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움 -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3가지 기준
김기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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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제목을 가진 담백한 철학 책이다.

21세기, 인공지능과 로봇이 우리 사회에 스며들고 있는 요즘 다시 '인간답다'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새겨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읽어보게 되었다.

(솔직히 최재천 교수 유튜브에 저자가 출연해 나눈 대화를 보고 읽고 싶어진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인간다움의 세 가지 조건으로 아래와 같은 개념들을 제시한다.

공감을 연료로 하고 이성을 엔진으로 해 자율적으로 공동체적인 규범을 구성해 공존하는 성품

(pg 60)

여기에서의 키워드는 이성과 공감, 그리고 자유(자율)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밖에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여타 다른 동물과 구분 짓게 하는 특징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저자의 연역적인 추리 끝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특징으로 도출된 결과는 이 세 가지였다.

저자는 이 세 가지의 개념들이 인류의 역사와 함께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성의 경우 고대부터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언급되어 왔지만 중세를 거치면서 종교의 위세에 가려져 그 중요성이 상당히 약화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을 거치면서 다시금 이성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그 결과로 과학이 발전해 사회를 지금의 모습으로 바꾸는 데 기여하게 된다.

공감의 가치 역시 인간이 공동체를 형성함과 동시에 반드시 갖추어야 할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지만 이 역시 감정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이성을 중시하고 감성을 멸시했던 철학이 우세했던 시절에는 그 중요성이 제대로 강조되지 못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개인'과 '자유'의 가치가 중시되고 내가 존중받아야 할 만큼 타인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면서 공감의 가치는 제 자리를 찾게 된다.

내적인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은

단지 예술을 발전시켰다는 의미 이상이다.

욕망과 정서가 머무는 내부에 대해 자유롭게 쓰고, 묘사하고, 이야기하면서

자아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pg 145)

개인이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과거에서 점차 공동체가 개인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화하면서 자유에 대한 개념도 많이 확산되었다.

저자는 '개인이 자신의 신념을 가질 수 있고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소극적 자유'와 마르크스가 주장한 '삶에 대한 전반적인 자유를 포함하는 적극적 자유'를 구분한다.

보통 여기까지 설명하면 적극적 자유를 더 보장하는 것이 좋다는 논리로 흐르기 쉬운데, 놀라운 점은 저자가 적극적 자유의 추구가 역사적으로는 반드시 억압과 압제라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소극적 자유를 더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치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믿음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절대적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공고해지면 다른 사람에 대한 기치론적인 압제와 강요를 하게 된다.

그것이 마치 그 사람을 위한 것인 양 정당화하면서 말이다. - 중략 -

이런 부작용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처방은 소극적 자유를 엄격히 지키는 것이다.

(pg 244)

여하간 이러한 역사를 통해 확립된 인간다움의 조건들은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빅데이터와 SNS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다양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과학의 발달로 인간과 동물은 결국 지능 정도의 차이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조적인 시각도 널리 퍼지고 있다.

이성의 경우 과학과 기술 개발에 필수적인 이론적 이성과 도구적 이성은 분명 강화되고 있지만 행동의 기준이 되는 가치 이성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게다가 비대면 소통의 증가는 공감의 가치를 상당 부분 약화시킨다.

여러 연구결과들이 최근의 청소년들에게서 공감 능력이 이전 세대에 비해 많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범죄의 발생 양상도 더 심각해지고 있다.

게다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의 발달은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라 믿어왔던 추론과 판단마저도 외주화하는 경향을 만들어 낸다.

내가 무엇을 보고 싶을지는 유튜브나 넷플릭스의 알고리즘이 결정하고 점심에 무엇을 먹으면 좋을지도 네이버 블로그의 추천 맛집이 알려주며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 때에도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따른다.

도구적 의존을 넘어 점차 목표 의존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율적 선택을 하는 것에 점점 더 게을러지고,

우리의 선택은 그들의 선택으로 대체된다. - 중략 -

인공지능에 선택을 의존하는 상황은 이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공지능이 도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성은 우리의 행동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행위자의 자율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 중략 -

그러나 인공지능이 도입되면서 선택의 이유를 고민하는 이성은 잠자고

교통 포털이 제공하는 경로를 별생각 없이 따른다.

선택을 위한 고민을 외부에 의존하다 보니 이성을 통해 상황을 성찰할 기회는 줄어든다.

스스로의 삶을 그려나가는 자율성도 그만큼 위축된다.

(pg 312-313)

저자는 이런 위협에 직면해 과연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논의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무슨 가치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해갈 것인지, 무슨 가치는 불멸의 가치로서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할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다움에 대한 고대인들의 생각이 오늘 우리의 생각과 다르듯

인간다움에 대한 오늘의 생각도 역사 속에서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성철하지 않고 그저 변화하는 세태에 몸을 맡길 수는 없다.

우리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인간다움에 대한 생각에 도달했다.

그런 만큼 현재 우리가 처한 도전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인식한 뒤,

보존할 것은 보존하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화를 시작하자는 이야기다.

인간다움에 대한 도전에 눈을 감는 것은 결코 인간답지 않기 때문이다.

(pg 323)

당연히 '인간다움'을 정의하는 단어들이 모두 추상적인 개념들이기 때문에 마냥 쉽게만 느껴지는 책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현학적인 표현이나 지나친 추상화,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마구 늘어놓지는 않는다.

오히려 굉장히 친절하게 서술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쉽게 쓰려고 애쓴 저자의 노력이 돋보이는 책이었다.

300페이지가 조금 넘을 정도로 두껍지도 않고 내용도 꽤 흥미로운 편이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인간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지, 역사적으로 인간은 어떻게 정의되어 왔는지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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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 퀴즈 백과 100 - 풀수록 똑똑해지는 바이킹 어린이 퀴즈 백과 시리즈
신기한 생각 연구소 지음 / 바이킹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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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이 시리즈를 손에 넣은 것도 벌써 네 번째다.

물론 아비의 세트병이 한몫하기도 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아이가 너무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곤충, 동물, 수수께끼를 지나 이번에는 속담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속담 책을 꽤 여러 권 읽은지라 속담의 종류와 의미는 이미 잘 알고 있는 편인데 이를 응용해 이런저런 퀴즈를 풀어보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에 좋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물론 속담에 대한 설명이나 뜻이 비슷한 속담 등 속담을 처음 접하는 아이들을 위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문제를 내서 맞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책이기 때문에 속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는 아이들이 보기에 좋은 구성이라 보면 되겠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게 된 새로운 지식을 뽐내는 것을 좋아한다.

어쩌면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아는 척' 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을 제대로 건드린다.

따라서 앎에 대한 순수한 즐거움을 즐길 줄 아는 나이가 되면 무조건 좋아할 수밖에 없는 형식이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이제 일상적인 대화에서 속담을 인용하는 경우는 많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글을 쓸 때에는 속담을 제법 많이 쓴다.

따라서 속담을 아는 것이 곧 문해력에도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릴 때 속담의 뜻과 쓰임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학창 시절 외워야 할 내용이 있을 때 예상 문제를 만들어보듯 속담 관련 퀴즈들을 풀어봄으로써 자연스럽게 속담과 친해질 수 있는 형태라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다른 시리즈들이 나와줄 것으로 보이는데 다음에는 어떤 주제로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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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 카를로 로벨리의 기묘하고 아름다운 양자 물리학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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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나르시시스트가 쓴 것 같은 느낌의 제목이지만 실상은 양자역학에 관한 책이다.

요즘 과학 지식들을 쉬운 언어로 전해주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인기가 많은데 이 책 역시 매우 친절한 언어로 양자 물리학을 쉽게(?!) 알려주는 책이다.

태생이 문돌이인 주제에 양자역학에 관심이 생겨서 관련 교양서들을 몇 권 읽었었는데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이 대체로 다 '쉽고 친절하다'라는 것을 표방하고 있긴 했지만 이 책은 그중에서도 가장 쉽고 친절한 느낌이었다.

일례로, 책을 통틀어 수식은 단 한 줄만 등장한다.

그것도 '양자역학은 행렬로 표기되기 때문에 곱셈의 순서가 중요하다'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단 한 번 등장할 뿐이다.

나머지는 저자의 친절한 설명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니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의 흐름은 하이젠베르크가 양자역학 문제를 '눈에 보이는', '실험으로 가능한' 부분만을 놓고 설명하고자 했던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어서 양자의 중첩과 얽힘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는데, 이 부분이 우리의 직관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를 설명하기 위한 다양한 학설을 소개한 뒤 저자 자신이 생각할 때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을 설명한다.

헬골란트에서 베르나 하이젠베르크가 얻은 독창적인 통찰에 따르면,

이 이론은 우리가 보지 않을 때 물질 입자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그 입자를 관찰하면

그 입자를 어떤 지점에서 찾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를 말해줄 뿐이죠.

(pg 55)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기도 한데, 보통의 양자역학 소개서에는 각각의 학설을 소개하고 '아직 공통적으로 합의된 학설은 없다' 정도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을 꺼리는 편인데 이 책은 대놓고 '나는 이 학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라고 똑 부러지게 말해준다.

그래서 저자는 '다세계 해석'과 '숨은 변수 해석' 보다는 '관계론적 관점'을 지지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이후의 논지에서 왜 양자역학을 관계론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대상의 속성이란 그 대상이 다른 대상에 작용하는 방식 바로 그것입니다.

대상 자체는 다른 대상에 대한 상호작용의 네트워크일 뿐이죠.

양자론은 물리적 세계를 확정된 속성을 가진 대상들의 집합으로 보는 대신

관계의 그물망으로 보는 시각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대상은 그 그물망의 매듭입니다.

이제는, 대상이 상호작용하지 않을 때에도 항상 속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불필요하며, 오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될 테니까요.

상호작용이 없으면 속성도 없습니다.

(pg 101)

책의 제목 역시 이러한 양자론 인식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즉 관찰하는 나라는 존재가 없으면 이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별다를 것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나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고, 그런 게 어딨냐고 반박하고 싶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진짜로 그럴지 우리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상대가 죽어도 세상이 돌아갈지는 확인할 수 있지만 내가 죽어도 세상이 돌아갈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는 말이다.)

반대로 세상이 없는 나도 떠올릴 수 없다.

아무 상호작용이 없는 원자 하나가 의미를 갖기 어려운 것처럼 내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공기 안에, 땅 위에, 무엇인가를 섭취하고, 무엇인가와 상호작용하며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모든 것은 관계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 양자론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임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양자역학이라는 어려운 개념을 소개하는 책이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교양서로 나왔기 때문에 지식적인 측면뿐 아니라 과학적인 사고와 태도의 중요성도 꽤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양자역학의 많은 사실들이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직관들에 반하는 내용이고 이러한 것들이 사실임을 밝혀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의문과 탐구가 이어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하고자 했던, 그리고 현상을 더 잘 설명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과학적 사고가 반드시 필요했다.

과학적 사고는 이미 얻은 확실한 사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고이며, 그 힘은 항상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시 시작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더 유효한 설명을 찾기 위해서라면 세상의 질서를 뒤엎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것에 다시 물음을 던지고 모든 것을 다시 뒤집어엎는 능력이죠.

(pg 94-95)

과학은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라,

진리의 담지자 같은 것은 없다는 자각 위에 놓여 있습니다.

배움의 가장 좋은 길은,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발견한 것에 맞춰

자신의 정신적 틀을 재조정하면서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것입니다. - 중략 -

우리의 지식 자체도 수많은 자연적 과정 중의 하나이며

자연의 일부로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pg 164)

저는 인간이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할 때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가,

확실성을 원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에 대한 탐구는 확실성을 먹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성의 근본적인 부재를 먹고 성장합니다.

우리의 무지를 날카롭게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의심에 마음을 열고 더욱 더 잘 배울 수 있습니다.

(pg 182)

분량도 200페이지가 조금 넘어 부담이 없고 문체도 친절하게 존댓말로 되어 있어서 술술 읽히는 맛이 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정보적인 측면에서 다른 양자역학 교양서들보다는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양자역학 관련 책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그나마 거부감 없이 양자역학의 기본 개념들을 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읽은 후 약간 더 어려운 양자역학 책을 더 읽는다면 개념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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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 블루 아이
루이스 베이어드 지음, 이은선 옮김 / 오렌지디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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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라는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픽션이라는 소개에 흥미가 생겨 읽어보게 된 작품이다.

600페이지가 넘는 벽돌 같은 책인지라 읽기 전부터 심적으로 부담이 될 것 같지만 장담컨대 읽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작품이라 확신한다.

배경이 1830년의 미국이고 고전 소설 느낌이 물씬 풍기는 문체로 되어 있어서 꽤 오래된 작품인가 싶지만 실제로는 2006년에 나온 나름 젊은(?) 작품이다.

육군사관학교에서 한 생도가 죽은 채 발견되는데, 특이하게도 시체가 한 번 사라졌다가 심장이 도려내진 채 다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 사건에 얽힌 미스터리를 전직 경찰인 '거스 랜도'가 파헤치는 작품이다.

그 유명한 '에드거 앨런 포'는 사관학교 1학년생으로 등장하는데 랜도가 그의 비범함을 발견하여 사건 해결의 조수로 활약하게 된다.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내용이지만 추리소설이라 하기에는 독자들에게 트릭이나 동기에 대한 힌트를 주어 추적하게 만들지는 않기 때문에 범죄 스릴러 정도로 분류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약점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가끔 힘겨울 때도 있다.

내 경험상 대부분의 부패는 그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약점. 강점으로 그걸 감추려는 시도.

(pg 563)

서술상 특이점이라면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고전 소설 느낌이 물씬 풍기는 문체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스토리 상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 장면 중에서 한 구절을 예로 들면, 일반적인 현대 소설에서라면 '식당에 도착했지만 배고픈 병사들은 자신의 식사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정도로 서술했을 구절을 아래와 같이 풀어쓰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렇게 장황한 서술이 읽으면서 꽤 재미있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각 인물들의 대화 역시 오래된 문학 작품들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대사들이어서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유니크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늘어지는 서술 때문에 전개가 지루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책이 다소 두꺼워 보이지만 막상 진행되는 사건 자체는 그리 많지 않고 계속해서 사건을 둘러싼 새로운 정보와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읽는 내내 흥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배경이 1800년대라서 지금처럼 과학적인 수사 방식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탐방과 인터뷰에 의존하며 사건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사건 해결의 호흡은 다소 더딘 편이다.

제목처럼 옅은 푸른 눈을 가진 유력한 용의자가 작품의 중반쯤 등장하지만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하는 것에는 계속해서 실패하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사건의 진상이 한순간에 훅 밝혀지는 구조를 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꽤나 충격적인 반전도 있어서 반전 있는 결말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끝까지 읽은 후 꽤 만족스러울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반전이 있다는 말조차도 스포일러라서 조심스럽지만)

내가 늘 주장하던 바였잖니?

우리는 가게와 같아서 문을 닫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고.

심지어 그 앞 길거리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고.

(pg 660)

이미 넷플릭스를 통해 영화로 제작된 작품이며 게다가 주연 배우가 무려 크리스찬 베일이다.

작품이 꽤 재미가 있었기에 주말을 맞아 바로 영화로도 봤다.

다 본 소감은 다소 복잡한데, 일단 소설에 비해 확실히 영상인지라 결말의 충격적인 반전을 위한 복선이 훨씬 더 직관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책으로 읽을 때에는 호흡이 길기도 하거니와 두 번 읽지 않으면 이 장면이 복선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는데 영화로는 대놓고 이 부분이 복선이라는 것을 꽤 많이 보여주는 편이었다. (물론 내가 결말을 알고 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원작에 충실하게 영상화를 잘 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영상으로는 본 작품이 가진 고전 소설 같은 매력을 느끼기는 다소 어려웠고 많은 극적인 부분들도 생략되었다.

하지만 영화의 평점이 넷플릭스 영화 치고는 꽤 높은 편인 것을 보면 작품을 읽지 않고 볼 때의 재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반대의 순서로 접했지만 영화를 먼저 본 후 원작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난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여하간 독특한 사건이 독특한 서술 방식을 만나 독특한 결말을 보여주는 굉장히 독특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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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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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 분야의 책으로 꽤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데다 최근에 읽었던 '자연에 이름 붙이기'라는 책이 이 책을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흥미가 생겨서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 역시 '분류학'과 '분류학자'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저자가 어릴 때부터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분류학자를 동경해왔는데, 그의 삶을 공부하다 보니 과학자와 스텐퍼드 대학의 초대 총장이라는 화려한 업적 뒤에 숨겨진 어두운 측면도 알게 된다.

그의 양면성을 긴 호흡으로 보여주고 그와 자신의 삶을 교차시켜가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다소 철학적인 질문까지도 던져주는 책이다.

저자가 어릴 적 그를 동경하게 된 계기는 그가 30년간 수집한 엄청난 양의 표본들이 지진으로 모두 부서지고 말았을 때,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물고기의 이름을 바늘로 꿰어 붙였다는 일화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일화가 저자를 사로잡은 이유는 과학자였던 저자의 아버지가 어릴 적 저자에게 해준 말 때문이었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pg 54)

과학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진리를 이야기해 준 것에 지나지 않지만 어린아이였던 저자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빠 T발 C야?!)

이후로도 소중했던 연인을 떠나보내는 등 이런저런 굴곡들이 겹치면서 삶의 의미를 잃고 헤매던 중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화에 푹 빠지게 된 것이다.

대체 그는 어떻게 그 엄청난 절망 속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묵묵히 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저자의 탐색은 뜻밖에도 그의 어두운 측면에도 도달하게 된다.

죽을 때까지도 '부적격' 인간들을 색출해 강제로 불임 수술을 하게 하는 등 우생학에 기반한 정책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자신을 초대 총장으로 만들어 준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제인 스텐퍼드의 의문의 죽음에도 관여한 것으로 밝혀진다.

우리가 이 나라의 정체성을 정의할 때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라 간주하는 그 사고방식,

우리가 초등학생에게 나치, 다른 사람들,

나쁜 놈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가르치는 그 악행,

그것을 세계 최초로 국가 정책으로 삼은 나라가 바로 우리였다.

(pg 213)

엄청난 충격을 받은 저자는 반대로 그 정책의 피해자들(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은 여성들)을 찾아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그 인터뷰 끝에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즉 이 세계의 진화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왔고 그중에 하나인 우리도 다양성을 거스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우리 모두가 독특한 하나의 개체로서 전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신념이었다!

(pg 228)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생전에 저지른 수많은 과오가 바로잡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후에도 분에 넘칠 정도의 인정과 존경을 받던 그였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책의 제목인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게 된 이유'에 주목한다.

데이비드가 평생을 걸쳐 이룩한 '물고기'라는 종이 최근 연구에서 '어류'라는 단일 종으로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미 천수와 부귀영화를 누리다 간 사람이지만 그래도 사후에 평생의 업적이 부정당하고 이 책이 출간된 후 나름의 재인식 운동도 일어났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는 그저 최근 연구에 따르면 '어류'라는 분류가 의미를 상실했다 정도로만 요약하고 있는데,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최근에 국내에도 소개된 '자연에 이름 붙이기'라는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

과학적으로 좀 더 논리적인 일은

어류란 내내 우리의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너무도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pg 242)

사실상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

먹이와 천적 정도만 구분할 뿐 그 이상의 구분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경계를 나누고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것을 어떻게든 구분하려 한다.

어쩌면 인간이 이 정도의 문명을 이루고 생태계의 지배적인 종이 된 이유도 이런 '구분하는' 능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구분 능력이 너무도 지나치기 때문에 지금처럼 같은 인간 종 안에서도 서로 차별하고 싸우는 모습이 끊이질 않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 자연이 프린트된 커튼 뒤를 들춰보았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를 보았다.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이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느낌이었다.

(pg 262)

자연과학의 탈을 쓰고는 있지만 저자의 인생 에세이라고도 볼 수 있을 책이다.

저자의 어린 시절 성장 이야기부터 성적 취향에 이르기까지 자기 고백이 생각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지식적인 부분을 나열하는 일반적인 자연과학 책에 비해 가독성도 좋고 다 읽은 후 여운도 많이 남는 것 같았다.

지식적인 측면에서는 생각보다 새로운 정보를 얻는다는 느낌은 크게 없었지만 왜 인기가 있는지, 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사견이지만 정보적인 측면에서는 이전에 읽었던 '자연에 이름 붙이기'가 더 알차게 느껴졌던 것 같아서 이 책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면 그 책도 한번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 서평: https://blog.naver.com/rssun_books/22324086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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