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 필립 K. 딕 걸작선 5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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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소개된 그의 모든 작품을 읽는 것이 목표인 필립 K. 딕의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무한 채로 읽었는데 읽으면서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책 후미의 역자 후기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영화 '매트릭스'의 바탕이 된 작품이 맞다고 한다.

작품의 배경은 태양계 몇몇 행성에 식민지가 건설된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지구는 온난화가 심해져 밖에서 태양에 노출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체내의 수분을 빼앗겨 사망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고 넘쳐나는 인구는 UN에서 강제로 다른 식민지로 보내버린다.

척박한 식민지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유일한 오락거리는 '퍼키 팻 모형'이라는 장난감으로 '캔-D'라 불리는 환각제를 복용하면 이 장난감 속으로 들어가는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이해하기 쉽게 가상현실 체험이 가능한 장난감이라 보면 된다.)

이 장난감과 '캔-D'는 모두 'P.P 레이아웃'이라는 기업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파머 엘드리치'라는 전설적인 기업가가 프록시마 항성계로의 여행에서 '캔-D'를 대체할 수 있는 '츄-Z'라는 물질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 약물은 마치 시간 여행을 하듯 과거나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체험을 가능하게 해 준다.

자신의 독점적 지위를 위협당한 'P.P 레이아웃'의 사장 '레오 뷸레로'와 같은 회사에서 유행 예측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던 '바니 메이어슨'이라는 인물의 시각으로 작품은 전개된다.

신은 영생을 약속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pg 251)

두 약품 모두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해 주는데, '캔-D'의 세계가 가상이라는 것이 명확한 세계라면 '츄-Z'의 세계는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약물에서 깨어나도 환각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때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파머 엘드리치'가 보이게 되는 증상에 시달린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요원'이 나타나는 방식과 거의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 현상이 착각이나 상상이 아닌 '파머 엘드리치'의 큰 계획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작품은 심오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져준다.

개인적으로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어디까지 현실이라고 명확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통 속의 뇌' 가설이나 장자의 '호접몽'처럼 증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사실은 꿈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역시 같은 주제의식에서 출발한 영화였으므로 본 작품이 그 영화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을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작품에서 미래를 '가능성의 집합' 정도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자도 등장하고 약물을 통해 실제 미래를 관찰하는 자도 등장하지만 그 미래가 필연적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작가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미래는 여러 가능성 중 하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책을 펴자마자 아래의 글이 등장하는데, 본격적으로 작품을 읽기 전에는 별생각 없이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난 후 읽으면 느낌이 매우 다르다.

이 짧은 메모 안에 본 작품의 주제가 모두 함축적으로 담겨있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은 흙으로 빚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해.

애당초 근본부터가 그 모양이었으니 크게 기대할 게 없다는 뜻이야.

하지만 그걸 감안한다면, 바꿔 말해서 시작이 그렇게 미천했던 것치고는

그럭저럭 잘해왔다고 봐야 해.

따라서 우리가 지금 직면한 이 중대한 위기조차도

결국은 타개할 수 있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신념일세.

무슨 뜻인지 알겠지?

(pg 10)

모든 작품이 다 재미있지는 않아서 어떤 작품은 솔직히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을 때도 있었는데 이 작품은 확실하게 재미는 보장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이 과연 어디까지 진실일까 한 번쯤 의심해 보게 만드는 매력까지 담고 있었다.

워낙 '매트릭스' 시리즈를 좋아해서 그런지 이 작품 역시 굉장히 몰입감 있게 읽었다.

필립 K. 딕 작품 세계로의 여행도 절반이 훌쩍 넘게 지났는데 남은 작품이 줄어드는 게 아쉬울 정도로 그의 작품 세계에 푹 빠지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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