사를 읽는 독자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

결국 그러한 구조를 만든 것은 우리 사회이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일말의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기사는 독자에게 다가가 비로소 완성됩니다.

기자의 목표는 제가 공들인 기사가 마땅히 읽을 만한 이에게 읽혀

의미 있는 정보가 되는 겁니다.

좋은 기사와 좋은 독자의 만남이지요.

큰 기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은 책인데 생각보다 깊은 울림이 있었다.

물론 언론이 당장에 큰 변화를 보여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자와 같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고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날 것이다.

이름을 걸고 기사를 쓴다는 건 잘못을 감내하는 일입니다.

기사 끄트머리의 작은 오탈자부터 누군가 분명한 피해자가 있을 중대한 잘못에 이르기까지,

모든 잘못이 온전히 제 탓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저자가 감성적인 글도 굉장히 잘 쓴다는 점이다.

언론인 출신이고 지금은 글로 먹고사는 사람이니 당연히 사실을 전달하는 글은 잘 쓰리라 생각했지만 감성적으로도 이렇게 괜찮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문장이 깔끔해 쉽게 읽히면서도 그 안에 울림이 있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문장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인상 깊은 구절도 꽤 많았던 것 같다.

인터넷의 발달이 오히려 진실을 가려버리는 요즘, 기자는 무엇을 써야 하고 우리는 무엇을 읽고 믿어야 할지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곱 살 처음 하기 사전 - 슬기로운 학교생활을 위한
정명숙 지음, 김윤정 그림 / 제제의숲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가 벌써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한 살을 더 먹을 뿐인데 뭔가 학교에 간다고 하면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다.

아이에게 선행으로 지식적인 것들을 더 알려주기보다는 태도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는데 마침 딱 알맞아 보이는 책이 나와서 아이와 함께 읽어보게 되었다.

제목에 대놓고 '일곱 살'이라고 적혀 있으니"나도 일곱 살인데" 하며 아이 눈도 따라 커진다.

만 나이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제목을 개정해야겠구나 싶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책은 딱 내가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내용들로 가득하다.

이제 초등학생이 되실(?) 몸이니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은 스스로 해보자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와 식사, 양치질, 옷 갈아입기 등 등교 전에 해야 하는 일들이 1장에서 먼저 나오고 2장에서는 학교에 가는 도중에 지켜야 할 교통 법규와 버스 탑승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어서 수업 시간에는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지, 각종 학용품들은 어떻게 사용하는지, 쉬는 시간에는 무엇을 하는지 등등 학교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할 것들이 나오고 하교 후 집에서 씻고 숙제하는 것까지 하루 일과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목차만 쭉 읽어봐도 요즘 초등학생이 하루 종일 어떤 일과로 움직이는지 시뮬레이션이 가능할 정도로 알찬 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딱딱하게 설명만 이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일단 모든 챕터의 시작이 수수께끼로 되어 있어서 아이가 먼저 수수께끼의 정답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며 주제로 넘어갈 수 있다.

처음에는 아이와 함께 쭉 훑어보면서 수수께끼만 풀어봐도 아이가 재미있어했다.

그러다가 아이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 나오면 자세히 같이 읽어보면 될 구성이었다.

(pg 46-47)

천둥벌거숭이마냥 뛰어다닐 줄만 아는 것 같은데 어느새 어린이집 왕고가 되어 1년 뒤엔 초등학생이 된다고 생각하니 나름 심경이 복잡하다.

조금 있으면 애비는 뽀뽀도 못하게 하겠구나 싶기도 하고 아기 때는 참 시간 안 가는 것 같았는데 요즘은 금방금방 크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니 사람 마음이라는 게 간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모쪼록 남은 1년을 알차게 보내서 아이가 처음 학교라는 나름 큰 조직에서 잘 적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도 재미있어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부모에게도 이 책이 좋은 지침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