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케인스 - 다음 세대가 누릴 경제적 가능성
존 메이너드 케인스 외 지음, 김성아 옮김, 이강국 감수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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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실패를 보정하기 위한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케인스가 남긴 한 글을 현대 석학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한 번에 훑어볼 수 있는 재미난 책이 나와서 읽어보게 되었다.

(학창 시절 기억으로는 분명 '케인즈'라고 배운 것 같은데 표기가 '케인스'로 바뀐 모양이다.)

이 책에서는 케인스가 쓴 글 중 자본주의의 100년 후 모습(2030년)이 어떻게 될지를 예측했던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짧은 에세이를 중심으로 그의 예측이 현재와 얼마나 다른지, 또 그의 예측이 왜 지금도 중요한지를 현대 유명 석학들의 시점으로 풀어내고 있다.

케인스는 100년 전(1931년), 세계의 경제가 지금의 속도로 발전한다면 100년 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 15시간만 일하면 필수적인 재화를 확보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라 전망했다.

그래서 케인스는 사람들이 보다 많은 여가를 즐기게 될 것이고, 이런 현상을 통해 더 많은 돈만을 좇는 저열한 문화에서 벗어나 지혜와 미덕 등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고 타인의 경제적 안위를 더 생각하는 사회가 가능해질 것이라 예측했다.

변화의 과정은 단순해서 경제적 궁핍함에서 벗어나는 계층과 집단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극단적인 변화는 그런 경제적 자유가 아주 보편화되어

개인이 이웃에 대해 가지는 의무의 본질이 바뀔 때 일어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신의 경제적 안위를 위해 사는 것은 더 이상 합당하지 않고,

타인의 경제적 안위를 챙기는 일이 합당하게 여겨질 것이다.

(케인스, pg 59)

물론 아직 2030년은 오지 않았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 내에 케인스가 그렸던 핑크빛 미래가 도래할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 예측이 현실과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다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각 학자들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다.

학자에 따라 케인스에 우호적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읽다 보니 대체로 논의의 중심은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케인스의 예측에서 가장 현실과 괴리가 큰 부분은 소득의 증가가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특이한 점은 유럽과 미국으로 나누어 볼 때, 유럽은 그래도 이전보다 노동 시간이 많이 단축된 반면, 미국은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금 대한민국을 사는 소시민의 시각으로 봐도, 주변 사람들에게 "하루 4시간 일하고 150만 원 받을래, 8시간 일하고 300만 원 받을래?"라고 물으면 대부분 후자를 선택할 것 같다.

이는 아래의 원인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물론 150만 원으로도 굶어 죽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삶을 살기에는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경제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항목들은 충분히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예측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절대적'인 욕구가 아무리 충족되었다 하더라도 '상대적'인 욕구는 끝없이 추구할 수 있다.

케인스 역시 이 상대적인 욕구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간과한 사실은 '절대적'인 욕구 역시도 계속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현대인에게 스마트폰이나 대형 TV, 에어컨, 건조기, 승용차 등은 사실상 없다고 죽진 않지만 그래도 생필품이라 불릴만한 품목들이다.

역시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 목록에 포함될 재화가 늘어날 것이고 이를 구매하기 위한 비용도 늘기 때문에 임금이 오른다 하더라도 노동 시간을 줄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케인스가 맞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근본적으로 틀렸다.

적어도 일부 국가에서는 경제 체제가 만족을 모르는 욕구를 만들어냈다.

이런 욕구로 인해 우리가 인식하는 경제적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 '더 위대하고 영구적 중요성을 가진 다른 문제들'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계속 제단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pg 125)

또한 '절대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충족되고 나자 사람들이 과시적 소비 행태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었다는 점 역시 그의 전망을 빗나가게 한 중요한 요인이다.

SNS의 보급이 이를 부추기는 경향도 심화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지적되는 것이 바로 케인스가 분배 문제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국가 규모로 보면 케인스가 예측한 수치만큼이나 우리는 더 잘 살게 되었지만 개별 인간의 관점에서는 크게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불평등의 심화 때문이다.

여하간 학자들마다 각기 케인스가 쓴 짧은 에세이를 이리저리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인지라 글을 쓴 학자들마다 지적하는 포인트가 조금씩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에 따라 서술의 분위기나 난이도도 각기 다르다.

어떤 글은 쉽게 읽히는 반면 특정 저자의 글은 몇 번을 읽어도 도통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싶은 것도 있었다.

따라서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라면 읽다가 다소 어려운 부분이 나올 때 그냥 다른 저자의 글로 넘어가는 것도 방법일 것 같다.

케인스의 경제학 모델 자체에 대한 의견도 학자들마다 천지차이라서 케인스의 경제 이론에 긍정적인 사람이나 부정적인 사람이나 모두 거슬리는 부분이 있을 법 하다.

이는 우리가 '내 편 아니면 네 편'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익숙해져서일 테고, 대체로는 긍정하는 부분과 부정하는 부분이 공존하는, 케인스를 보다 반성적으로 살펴보자는 의미의 글들에 가까우니 개인적인 호불호는 접어두고 읽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비록 지금의 현실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예측이지만, 100년 전에 그가 경제학자라는 명함 아래에서 과감하게 펼쳤던 예측은 지금도 의미가 있다.

특히나 경제학자들이 이미 지난 과거를 분석하는 것에는 특출나지만 미래는 단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금의 상황에서 케인스의 과감함이 더 빛을 발하는 느낌이다.

게다가 그가 제시한 미래상이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웠다.

이런 사회가 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기억하라.

"경제적 축복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속도는 인구 통제 능력,

전쟁 및 시민 분쟁을 피하려는 결의,

과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과학에 위임하려는 의지,

그리고 생산과 소비의 차이로 결정되는 축적 비율의 네 가지로 결정될 것이다."

다시 말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로버트 솔로, pg 173)

하지만 아무리 최신 성장 이론에 해박하다 할지라도, 요즘 경제학자 중에서

지금부터 100년 후의 경제를 진지하게 전망하려 드는 이가 있을까?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케인스는 그렇게 했다.

케인스가 미래를 예측했을 당시의 경제 상황과 부족한 이론 도구들을 고려한다면

그의 예측은 놀랄만큼 정확했다.

(리 오헤니언, pg 197)

아주 쉬운 책은 아니었지만, 각 글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생각보다 어렵지도 않았다.

책의 가장 마지막에 실린 윌리엄 보몰의 글에 보면 100년 이후의 미래를 이 정도로 예측하는 건 최신 이론으로 무장한 지금의 학자들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반박글이 실려 있다.

경제학 지식은 소박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글이 가장 공정한 판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소득이 증가하고 소득과 개인의 행복과의 관계가 꼭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됨에 따라 우리는 비물질적 재화의 중요성을 더 많이 알게 된다.

사람들은 이미 비물질적 재화를 더 많이 요구하기 시작했고,

'각성한' 정치인들은 호모이코노미쿠스에 기반한 처방전만으로는

다음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레오나르도 베체티, pg 365)

부록이나 첨부 문건을 제외하면 그리 긴 분량이 아니기 때문에 케인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100년 전에 어떤 전망을 했었고 이것이 지금의 세계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면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한 책이었다.

사족이지만 그래도 엄연히 케인스 관련 책인데 띠지에는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사진이 거대하게 붙어 있다.

케인스가 미남이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저승에서 보고 있다면 좀 섭섭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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