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 기자의 할 일, 저널리즘 에세이
김성호 지음 / 포르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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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기자가 쓴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에 대한 에세이다.

그리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안 봐도 비디오'라는 말이 있다.

이 책을 읽기 전 내 느낌이 그랬다.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이야 모르는 바 아니고, 열심히 해봐야 '기레기' 소리나 들어야 하는, 절이 싫어 떠난 중이 어떤 말을 했을지 조금은 뻔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도 담백하지만 솔직해 보이는 제목이 결국 책장을 넘기게 만들었다.

(e북으로 읽었는데 해당 콘텐츠에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아서 발췌문에 페이지를 표기하지 못했다.)

책 내용은 솔직히 예상한 범위를 넘지 않는다.

인쇄 매체는 언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고 클릭 하나에 울고 웃어야 하는 언론사의 현실.

그렇기 때문에 팩트 체크는 사치요, 주어지는 보도자료 적당히 편집해 조회 수 잘 나올 제목이나 궁리하는 기자들의 행태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물가 상승률 정도나 반영되는 최저임금 상승에는 거품을 물고 반대하지만 자신이 얻어먹을 밥값이 줄어들었다며 김영란법을 욕하는 그들을 표현하기에 '기레기'라는 단어만큼 잘 어울리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언론사도 결국은 회사입니다.

당장 먹고살아야 하고, 갈수록 더 잘 먹고 잘 살아야 합니다.

무너지는 수익 모델을 뒤로한 채 고고하게 취재하고 보도하는 건

어려운 데다 바람직한 일도 아닙니다. - 중략 -

클릭 수가 돈이 되는데 자극적인 기사를 마다할 회사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저자는 그런 동료 기자들에게서 느낀 환멸과 자신 역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자괴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인으로서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들을 마치 술 한잔하며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제 몫의 부끄러움을 매일 감당해내는 소수의 기자와 무엇이 부끄러운 건지도 까먹은

다수의 기자가 무참하게 섞여 있는 게 한국 언론의 오늘입니다.

언론인으로서 그가 해낸 성취들 중에는 얼마 전까지도 큰 이슈가 되었던 수술실 CCTV 이슈가 있다.

저자는 수술실에서 발생한 불법 의료 행위들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만나며 집요하게 기사로 이 문제를 공론화했고 그 결과 관련 법령의 입법이라는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최근에 성형외과 CCTV 유출 사건을 빌미로 관련 법령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던데 저자가 이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해진다.)

저자는 특히 저널리즘과 자긍심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래서인지 언론에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에게 귀 기울였던 사례들이 기억에 남는다.

누구나 살다 보면 한 번은 억울한 일을 경험할 수 있지만 언론은 힘없는 자들의 억울함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저자 역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기사를 썼지만 '어른의 사정으로' 기사를 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내가 부자였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처럼 보이지 않았다면

이런 취급을 받지는 않았겠지요?"

세상엔 사소한 억울함이 널려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겪었는데 어디 하소연할 수 없어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습니다.

남이 보기엔 큰 일 아니니 참고 넘어가라 하지만

본인은 억울하여 넘길 수 없는 때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억울함은 억울함을 풀 길 없는 이들에게 집중됩니다.

뿐만 아니라 조직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공익제보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그리고 그런 기사를 작성한 자신에게 어떤 피해가 왔었는지도 굉장히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세상에 정의가 점점 사라진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이유를 이런 사례들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생각합니다. 어째서 누군가는 공익제보를 하는지요.

예견된 위험을 감수하며 모두를 위한 목소리를 기꺼이 내는 이들을요.

그들을 그런 결정으로 이끄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인류애든 정의감이든 그런 거창한 것들이

가장 평범한 인간들에게 깃들어 있는 순간들을 떠올립니다.

기자라서 즐거웠던 많은 일들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는

바로 그런 이들과 만나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언론이 언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상은 최근에 일어난 것도,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조직 자체가 '이윤 추구'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언론 역시 기업의 편, 자본의 편, 힘 있는 자들의 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에게 일반적으로 공유되는 기댓값이 있다.

적어도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책임.

그 책임을 조금만 더 무겁게 느껴주기를 바라는 것이 일반 대중들의 기대일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란 끝내 진실에 닿을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자의 불행도 그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기자는 제가 진실에 닿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끝없이 진실을 좇아야 하는

운명을 가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사를 읽는 독자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

결국 그러한 구조를 만든 것은 우리 사회이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일말의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기사는 독자에게 다가가 비로소 완성됩니다.

기자의 목표는 제가 공들인 기사가 마땅히 읽을 만한 이에게 읽혀

의미 있는 정보가 되는 겁니다.

좋은 기사와 좋은 독자의 만남이지요.

큰 기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은 책인데 생각보다 깊은 울림이 있었다.

물론 언론이 당장에 큰 변화를 보여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자와 같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고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날 것이다.

이름을 걸고 기사를 쓴다는 건 잘못을 감내하는 일입니다.

기사 끄트머리의 작은 오탈자부터 누군가 분명한 피해자가 있을 중대한 잘못에 이르기까지,

모든 잘못이 온전히 제 탓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저자가 감성적인 글도 굉장히 잘 쓴다는 점이다.

언론인 출신이고 지금은 글로 먹고사는 사람이니 당연히 사실을 전달하는 글은 잘 쓰리라 생각했지만 감성적으로도 이렇게 괜찮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문장이 깔끔해 쉽게 읽히면서도 그 안에 울림이 있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문장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인상 깊은 구절도 꽤 많았던 것 같다.

인터넷의 발달이 오히려 진실을 가려버리는 요즘, 기자는 무엇을 써야 하고 우리는 무엇을 읽고 믿어야 할지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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