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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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소양이 일천한지라 솔직히 소설을 읽을 때 문장의 아름다움보다는 이야기의 재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서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네 번째 읽는 한강의 작품.

이번에는 깔끔하기 그지없는 제목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집사람이 책 제목을 보더니 '하얀색이라는 뜻이야?'라고 물었었다.

책을 다 읽은 후여서 '미묘하게 달라'라고 대답했더니 뭐가 다르냐 묻길래 작가가 한 말을 보여줬다.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pg 186, 작가의 말 中)

명료하게 대답하긴 어렵지만 작가가 의도한 뉘앙스가 뭐였는지는 제법 알 것 같다.

이 작품은 제목처럼 '흰' 색을 가진 것들의 목록을 쭉 나열한 뒤 각 단어들에 작가의 인생과 상념을 한 조각씩 투영한 작품이다.

활로 철현을 켜면 슬프거나 기이하거나 새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들이건 흘러 나올 것이다.

그 문장들 사이에 흰 거즈를 덮고 숨어도 괜찮은 걸까.

(pg 10)

편집도 그렇고 글의 양도 그렇고 소설이 아니라 시집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각각의 제목 아래 길어야 두 페이지 정도의 글이 실려있는데, 길이가 짧기 때문에 딱히 서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작가에게 생후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은 채 죽은 언니가 있었다는 것과 작가가 바르샤바를 여행하면서 지난 역사 속에서 벌어진 죽음에 대한 생각과 살아남은 사람들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는 흔적 정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딱히 줄거리가 없어서 그런지 문장에 더 집중하며 읽게 되었던 것 같다.

책 후미에 본문보다 더 어려운 해설이 있지만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그다지 도움이 된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작가의 풍부한 감성을 굉장히 절제된 손길로 다듬은 문장들을 읽는 것,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언니와 바르샤바에서 벌어진 대학살로 죽어간 사람들의 죽음들과 이를 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아무리 시간이 약이라지만 보통 몸이 아프면 시간도 더디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작가는 아플 때 더디 가는 시간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 몸이 아플 때 특히 그렇다.

열네 살 무렵 시작된 편두통은 예고 없이 위경련과 함께 찾아와 일상을 정지시킨다.

해오던 일을 모두 멈추고 통증을 견디는 동안,

한 방울씩 떨어져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들 같다.

손끝이 스치면 피가 흐를 것 같다.

숨을 들이쉬며 한순간씩 더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pg 11)

그 밖에도 상당히 마음에 와닿는 문장들이 많다.

세상에 태어나 죽지만 말아 달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 말고는 들어본 적 없이 사라진 언니를 생각하며 썼기 때문일까, 모국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단어에 걸맞은 한국어의 맛과 뉘앙스를 잘 살린 표현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소싯적 번역일로 잠시 먹고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의 구절들은 나라면 도저히 영어로 옮기지 못할 것 같은, 다른 언어라면 다른 의미가 되어 버릴 것 같은 문장들이다.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라는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pg 59)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며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pg 78)

글 양도 적고 분량도 본문만은 130페이지 정도라서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문장이 짧은 만큼 문장 사이사이에 의미를 많이 집어넣은 느낌이라 곱씹으며 읽기에 좋을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읽으면서 몰아치는 감정이 너무 과하지 않아서 좋았고, 읽고 나서도 한동안 그 잔상에 시달리지 않아서 좋았다.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읽은 작품 중에서는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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