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최진혁 사진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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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소양이 일천한지라 솔직히 소설을 읽을 때 문장의 아름다움보다는 이야기의 재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서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네 번째 읽는 한강의 작품.

이번에는 깔끔하기 그지없는 제목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집사람이 책 제목을 보더니 '하얀색이라는 뜻이야?'라고 물었었다.

책을 다 읽은 후여서 '미묘하게 달라'라고 대답했더니 뭐가 다르냐 묻길래 작가가 한 말을 보여줬다.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pg 186, 작가의 말 中)

명료하게 대답하긴 어렵지만 작가가 의도한 뉘앙스가 뭐였는지는 제법 알 것 같다.

이 작품은 제목처럼 '흰' 색을 가진 것들의 목록을 쭉 나열한 뒤 각 단어들에 작가의 인생과 상념을 한 조각씩 투영한 작품이다.

활로 철현을 켜면 슬프거나 기이하거나 새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들이건 흘러 나올 것이다.

그 문장들 사이에 흰 거즈를 덮고 숨어도 괜찮은 걸까.

(pg 10)

편집도 그렇고 글의 양도 그렇고 소설이 아니라 시집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각각의 제목 아래 길어야 두 페이지 정도의 글이 실려있는데, 길이가 짧기 때문에 딱히 서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작가에게 생후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은 채 죽은 언니가 있었다는 것과 작가가 바르샤바를 여행하면서 지난 역사 속에서 벌어진 죽음에 대한 생각과 살아남은 사람들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는 흔적 정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딱히 줄거리가 없어서 그런지 문장에 더 집중하며 읽게 되었던 것 같다.

책 후미에 본문보다 더 어려운 해설이 있지만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그다지 도움이 된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작가의 풍부한 감성을 굉장히 절제된 손길로 다듬은 문장들을 읽는 것,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언니와 바르샤바에서 벌어진 대학살로 죽어간 사람들의 죽음들과 이를 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아무리 시간이 약이라지만 보통 몸이 아프면 시간도 더디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작가는 아플 때 더디 가는 시간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 몸이 아플 때 특히 그렇다.

열네 살 무렵 시작된 편두통은 예고 없이 위경련과 함께 찾아와 일상을 정지시킨다.

해오던 일을 모두 멈추고 통증을 견디는 동안,

한 방울씩 떨어져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들 같다.

손끝이 스치면 피가 흐를 것 같다.

숨을 들이쉬며 한순간씩 더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pg 11)

그 밖에도 상당히 마음에 와닿는 문장들이 많다.

세상에 태어나 죽지만 말아 달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 말고는 들어본 적 없이 사라진 언니를 생각하며 썼기 때문일까, 모국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단어에 걸맞은 한국어의 맛과 뉘앙스를 잘 살린 표현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소싯적 번역일로 잠시 먹고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의 구절들은 나라면 도저히 영어로 옮기지 못할 것 같은, 다른 언어라면 다른 의미가 되어 버릴 것 같은 문장들이다.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라는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pg 59)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며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pg 78)

글 양도 적고 분량도 본문만은 130페이지 정도라서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문장이 짧은 만큼 문장 사이사이에 의미를 많이 집어넣은 느낌이라 곱씹으며 읽기에 좋을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읽으면서 몰아치는 감정이 너무 과하지 않아서 좋았고, 읽고 나서도 한동안 그 잔상에 시달리지 않아서 좋았다.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읽은 작품 중에서는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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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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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나오는 표현을 빌자면 나 역시 '운명적 문과'로 분류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 역시 '운명적 문과'로 꽤 오랜 시간을 살아오다가 우연히 과학 서적들을 읽게 됐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인생관이 바뀌게 되었다며 자신이 과학 공부를 하며 알게 된 점을 '운명적 문과'들과 나누고 싶어 본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평소 저자를 좋아하기도 하고 과학 교양서도 꽤 거부감 없이 읽는 편인지라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궁금했다.

저자는 왜 문과들이 과학을 공부해야 하는지부터 설명한다.

인문학(저자는 이 개념을 사회과학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과 과학은 연구의 근본이 되는 질문부터가 다른데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문학이 과학 이론들에 익숙하다면 인문학도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물론 '통섭'이니 '융합'이니 학제간 연구 교류가 중요하다는 말은 예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대학에서 녹을 먹는 사람으로서 통섭과 융합이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저자는 파인만이 한탄하며 지적했던 '거만한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과학 공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 인생에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어떤 의미로 내 삶을 채울까?'

이것이 과학적으로 옳은 질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런 것을 연구하지 않는다.

질문은 과학적으로 하되 답을 찾으려면 인문학을 소환해야 한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pg 127)

이어 뇌과학에서 출발해 생물학, 화학, 물리학, 수학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공부한 지식들을 소개하고 이런 지식들이 문과의 입장에서 어떤 의미를 주는지 역설하고 있다.

읽을 때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후미에 보면 저자가 목차에도 상당한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자신을 궁금해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 인문학이라면 그 자신을 궁금하게 여기는 주체가 담긴 뇌에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뇌과학을 읽다 보면 자연히 생물학으로 연결되고 생물의 탄생 과정을 알려면 화학을 설명해야 하며 화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물리학이, 물리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수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되도록이면 저자가 의도한 순서대로 책을 읽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모든 종에게 유전자는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성장하라. 짝을 찾아라. 자식을 낳아 길러라. 그리고 죽어라.

너의 사멸은 나의 영생이다. 너의 삶에는 다른 어떤 목적이나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목적을 추구한다. - 중략 -

그런 점에서 나는 호모 사피엔스를 '진화가 만든 기적'으로 본다.

내가 기적의 산물임을 뿌듯한 기분으로 받아들인다.

(pg 128)

나름 과학 교양서들을 좀 읽었던지라 지식적인 측면에서 전혀 몰랐던 무엇을 알게 되는 부분은 적었다.

하지만 전에 읽어서 기억에 대강 남아 있던 개념들을 다시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다.

인문학적 시각에서 과학 지식들을 안내하는 접근법도 꽤 마음에 들었다.

이전에 읽은 김상욱 교수의 '떨림과 울림' 같은 책과도 느낌이 비슷해서 그 책을 재미나게 읽은 사람이라면 이 책도 재미있게 읽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본 책이 김상욱 교수의 저작과 비교된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할 것이다.)

약간의 아쉬움이라면 정보 전달의 비중을 좀 낮추고 저자가 이 정보를 알게 됨에 따라 어떤 인문학적 견해나 깨달음이 생겼는지를 설명하는 비중이 조금 높아졌으면 더 좋았겠다 싶다.

'운명적 문과'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매우 친절하게 쓴 책이므로 내용이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아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아무리 '운명적 문과'로 태어났어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다른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의 저서로 눈이 돌아가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영구기관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이러한 저엔트로피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화와 죽음이 필연이라는 말이다.

나는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며 내가 한 모든 말과 행위가

완전히 잊힐 것임을 받아들인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고

마지막 시간까지 내 인생을 내 생각대로 밀어 갈 작정이다.

(pg 25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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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 필립 K. 딕 걸작선 5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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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소개된 그의 모든 작품을 읽는 것이 목표인 필립 K. 딕의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무한 채로 읽었는데 읽으면서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책 후미의 역자 후기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영화 '매트릭스'의 바탕이 된 작품이 맞다고 한다.

작품의 배경은 태양계 몇몇 행성에 식민지가 건설된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지구는 온난화가 심해져 밖에서 태양에 노출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체내의 수분을 빼앗겨 사망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고 넘쳐나는 인구는 UN에서 강제로 다른 식민지로 보내버린다.

척박한 식민지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유일한 오락거리는 '퍼키 팻 모형'이라는 장난감으로 '캔-D'라 불리는 환각제를 복용하면 이 장난감 속으로 들어가는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이해하기 쉽게 가상현실 체험이 가능한 장난감이라 보면 된다.)

이 장난감과 '캔-D'는 모두 'P.P 레이아웃'이라는 기업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파머 엘드리치'라는 전설적인 기업가가 프록시마 항성계로의 여행에서 '캔-D'를 대체할 수 있는 '츄-Z'라는 물질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 약물은 마치 시간 여행을 하듯 과거나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체험을 가능하게 해 준다.

자신의 독점적 지위를 위협당한 'P.P 레이아웃'의 사장 '레오 뷸레로'와 같은 회사에서 유행 예측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던 '바니 메이어슨'이라는 인물의 시각으로 작품은 전개된다.

신은 영생을 약속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pg 251)

두 약품 모두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해 주는데, '캔-D'의 세계가 가상이라는 것이 명확한 세계라면 '츄-Z'의 세계는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약물에서 깨어나도 환각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때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파머 엘드리치'가 보이게 되는 증상에 시달린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요원'이 나타나는 방식과 거의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 현상이 착각이나 상상이 아닌 '파머 엘드리치'의 큰 계획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작품은 심오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져준다.

개인적으로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어디까지 현실이라고 명확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통 속의 뇌' 가설이나 장자의 '호접몽'처럼 증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사실은 꿈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역시 같은 주제의식에서 출발한 영화였으므로 본 작품이 그 영화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을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작품에서 미래를 '가능성의 집합' 정도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자도 등장하고 약물을 통해 실제 미래를 관찰하는 자도 등장하지만 그 미래가 필연적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작가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미래는 여러 가능성 중 하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책을 펴자마자 아래의 글이 등장하는데, 본격적으로 작품을 읽기 전에는 별생각 없이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난 후 읽으면 느낌이 매우 다르다.

이 짧은 메모 안에 본 작품의 주제가 모두 함축적으로 담겨있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은 흙으로 빚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해.

애당초 근본부터가 그 모양이었으니 크게 기대할 게 없다는 뜻이야.

하지만 그걸 감안한다면, 바꿔 말해서 시작이 그렇게 미천했던 것치고는

그럭저럭 잘해왔다고 봐야 해.

따라서 우리가 지금 직면한 이 중대한 위기조차도

결국은 타개할 수 있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신념일세.

무슨 뜻인지 알겠지?

(pg 10)

모든 작품이 다 재미있지는 않아서 어떤 작품은 솔직히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을 때도 있었는데 이 작품은 확실하게 재미는 보장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이 과연 어디까지 진실일까 한 번쯤 의심해 보게 만드는 매력까지 담고 있었다.

워낙 '매트릭스' 시리즈를 좋아해서 그런지 이 작품 역시 굉장히 몰입감 있게 읽었다.

필립 K. 딕 작품 세계로의 여행도 절반이 훌쩍 넘게 지났는데 남은 작품이 줄어드는 게 아쉬울 정도로 그의 작품 세계에 푹 빠지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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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케인스 - 다음 세대가 누릴 경제적 가능성
존 메이너드 케인스 외 지음, 김성아 옮김, 이강국 감수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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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실패를 보정하기 위한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케인스가 남긴 한 글을 현대 석학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한 번에 훑어볼 수 있는 재미난 책이 나와서 읽어보게 되었다.

(학창 시절 기억으로는 분명 '케인즈'라고 배운 것 같은데 표기가 '케인스'로 바뀐 모양이다.)

이 책에서는 케인스가 쓴 글 중 자본주의의 100년 후 모습(2030년)이 어떻게 될지를 예측했던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짧은 에세이를 중심으로 그의 예측이 현재와 얼마나 다른지, 또 그의 예측이 왜 지금도 중요한지를 현대 유명 석학들의 시점으로 풀어내고 있다.

케인스는 100년 전(1931년), 세계의 경제가 지금의 속도로 발전한다면 100년 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 15시간만 일하면 필수적인 재화를 확보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라 전망했다.

그래서 케인스는 사람들이 보다 많은 여가를 즐기게 될 것이고, 이런 현상을 통해 더 많은 돈만을 좇는 저열한 문화에서 벗어나 지혜와 미덕 등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고 타인의 경제적 안위를 더 생각하는 사회가 가능해질 것이라 예측했다.

변화의 과정은 단순해서 경제적 궁핍함에서 벗어나는 계층과 집단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극단적인 변화는 그런 경제적 자유가 아주 보편화되어

개인이 이웃에 대해 가지는 의무의 본질이 바뀔 때 일어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신의 경제적 안위를 위해 사는 것은 더 이상 합당하지 않고,

타인의 경제적 안위를 챙기는 일이 합당하게 여겨질 것이다.

(케인스, pg 59)

물론 아직 2030년은 오지 않았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 내에 케인스가 그렸던 핑크빛 미래가 도래할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 예측이 현실과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다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각 학자들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다.

학자에 따라 케인스에 우호적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읽다 보니 대체로 논의의 중심은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케인스의 예측에서 가장 현실과 괴리가 큰 부분은 소득의 증가가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특이한 점은 유럽과 미국으로 나누어 볼 때, 유럽은 그래도 이전보다 노동 시간이 많이 단축된 반면, 미국은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금 대한민국을 사는 소시민의 시각으로 봐도, 주변 사람들에게 "하루 4시간 일하고 150만 원 받을래, 8시간 일하고 300만 원 받을래?"라고 물으면 대부분 후자를 선택할 것 같다.

이는 아래의 원인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물론 150만 원으로도 굶어 죽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삶을 살기에는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경제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항목들은 충분히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예측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절대적'인 욕구가 아무리 충족되었다 하더라도 '상대적'인 욕구는 끝없이 추구할 수 있다.

케인스 역시 이 상대적인 욕구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간과한 사실은 '절대적'인 욕구 역시도 계속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현대인에게 스마트폰이나 대형 TV, 에어컨, 건조기, 승용차 등은 사실상 없다고 죽진 않지만 그래도 생필품이라 불릴만한 품목들이다.

역시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 목록에 포함될 재화가 늘어날 것이고 이를 구매하기 위한 비용도 늘기 때문에 임금이 오른다 하더라도 노동 시간을 줄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케인스가 맞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근본적으로 틀렸다.

적어도 일부 국가에서는 경제 체제가 만족을 모르는 욕구를 만들어냈다.

이런 욕구로 인해 우리가 인식하는 경제적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 '더 위대하고 영구적 중요성을 가진 다른 문제들'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계속 제단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pg 125)

또한 '절대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충족되고 나자 사람들이 과시적 소비 행태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었다는 점 역시 그의 전망을 빗나가게 한 중요한 요인이다.

SNS의 보급이 이를 부추기는 경향도 심화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지적되는 것이 바로 케인스가 분배 문제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국가 규모로 보면 케인스가 예측한 수치만큼이나 우리는 더 잘 살게 되었지만 개별 인간의 관점에서는 크게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불평등의 심화 때문이다.

여하간 학자들마다 각기 케인스가 쓴 짧은 에세이를 이리저리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인지라 글을 쓴 학자들마다 지적하는 포인트가 조금씩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에 따라 서술의 분위기나 난이도도 각기 다르다.

어떤 글은 쉽게 읽히는 반면 특정 저자의 글은 몇 번을 읽어도 도통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싶은 것도 있었다.

따라서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라면 읽다가 다소 어려운 부분이 나올 때 그냥 다른 저자의 글로 넘어가는 것도 방법일 것 같다.

케인스의 경제학 모델 자체에 대한 의견도 학자들마다 천지차이라서 케인스의 경제 이론에 긍정적인 사람이나 부정적인 사람이나 모두 거슬리는 부분이 있을 법 하다.

이는 우리가 '내 편 아니면 네 편'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익숙해져서일 테고, 대체로는 긍정하는 부분과 부정하는 부분이 공존하는, 케인스를 보다 반성적으로 살펴보자는 의미의 글들에 가까우니 개인적인 호불호는 접어두고 읽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비록 지금의 현실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예측이지만, 100년 전에 그가 경제학자라는 명함 아래에서 과감하게 펼쳤던 예측은 지금도 의미가 있다.

특히나 경제학자들이 이미 지난 과거를 분석하는 것에는 특출나지만 미래는 단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금의 상황에서 케인스의 과감함이 더 빛을 발하는 느낌이다.

게다가 그가 제시한 미래상이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웠다.

이런 사회가 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기억하라.

"경제적 축복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속도는 인구 통제 능력,

전쟁 및 시민 분쟁을 피하려는 결의,

과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과학에 위임하려는 의지,

그리고 생산과 소비의 차이로 결정되는 축적 비율의 네 가지로 결정될 것이다."

다시 말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로버트 솔로, pg 173)

하지만 아무리 최신 성장 이론에 해박하다 할지라도, 요즘 경제학자 중에서

지금부터 100년 후의 경제를 진지하게 전망하려 드는 이가 있을까?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케인스는 그렇게 했다.

케인스가 미래를 예측했을 당시의 경제 상황과 부족한 이론 도구들을 고려한다면

그의 예측은 놀랄만큼 정확했다.

(리 오헤니언, pg 197)

아주 쉬운 책은 아니었지만, 각 글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생각보다 어렵지도 않았다.

책의 가장 마지막에 실린 윌리엄 보몰의 글에 보면 100년 이후의 미래를 이 정도로 예측하는 건 최신 이론으로 무장한 지금의 학자들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반박글이 실려 있다.

경제학 지식은 소박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글이 가장 공정한 판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소득이 증가하고 소득과 개인의 행복과의 관계가 꼭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됨에 따라 우리는 비물질적 재화의 중요성을 더 많이 알게 된다.

사람들은 이미 비물질적 재화를 더 많이 요구하기 시작했고,

'각성한' 정치인들은 호모이코노미쿠스에 기반한 처방전만으로는

다음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레오나르도 베체티, pg 365)

부록이나 첨부 문건을 제외하면 그리 긴 분량이 아니기 때문에 케인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100년 전에 어떤 전망을 했었고 이것이 지금의 세계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면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한 책이었다.

사족이지만 그래도 엄연히 케인스 관련 책인데 띠지에는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사진이 거대하게 붙어 있다.

케인스가 미남이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저승에서 보고 있다면 좀 섭섭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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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을 죽이는 완벽한 방법 - 김진명 장편소설
김진명 지음 / 이타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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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 제목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비유적인 표현이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책 내용이 진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이야기라는 책 소개에 도저히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전범이라지만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일국의 지도자를 죽이는 내용의 소설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김진명'이라는 이름이 붙은 채로 말이다.



처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치겠다고 했을 때 3일이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 했었다.

하지만 (다행히) 러시아의 군대가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고 나토를 비롯한 세계 여러 국가들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면서 이 전쟁의 향방은 벌써 해가 두 번이나 바뀌게 생겼지만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타국의 섣부른 군사적 개입은 곧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에 모두들 관심은 있어도 뾰족한 해결책은 없는 상황, 그리고 그 근원에는 러시아의 막강한 핵 무기가 있다.

작가는 이런 상황에 과감하게 'What if?'라는 질문을 던진다.

푸틴이 인류 전체를 핵 전쟁으로 위협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물론 그 방법이라는 것이 자객을 보내 푸틴을 저격하는 등의 식상한 방법으로 진행된다면 통쾌하긴 해도 소설로서의 재미는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될 경우 또 다른 푸틴이 등장할 가능성만 커지기에 해결책이랄 수도 없다.)

작가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무려 핵탄두 288개가 탑재된 미국의 전략핵잠수함 '로드아일랜드'를 탈취한다는(!)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방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작품은 전쟁 초기에 아내와 딸이 러시아군에 강간 후 살해당한 슬픈 사연을 가진 '미하일'이라는 우크라이나 군인과 미국에서 우수한 군사 훈련을 받은 '케빈 한'이라는 한국계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러시아에 대한 복수심 하나로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던 미하일은 어느 전투 중 몸에 세 곳의 총알을 맞아 병원으로 이송된다.

그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케빈을 만나게 되고 그들이 모종의 계획으로 전쟁을 끝내기 위한 행동에 나서게 된다.

아무리 우수한 자원이라 하더라도 고작 일곱 명의 인원으로 거대 전략핵잠수함을 탈취한다는 것 자체가 다소 허황되게 느낄 수 있다.

물론 작품 후반부에 가면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는지도 밝혀지게 되지만 읽으면서 '왜 이렇게 쉽지?'라는 생각이 계속 들긴 했다.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보여주는 행보나 전쟁의 현황은 매우 사실적인데 반해 그 해결책이 다소 과하게 느껴져서 아쉽기는 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 정도의 행동이 아니면 쉽게 결말이 날 전쟁이 아니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저자의 해결책이 단순히 '푸틴'이라는 인물의 제거만이 아니라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방법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대리만족이 되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사람은 자신이 미약하고 가난하면 불안과 고통에 파르르 몸을 떨지요.

하지만 나를 바쳐서 남을 이루어주겠다고 나설 때 사람은 신에 한없이 가까워집니다."

(pg 406)

400페이지 정도로 꽤 두께감이 있긴 하나 글씨가 크고 문장이 간결해 읽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소재의 특성상 전쟁의 참상을 표현하는 부분이 꽤 많을 수밖에 없는데 이 부분이 너무 참혹해서 쉽게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군인으로 인한 약탈, 강간, 살인 등의 전쟁 범죄는 물론이고 폭격으로 인해 인지할 틈도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 소중한 이를 잃은 슬픔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까지 전쟁은 많은 참상을 남긴다.

소규모의 국지전조차도 인류의 절멸을 고민해야 할 정도로 인류의 전쟁 능력은 이미 통제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나 싶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하루빨리 종식돼 고통받는 사람들이 더는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일개 변방국 국민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지만 이런 작품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고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라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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