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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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SF 소설 쪽으로는 손꼽히는 작가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것이라 SF를 좋아하고 더 알아가고 싶어하는 독자로서 기대가 컸다.

보통 기대가 컸는데 작품이 별로면 글을 쓸 때 고민이 많은데 다행히 이 책은 아무런 고민 없이 느낀 바를 솔직히 적으면 될 것 같다.

제목이 독특해서 제목만 보면 SF 소설이라 생각하기 쉽지 않은데, 총 아홉 편이 수록된 단편집이고 그중 하나의 제목일 뿐이다.

특이하게도 언어가 주제가 되는 작품이 두 작품이나 실려 있다.

표제작은 마치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에 나오는 외계인처럼 미래를 경험한 것으로 기술하는 시제(말 그대로 미래과거시제)를 사용하는 미래인에 대한 이야기다.

시제라는 독특한 소재를 시간 여행이라는 SF 단골 소재와 잘 버무려 인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 같다.

하지만 기억에 더 남았던 것은 '차카타파의 열망으로'라는 독특한 제목을 가진 작품이었다.

코로나19가 휩쓸고 간 이후 인류는 'ㅊ,ㅋ,ㅌ,ㅍ' 등 발음할 때 비말을 내뿜을 우려가 있는 파열음을 아예 쓰지 않는 방향으로 언어를 진화시켜 나간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한 배우가 파열음으로 가득한 지금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 도전하게 되고 그를 지켜보는 이가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데 스토리라인 자체는 단순하지만 그 세계관이 너무 재밌고 매력적이었다.

작품의 서술 자체도 모든 파열음이 바뀌어있어서 처음에는 '오타인가?' 싶었는데 읽다 보면 '배경 진짜 치열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감탄이 나왔다.

SF 단골 소재라 할 수 있는 로봇을 다룬 작품으로는 '수요곡선의 수호자'와 '임시 조종사'가 있는데 그중 '임시 조종사'는 단연코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우리나라의 전통 판소리 느낌으로 지어진 SF 소설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어쭙잖게 설명하는 것보단 작품 속 한 구절을 음미해 보면 무슨 의미인지 대번에 이해가 갈 것이다.

아래는 주인공이 로봇에 탑승해 펼치는 게릴라전으로 크게 활약하자 적군이 고민에 빠지는 부분인데, 전통 장단을 잘 모르더라도 판소리하면 떠오르는 그 톤으로 읽어보면 문장에 운율이 잘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리)

적기를 격추하고, 장비 챙겨 황급 하산 동굴에 은신하니,

집산이 위성을 몰아 백 리 반경을 더듬었으되, 보이느니 산이요 관목에 기암뿐이라.

수차에 요격하고 곳곳 은신처 숨어드니, 없는 대공포대에 금쪽같은 전투기가 똑똑 떨어져 집산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생각하되 가히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

(pg 235-236)

로봇과 판소리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가 절묘하게 만나 기가 막힌 작품을 만들어 냈다.

제목이 다소 평범해서(물론 내용을 잘 담아내고 있긴 하지만) 표제작이 되지는 못한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별도의 책으로 나와도 좋겠다 싶을 만큼 재미도 있었고 인상에도 강하게 남았다.

진짜 판소리가 들어간 오디오북으로 나올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아서 먼 미래의 가능성 정도라도 기대해 보고 싶다.

위에서 언급한 작품 외에도 '접히는 신들', '인류의 대변자', '알람이 울리면' 등의 작품에서는 행성 간 여행과 외계인,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장기간 수면 통제 등 익숙한 소재지만 우주와 인류가 보다 더 가까워지면 발생할법한 일들이 빼어난 상상력으로 잘 그려져 있다.

사이보그를 다룬 '절반의 존재' 역시 우리가 흔히 보던 '뇌만 빼고 다 기계'인 사이보그가 아니라 하반신만 원래의 인간이고 상체는 모두 기계인 사람이 등장한다.

과연 그때에도 우리는 그 존재를 인간이라 칭할 수 있을까?

SF 팬들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SF 작품을 볼 때 '재미'를 느끼려면 뛰어난 상상력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이 책에서는 소재 자체는 굉장히 익숙한 것들이지만 소재를 비틀어보는 부분이나 서술 방식의 참신함이 더 돋보였다.

단편집이라 호흡이 그리 길지 않은 작품들로 채워져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정이 튀어 보인다거나 허무맹랑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작품마다 짧게 작가 노트가 수록되어 작가의 의도나 느낌을 공유함으로써 작가와 독자가 같은 세계관을 경험했다는 기분이 들게 해주는 것도 좋았다.

(작가 노트 같은 부분은 다른 작가들도 단편집을 낼 때 꼭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외 여느 작가의 단편집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작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므로 국내 SF에 그다지 신뢰가 없는 (나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책만큼은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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