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 - 그 모든 우연이 모여 오늘이 탄생했다.
슈테판 클라인 지음, 유영미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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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연애소설 느낌의 제목이지만 내용은 꽤 알찬 과학 지식을 담고 있는 교양서다.

원제는 독일어로 'Alles Zufall', 우리말로 '우연의 모든 것'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원제가 책의 주제를 더 함축적으로 잘 요약하고 있다.

하지만 원제는 너무 재미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나름 잘 바꾼 제목이라 할 수 있겠다. (이래서 문과들의 활약도 중요하다.)

이 책은 운동방정식을 알면 물체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고전 물리학자들의 시각(즉 세상이 운명적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던)이 현대 양자역학 등 최신 과학 이론들에 힘입어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연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시각으로 변화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 주는 책이다.

원자 수준의 작은 입자를 대상으로 하는 양자역학에서는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측정하는 순간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입자부터가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기본 전제다.

저자는 우리가 태어나는 과정 역시 우연의 산물이라 말한다.

부모 중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하필 그날 관계를 갖지 않았다면, 임신인 줄 모르고 독한 약물을 복용했다면 등등 우리의 탄생과 관련된 부모님들의 오만가지 행동들은 모두 우연의 산물이다.

게다가 우리가 지금의 모습으로 자라나게 된 것 역시 우연의 산물이다.

부모가 바란 우리의 모습과 우리의 현재 모습이 아주 일치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도 전자의 위치와 속도처럼 피드백 효과가 있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시스템에는 변수가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모두 고려한 예측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준다고 믿는 유전적인 요인과 후천적인 요인 모두가 만족할만한 예측을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탄생뿐 아니라 진화라는 긴 관점에서도 생물은 역시 우연을 통해 살아남았다.

구조적으로 더 단순해 보이는 생물이 진화 과정상 훨씬 후대에 발생한 종인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다윈은 자연의 다양성을 우연으로 설명한다.

어떤 생물도, 인간의 어떤 특성도, 계획에 따른 것은 없다.

진화가 무슨 일을 불러왔건 간에 목표도 의도도 없었으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겠다는 야망 같은 것은 더더욱 없었다.

중요한 건 그저 살아남는 것이었다. - 중략 -

어쩌다 우연히 생겨났고, 그것이 필요하거나 크게 장애가 되지 않아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밖에는 별다른 존재 이유를 발견할 수 없는 특징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파란 눈이 더 나을 것도 없고 갈색 눈이나 초록색 눈이 더 나은 것도 아니다.

(pg 118)

물론 종교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의 삶이 다 높으신 어떤 뜻에 따라 계획된 대로 흘러간다고 믿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부분은 과학의 관점에서 논증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논의에서 제외한다.

어떤 이론을 검증하려면 그 이론에서 출발한 예측이 현실과 일치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만약 현실과 맞지 않으면 우리는 그 이론을 폐기하고,

현실과 일치하면 그 이론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더 나은 테스트로 검증한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결정론에서는 이런 테스트가 불가능하다.

제한된 이성을 가진 인간들로서는 그 이론에서 출발한 어떤 예측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pg 57)

어찌 됐든 우연이 우리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라는 것은 여러 과학 이론들로 증명할 수 있겠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어쩌면 온 우주에 우리뿐일지도 모를 지적 생명체로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보다 특별하기를 바란다.

나의 탄생이 그저 우연의 산물이기보다는 특별한 어떤 목적의 결과물이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주변에서 운명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될 일들도 많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책에 등장하는 사례처럼 9.11테러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하필 추락할 비행기에 탑승해 생을 마감한다거나 잃어버린 아들을 자신이 운전하는 택시에서 마주친 사람의 사례처럼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역시 수학적 확률에 따라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우연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뇌가 수많은 무작위 속에서 무엇이든 연관성을 찾으려는 쪽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것을 다양한 예시를 통해 증명한다.

그리고 세상이 우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므로 우리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온전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분 나빠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는 예측할 수 없음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스스로 정할 수도, 예언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내린 많은 결정들은 우연한 것처럼 보인다.

자기 연관성이 초래하는 많은 결과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가 자신을 꿰뚫어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pg 85)

게다가 예측 불가능한 행동이 생존에 유리한 지점들이 반드시 존재했다.

바다에서 가장 처음 육지를 밟은 생물은 그 이전에는 어느 개체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했다는 것이고 이것을 시작으로 현존 인류까지 진화해왔으니 예측 불가능성이 반드시 나쁜 개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예측 불가능한 행동은 경쟁에 유리하고, 협력과 신뢰를 가능하게 한다.

인간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 뇌가 복잡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의도를 숨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자연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놓은 듯하다.

(pg 171)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어차피 우연으로 돌아가는 세상, 막 살면 그만이라는 메시지로 끝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연을 최대한 활용할 수는 있을 것이라 말한다.

한 번에 큰 변화를 주려 하지 말고 단계를 나눠 조금씩 움직인다면 우리 앞에 펼쳐지는 우연의 한계를 나름 한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작은 걸음으로 겸손하게, 하지만 성공적으로 전진하는 것에 그리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최종적이고, 단호한 해결책을 찾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기대는 비현실적이다.

삶을 변화시키려고 하거나 변화시켜야 할 경우 작은 걸음으로 가는 것이 최상의 길이다.

(pg 321)

양자역학뿐 아니라 진화생물학, 행동심리학, 뇌과학 등 다양한 영역에 걸친 풍부한 사례를 통해 우리 세상을 '우연'이 만들어가고 있음을 설명해 주고 있어서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뭔가 잡지식이 굉장히 늘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서술도 친절한 편이고 현학적이거나 이론적인 설명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읽기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무신론자이자 유물론자인지라 개인적으로 저자의 주장이 아주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사례가 워낙 많아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우리 세상이 우연이라는 멋진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된 책이었다.

우연은 우리에게 신중함을 가르쳐준다.

이것이 바로 우연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우연은 현재에 민감하게 만든다.

현재야말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아니던가?

우연에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은 생동감 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pg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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