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의 가격 - 원자재 시장은 어떻게 우리의 세계를 흔들었는가
루퍼트 러셀 지음, 윤종은 옮김 / 책세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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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Price wars', 즉 가격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이다.

여기에서의 전쟁이란 기업들이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벌이는 경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전장을 의미한다.

저자는 원자재 가격이 치솟을 경우 중동, 아프리카, 남미 등 경제적으로 취약한 곳에서 실제 분쟁이나 내전,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 이들 지역을 직접 돌아다니며 이 책을 썼다.

저자는 원자재 가격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수요와 공급' 측면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원자재를 대상으로 한 선물 투기 등 금융 파생상품이 원자재 가격 상승에 미치는 영향이 크며 이 대가가 고스란히 원자재 생산국에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모술을 폐허로 만든 파괴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매매된 파생상품의

마법이 나비 효과를 일으킨 결과다.

워런 버핏이 '금융의 대량살상무기'라 칭한 파생상품은 말 그대로

포탄과 박격포, 미사일과 수류탄으로 바뀌었다.

(pg 117)

책에서 주목하는 원자재는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 그리고 곡물 등의 식량이다.

세 가지 모두 의식주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 가격 변동이 사람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품목들이다.

저자는 이러한 원자재 가격의 급격한 변동이 아랍의 봄과 이라크 내전, 브렉시트, 최근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원자재 수급의 변동 폭이 커질 경우 발생하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출발한 선물 투자는 점차 원자재 생산자와는 전혀 관계없이 숫자를 놓고 돈놀이를 하는 거대한 도박장이 되었다.

저자는 이 시장에서 생산되는 가치는 제로인 반면 부는 굉장히 신속하면서도 불균등하게(원자재 생산 국가에서 금융 선진 국가로) 이전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로 인한 피해는 원자재 생산국의 평범한 국민들이 생활고라는 형태로 견뎌내야 한다.

시장의 혼돈이 현실의 혼돈을 낳고, 이것이 다시 시장의 혼돈을 키우면서

현실과 시장 사이에 놀라운 되먹임 고리가 만들어졌다.

언론, 알고리즘, 자원의 저주 등 혼돈을 증폭하는 여러 장치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가격이다. 가격은 다른 모든 장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pg 133)

이들 지역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알샤바브나 IS 등의 무장 단체들에 끊임없이 새로운 인력이 충원되는 것도 생활고에서 출발한다.

굶어 죽으나 총에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이니 힘으로 빼앗는 쪽에 서다 죽겠다는 판단이 들면 이들 조직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온갖 음모와 선전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도 지울 수 없는 명백한 진실이 있다.

바로 돈이다.

(pg 199)

원자재 가격이 폭등해 해당 원자재 생산국이 비약적인 수익을 얻을 경우에도 문제는 발생한다.

해당 지역의 정치적 기반이 워낙 불안정하다 보니 갑자기 돈이 생기면 우선 군대부터 증강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자재 가격이 급변할 경우 원자재의 보유 자체가 하나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겠다고 마음먹은 데에는 러시아가 가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의 중요성을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가격 전쟁은 국가가 제 앞가림도 못할 만큼 약하거나

이웃 나라에 싸움을 걸 만큼 강해질 때처럼 양극단의 상황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가격 전쟁이 발발한 배경에는 금융 투기가 있었다.

(pg 207)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원자재의 가격 변화가 사람들을 직접 죽인 것은 아니니 해당 국가들의 분쟁이나 전쟁에 직접 뛰어들어 살상을 일삼은 자들이 비난받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 못지않게 책임이 있는 거대 헤지펀드들은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 저자는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손에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피가 묻어 있다.

헤지펀드들은 각지의 식량 가격을 끌어올려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알샤바브는 소말리아의 식량 가격이 오르자 사람들이 궁핍해진 상황을 기회로 삼아

더욱 잔혹한 일을 벌였다.

그러나 헤지펀드와 알샤바브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알샤바브는 민간인의 식량과 생필품을 빼앗는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전 세계의 비난을 받았다.

반면 가격 급등을 유발한 금융 투기자들은 아무런 질책이나 비난을 받지 않았으며,

누구도 그들에게 정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pg 313)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현상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시장에 아무런 규제도 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신자유주의의 이름은 찬란히 빛나고 있고 자본은 국경도 규제도 없이 그저 스스로의 몸집을 불리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정치인과 중앙은행들은 금융 카지노의 중심에 있는 룰렛이

쉬지 않고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 중략 -

그들은 사람들을 실업과 압류, 부채의 늪에 빠뜨려 더 빈곤하게 만들고 가난한 나라들을

파산과 붕괴, 혁명과 전쟁 상태로 몰아가는 방식으로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인플레이션의 대가는 이번에도 힘없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pg 409)

선물이나 옵션이라는 금융 개념 자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이 발생하는 나비효과를 모두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데, 저자는 최대한 전문 용어 없이 자신이 직접 전장을 찾아다니며 오감으로 체험한 경험을 알기 쉽게 전달함으로써 이 나비효과를 우리도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문장에 현학적인 느낌이 거의 없기 때문에 400페이지가 조금 넘어 살짝 두꺼운 느낌을 주는 책이지만 어려움 없이 술술 읽혔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금융의 칼이 실제 인간의 삶을 도륙할 수 있다는 점을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 시장은 오로지 숫자로 표현되는 가상의 재산(실제 화폐조차도 아닌)을 다룰 뿐이지만 그 시장이 가져온 고통은 같은 인간의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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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어스 - 기만의 시대, 허위사실과 표현의 자유 Philos 시리즈 17
캐스 선스타인 지음, 김도원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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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지'라는 책으로 국내에도 유명한 캐스 선스타인이 이번에는 가짜 뉴스에 대한 책을 냈다.

국내에서도 정치나 연예면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가짜 뉴스 논란이 뜨거운 상태라 저자가 어떤 논조를 펼쳐 냈을지 궁금했다.

몇 년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방송인 타일러가 미국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 다른 외국인들과 토론을 했던 내용이 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닌다.

이 방송에서 타일러는 미국이 추구하는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가치이기 때문에 가짜 뉴스나 비방, 심지어는 혐오 표현이라 하더라도 이를 법으로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쳐 화제가 됐었다.

(이 책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궁금한 사람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https://www.youtube.com/watch?v=Wy7LcYrxFgE)

타일러가 미국인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개인은 아니지만 적어도 미국인들의 보편적인 자유관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의 이면에는 아래와 같은 전제가 깔려 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정부가 허위사실을 처벌하거나 차단하려고 할 때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는 허위사실이 아니라 반대 세력이었다.

(pg 105)

저자는 미국인들의 이러한 신념의 근간이 된 몇몇 사건들의 연방 대법원 판례들을 소개하며 현재 미국이 이러한 신념을 가지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그러면서 해당 판례들이 벌써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가짜 뉴스를 비롯한 허위사실의 유포를 지금처럼 계속 방관해도 되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사건' 판결이 내려진 때가

1964년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 중략 -

오늘날 명예를 훼손하는, 아니면 파괴적인 발언을 유포하는 것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훨씬 쉽다. - 중략 -

기술의 변화를 생각할 때, 그 판결이 오늘날의 적절한 가치를 조화시킨

최선의 방식을 담고 있다면 오히려 기적일 것이다.

(pg 170)

물론 논지를 전개하기 전에 '허위 사실'이라고 하는 것의 정의부터 꼼꼼하게 고찰한다.

우리가 인사치레로 하는 하얀 거짓말도 넓은 의미에서는 허위 사실이지만 이를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규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해당 허위 사실에 고의성이 있는지(당사자의 의식 상태), 해당 허위 사실로 인한 해악의 크기와 발생 가능성, 발생 시기 등 허위 사실의 규제를 위해 고려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지점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각 국가마다, 문화마다 모든 허위 사실을 규제하는 것과 허위 사실을 전혀 규제하지 않는 것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게 되는데 미국 사회는 현재 규제하지 않는 쪽으로 너무 치우쳐 있다는 것에 저자는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 제기의 근원은 역시나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허위 사실이 전파되는 속도와 범위가 갈수록 더 커지고 있다는 데 있다.

또한 해당 정보가 거짓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반복된 거짓 정보는 정보 수신인의 의사결정에 여러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많은 연구를 통해 증명된 바 있다.

때문에 허위 사실에 대한 규제가 너무 느슨한 것은 표현의 자유는 보장할 수 있지만 오히려 민주주의의 건강성은 저하될 수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책의 중반까지 허위 사실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과 여러 연구 사례들을 공유한 뒤 저자는 아래와 같이 기준점을 하나 제시한다.

허위사실이 심각한 해악을 초래할 위험이 있고, 표현의 자유를 좀 더 보장하면서도

그런 해악을 막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점을 정부가 증명할 수 없다면,

그 허위사실은 헌법적 보호를 받는다.

(pg 125)

영문을 번역한 글이라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하기 다소 어렵지만, 쉽게 말하면 해당 허위사실의 해악이 크고 정부가 규제 외에는 그 해악을 막을 방법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는 건에 한하여 규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 저자의 기준점 역시 국내법에 비하면 매우 소극적인 기준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는 사실을 적시했다 하더라도 명예훼손으로 처벌이 가능하니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는 과도하다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적어도 혐오 발언이나 심각한 타격을 주는 가짜 뉴스를 민형사상으로 처벌할 수는 있으므로 저자의 기준점보다는 허위 사실을 보다 더 폭넓게 규제하는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저자는 해당 기준점을 실제로 적용할 때는 위에서 언급한 의식 상태, 해악의 크기와 발생 가능성, 발생 시기별로 나누어 다양한 규제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또한 정부뿐 아니라 온라인을 주도하고 있는 SNS 플랫폼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규제들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해당 규제에 공지나 알림 표시 등 우리 정서로 볼 때엔 '이게 규제인가?' 싶은 조치들도 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수호해 온 미국의 정서로는 저자가 제시한 매우 소극적인 범위의 조치조차도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법하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아래의 문장으로 단호하게 책을 끝맺고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이 현실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가로막는 데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pg 216)

자유와 책임은 상충되는 가치이기 때문에 어느 선에서 규정하느냐는 나라와 문화, 역사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일 시기에 미국에 떠돌던 헛소리들이 우리나라 웹 커뮤니티들에 소개되면서 선진국이라 믿어왔던 미국의 이면이라는 반응들이 많았지만 실은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 널려 있다.

다만 그 헛소리가 인터넷을 타고 흐를 때 어느 선에서 규제를 받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책은 그 경계선을 어느 지점으로 설정할지를 나름대로 사고해 보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다분히 미국인의 입장에서 쓴 미국 사회의 자유와 책임에 관한 책인지라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의 울림을 줄 수 있을지는 물음표가 남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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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 - 디지털 인프라를 둘러싼 국가, 기업, 환경문제 간의 지정학
기욤 피트롱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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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책 소개를 보고 잠시 멍해졌던 기억이 난다.

환경 문제에 대한 심각성은 이제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만큼 보편적인 상식이 되었고, 그 대안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등 첨단 IT 기술의 발전으로 이루어낸 '그린' 사회라는 것에도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현재의 디지털 기술들이 생각보다 환경 문제를 잘 해결해 주는 방안이 아니라는 것, 심지어는 상당 부분 환경 문제를 심화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책이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도 언제부턴가 페이퍼리스 오피스를 추구하며 종이 사용량을 상당 부분 줄여왔는데, 그러던 어느 날 서버실의 존재와 이를 유지 보수하기 위해 연간 얼마가 필요한지를 알게 되었다.

종이를 데이터가 대체하고 있으므로 그 데이터를 저장하고 관리하기 위해 종이값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비용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종이보다 월등히 사용하기 편리하고 보관도 용이하며 비용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노동력 절감 효과까지 고려해야 하므로 단순히 비용만 놓고 비교할 문제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발생한다는 것에 놀랐다.

일개 대학에서도 이 정도니 매머드급 데이터 기업, 지역사회, 국가로까지 시야를 넓혀보면 데이터 자체를 저장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자원이 투입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이 책에서는 이처럼 IT 기술이 지구에 미치는 악영향을 추적해 고발하고 있다.

특히 해당 기업들이 '그린' 딱지에 민감하고 기술 유출 등의 핑계로 시설 공개를 잘 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의 눈에는 이와 같은 악영향이 잘 눈에 띄지 않아 피해의 누적 정도도 정확하게 집계하기 어렵다고 한다.

전쟁으로 점철된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승자가 얼마나

자기식으로 역사를 다시 쓰려는 집착을 보이는지 학습했다.

21세기의 디지털 기업들은 이러한 기법을 한층 세련되게 가다듬어 아예

미래를 새로 쓸 것을 제안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알고 보면 디지털은 세상을 오염시키니까.

그것도 아주 엄청나게.

특히 물과 에너지 소비량, 광물 자원 고갈에의 기여 등을 고려한다면,

디지털 산업이라는 분야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의

두세 배에 해당하는 생태발자국을 발생시킨다.

(pg 44)

저자는 GAFAM이라 하여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IT 몬스터들의 사례를 주로 언급하지만 데이터에 대한 광적인 수집 경향이 비단 미국의 일만은 아니므로 세계 곳곳에 포진한 보다 작은 규모의 디지털 회사들까지 감안하면 그 피해 규모는 훨씬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악영향을 미칠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전력'이다.

데이터를 유지하기 위한 서버는 항시 일정하게 낮은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서버가 방대하게 모여있는 장소인 데이터 센터에는 엄청난 냉방 장치가 필요하고 이를 위한 전력은 아직까지도 화석연료에 의존해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데이터 센터로 모이는 데이터들은 각 대륙을 연결하는 해저 케이블을 통해 이동하는데 기업들은 새로운 케이블을 매설하는 것에는 열심이지만 노후된 케이블을 재활용하거나 수거할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디지털 기기 생산 과정에 필수적인 '순수한 물' 역시 중요한 자원이다.

게다가 각종 디지털 기기들의 제조에 필요한 희귀 금속류 등 지하자원도 포함된다.

지구 여기저기에 소량씩 분포하는 희소 자원을 채취하기 위한 벌목, 개간 등으로 발생되는 직접적인 환경파괴는 물론이고 이를 세계 곳곳으로 배송하기 위해 소비되는 간접적인 환경파괴까지 모두 고려한다면 엄청난 수준의 공해를 발생시키는 셈이다.

우리 같은 일반 소비자들 역시 이렇게 생산된 스마트폰을, 그것도 인류를 달에 보낸 컴퓨터보다 더 좋은 컴퓨터임에도 불구하고 2년에 한 번씩 갈아치우는 소비 행태를 보여줌으로써 이 현상을 가속화하고 있다.

우리가 보통 인터넷이라고 할 땐 통신망의 모든 것(케이블, 라우터, 와이파이 접속단자 등)은 물론 데이터를 저장함으로써 사물인터넷이 서로 통신 가능하도록 해주는

데이터센터까지 모두 포함된다. - 중략 -

이러한 자원들을 손안에 쏙 들어가는 스마트폰 안에 모두 욱여넣는 일은 이제

너무도 복잡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 작업은 '에너지 먹는 하마' 격이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스마트폰은 제조 과정에서만 이미 제품의 생애 주기 전체가 만들어내는

생태발자국의 절반, 소비 에너지의 80퍼센트를 잡아먹는 원흉이 되었다.

(pg 61)

따라서 우리가 현재 줄이려고 노력하는 탄소 배출량 만으로는 디지털 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MIPS(Material Input Per Service unit)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즉 탄소 외에도 해당 활동이나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투입되는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단순한 물건에서 디지털 기기로 갈수록 MIPS가 높아지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환경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서 탄소 배출량보다 더 효과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한다.

일례로 우리가 화석연료 절감을 위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야심 차게 개발 중인 전기 자동차도 그 속에 포함되는 각종 전자 기기 및 센서들의 제조와 그 기기들이 발생시키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관리하기 위한 시설까지 고려한다면 과연 정말로 적합한 대안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라는 것이다.

서비스나 소비 행위의 MIPS도 측정할 수 있다.

자동차로 1킬로미터 주행, TV 1시간 시청은 각각 1킬로그램과 2킬로그램의 자원을

필요로 하며, 전화 통화 1분엔 200그램의 자원이 필요하다.

한 통의 SMS는 0.632킬로그램이라는 무게가 나간다.

(pg 88)

이 지점에서 책 제목도 이해할 수 있다.

얼핏 우리가 SNS를 탐색하며 '좋아요'를 누를 때에는 아무런 비용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해당 행위에 필요한 각종 디지털 기기들을 생산하는 자원, 그리고 그 행위를 둘러싼 모든 데이터들이 축적될 장소의 건설과 유지 및 보수에 들어가는 자원까지 고려하면 우리의 '좋아요'는 결코 무료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잉 연결된 우리 사회는 실제로 패러다임의 급진적인 전복을 낳는다.

풍요에 중독된 세계에 예정된 위협은

희소성에 의해 통제되는 세계가 겪는 시련보다 훨씬 막강하다.

축적이 결핍보다 훨씬 치명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pg 240)

후반부의 참고 자료 목록을 제외하면 약 300페이지 정도로 그리 두껍지 않은 분량이지만 꽤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책이었다.

읽고 나서 약간의 허탈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여태까지 내가 알고 있던 환경 관련 문제들의 새로운 이면을 알게 되었는데 그 해결책은 전무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DNA 안에는 환경에 대한 염려라는 부분이 들어있지 않다.

환경을 염려했다면 네트워크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존재한다 한들 최소한 현재와 같은 형태로는 아니었을 것이다. 현실은 이보다 훨씬 세속적이다. 인터넷은 권력과 돈을 쟁취하기 위한 새로운 도구이다.

(pg 282)

하지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환경에 무해할 것이라 믿어왔던 디지털 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이 적지 않음을 고발하는 책이다.

기업이 스스로 환경을 고려하지 못한다면 시민사회가, 정부가, 국제기구들이 이 산업 전반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늘려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디지털을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온 메시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현실은 이보다 훨씬 세속적임을, 디지털이 실제로는 우리를 본떠 만들어진

도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합의에 의해서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기술은 더도 덜도 아니고 딱 우리가 하는 만큼만

친환경적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pg 301)

언젠가 읽었던 다른 책에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쓰레기를 생산하는 존재라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난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실제로 쓰레기를 발생시킨다.

그것이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라 하더라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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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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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SF 소설 쪽으로는 손꼽히는 작가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것이라 SF를 좋아하고 더 알아가고 싶어하는 독자로서 기대가 컸다.

보통 기대가 컸는데 작품이 별로면 글을 쓸 때 고민이 많은데 다행히 이 책은 아무런 고민 없이 느낀 바를 솔직히 적으면 될 것 같다.

제목이 독특해서 제목만 보면 SF 소설이라 생각하기 쉽지 않은데, 총 아홉 편이 수록된 단편집이고 그중 하나의 제목일 뿐이다.

특이하게도 언어가 주제가 되는 작품이 두 작품이나 실려 있다.

표제작은 마치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에 나오는 외계인처럼 미래를 경험한 것으로 기술하는 시제(말 그대로 미래과거시제)를 사용하는 미래인에 대한 이야기다.

시제라는 독특한 소재를 시간 여행이라는 SF 단골 소재와 잘 버무려 인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 같다.

하지만 기억에 더 남았던 것은 '차카타파의 열망으로'라는 독특한 제목을 가진 작품이었다.

코로나19가 휩쓸고 간 이후 인류는 'ㅊ,ㅋ,ㅌ,ㅍ' 등 발음할 때 비말을 내뿜을 우려가 있는 파열음을 아예 쓰지 않는 방향으로 언어를 진화시켜 나간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한 배우가 파열음으로 가득한 지금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 도전하게 되고 그를 지켜보는 이가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데 스토리라인 자체는 단순하지만 그 세계관이 너무 재밌고 매력적이었다.

작품의 서술 자체도 모든 파열음이 바뀌어있어서 처음에는 '오타인가?' 싶었는데 읽다 보면 '배경 진짜 치열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감탄이 나왔다.

SF 단골 소재라 할 수 있는 로봇을 다룬 작품으로는 '수요곡선의 수호자'와 '임시 조종사'가 있는데 그중 '임시 조종사'는 단연코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우리나라의 전통 판소리 느낌으로 지어진 SF 소설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어쭙잖게 설명하는 것보단 작품 속 한 구절을 음미해 보면 무슨 의미인지 대번에 이해가 갈 것이다.

아래는 주인공이 로봇에 탑승해 펼치는 게릴라전으로 크게 활약하자 적군이 고민에 빠지는 부분인데, 전통 장단을 잘 모르더라도 판소리하면 떠오르는 그 톤으로 읽어보면 문장에 운율이 잘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리)

적기를 격추하고, 장비 챙겨 황급 하산 동굴에 은신하니,

집산이 위성을 몰아 백 리 반경을 더듬었으되, 보이느니 산이요 관목에 기암뿐이라.

수차에 요격하고 곳곳 은신처 숨어드니, 없는 대공포대에 금쪽같은 전투기가 똑똑 떨어져 집산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생각하되 가히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

(pg 235-236)

로봇과 판소리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가 절묘하게 만나 기가 막힌 작품을 만들어 냈다.

제목이 다소 평범해서(물론 내용을 잘 담아내고 있긴 하지만) 표제작이 되지는 못한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별도의 책으로 나와도 좋겠다 싶을 만큼 재미도 있었고 인상에도 강하게 남았다.

진짜 판소리가 들어간 오디오북으로 나올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아서 먼 미래의 가능성 정도라도 기대해 보고 싶다.

위에서 언급한 작품 외에도 '접히는 신들', '인류의 대변자', '알람이 울리면' 등의 작품에서는 행성 간 여행과 외계인,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장기간 수면 통제 등 익숙한 소재지만 우주와 인류가 보다 더 가까워지면 발생할법한 일들이 빼어난 상상력으로 잘 그려져 있다.

사이보그를 다룬 '절반의 존재' 역시 우리가 흔히 보던 '뇌만 빼고 다 기계'인 사이보그가 아니라 하반신만 원래의 인간이고 상체는 모두 기계인 사람이 등장한다.

과연 그때에도 우리는 그 존재를 인간이라 칭할 수 있을까?

SF 팬들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SF 작품을 볼 때 '재미'를 느끼려면 뛰어난 상상력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이 책에서는 소재 자체는 굉장히 익숙한 것들이지만 소재를 비틀어보는 부분이나 서술 방식의 참신함이 더 돋보였다.

단편집이라 호흡이 그리 길지 않은 작품들로 채워져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정이 튀어 보인다거나 허무맹랑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작품마다 짧게 작가 노트가 수록되어 작가의 의도나 느낌을 공유함으로써 작가와 독자가 같은 세계관을 경험했다는 기분이 들게 해주는 것도 좋았다.

(작가 노트 같은 부분은 다른 작가들도 단편집을 낼 때 꼭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외 여느 작가의 단편집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작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므로 국내 SF에 그다지 신뢰가 없는 (나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책만큼은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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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과 우주론 - 블랙홀 박사가 들려주는 우주학당 강의 노트
박석재 지음 / 동아엠앤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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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부터 우주 관련 교양서를 몇 권 읽게 되었는데 순수한 문과의 눈으로 우주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콩나물시루에 물 빠지듯 읽은 후 기억에 얼마 남지는 않아도 계속 읽다 보면 무언가 남는 게 있겠지 싶어 쉬워 보이는 우주 과학 책이 나오면 읽어보려고 시도하는 편이다.

이 책 역시 그런 시도의 연장선에서 읽어보게 되었다.

'블랙홀 박사'라고 불릴 만큼 평생을 블랙홀 연구에 바쳐온 저자가 청소년은 물론 나 같은 문돌이 성인들을 위해 블랙홀의 정체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책이다.

책 표지에 세 명의 할아버지 도사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중간중간 중요한 개념들을 그림으로 보여줄 때 등장해서 이해를 돕는다.

우주 과학 서적에는 흔히 아인슈타인을 닮은 캐릭터가 등장하기 마련인지라 저자가 한국스러운 캐릭터가 나와서 설명하는 것이 과학을 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직접 창조한 캐릭터라 한다.

(요즘 이런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런지 저자가 머리말에서 그림 실력이 부족해 여자 도사는 못 그려 죄송하다고 미리 밝혀두고 있다.)

역시나 우주를 이해하는 초석은 상대성이론인지라 이 책의 시작 역시 상대성이론으로 시작한다.

물론 그 자체로 책 한 권이 부족할 개념이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점만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간다.

2장에 드디어 이 책의 중심 주제인 블랙홀이 등장한다.

블랙홀의 개념 자체는 1910년대에 처음 등장했지만 블랙홀의 압도적인 질량이 비현실적이라 믿은 당시 사람들은 그저 상상의 개념으로 취급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963년에 이르러 수학적으로 블랙홀의 존재가 증명됨에 따라 블랙홀의 연구가 다시금 탄력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서 SF의 필수 개념인 웜홀 이야기를 비롯해 별이 블랙홀이 되기까지 별의 일대기를 별의 크기별로 분류해 알려준다.

중간중간 '코스모스 군도 여행'이라는 가상의 여행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앞서 설명한 개념들을 한 번 더 알려줌으로써 이해를 돕는다.

사실 청소년용으로 나온 책이라 생각해서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안에 내용은 생각보다 쉽진 않았다.

달리 표현하자면 문체는 친절한데 설명이 아주 친절한 편은 아니었다.

적은 분량에 많은 개념을 설명해야 해서 그런지 짧은 설명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들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그려진 그림들이 부족한 텍스트를 꽤 많이 보완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본래 블랙홀을 비롯한 우주 과학의 기본 개념들이 그리 쉬운 것들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18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에 이 정도의 개념을 녹여냈다는 점은 훌륭했다.

이 책을 읽은 후 다른 책들로 시야를 넓혀갈 수 있다면 우주 공부에 재미를 느끼기 위한 초석으로서는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생이 문돌이인지라 과학 지식을 수식 없이 이해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런 책들이 많이 나와줘서 나 같은 사람들도 과학을 조금이나마 가깝게 느낄 수 있지 않나 싶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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