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 카를로 로벨리의 기묘하고 아름다운 양자 물리학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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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나르시시스트가 쓴 것 같은 느낌의 제목이지만 실상은 양자역학에 관한 책이다.

요즘 과학 지식들을 쉬운 언어로 전해주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인기가 많은데 이 책 역시 매우 친절한 언어로 양자 물리학을 쉽게(?!) 알려주는 책이다.

태생이 문돌이인 주제에 양자역학에 관심이 생겨서 관련 교양서들을 몇 권 읽었었는데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이 대체로 다 '쉽고 친절하다'라는 것을 표방하고 있긴 했지만 이 책은 그중에서도 가장 쉽고 친절한 느낌이었다.

일례로, 책을 통틀어 수식은 단 한 줄만 등장한다.

그것도 '양자역학은 행렬로 표기되기 때문에 곱셈의 순서가 중요하다'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단 한 번 등장할 뿐이다.

나머지는 저자의 친절한 설명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니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의 흐름은 하이젠베르크가 양자역학 문제를 '눈에 보이는', '실험으로 가능한' 부분만을 놓고 설명하고자 했던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어서 양자의 중첩과 얽힘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는데, 이 부분이 우리의 직관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를 설명하기 위한 다양한 학설을 소개한 뒤 저자 자신이 생각할 때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을 설명한다.

헬골란트에서 베르나 하이젠베르크가 얻은 독창적인 통찰에 따르면,

이 이론은 우리가 보지 않을 때 물질 입자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그 입자를 관찰하면

그 입자를 어떤 지점에서 찾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를 말해줄 뿐이죠.

(pg 55)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기도 한데, 보통의 양자역학 소개서에는 각각의 학설을 소개하고 '아직 공통적으로 합의된 학설은 없다' 정도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을 꺼리는 편인데 이 책은 대놓고 '나는 이 학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라고 똑 부러지게 말해준다.

그래서 저자는 '다세계 해석'과 '숨은 변수 해석' 보다는 '관계론적 관점'을 지지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이후의 논지에서 왜 양자역학을 관계론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대상의 속성이란 그 대상이 다른 대상에 작용하는 방식 바로 그것입니다.

대상 자체는 다른 대상에 대한 상호작용의 네트워크일 뿐이죠.

양자론은 물리적 세계를 확정된 속성을 가진 대상들의 집합으로 보는 대신

관계의 그물망으로 보는 시각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대상은 그 그물망의 매듭입니다.

이제는, 대상이 상호작용하지 않을 때에도 항상 속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불필요하며, 오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될 테니까요.

상호작용이 없으면 속성도 없습니다.

(pg 101)

책의 제목 역시 이러한 양자론 인식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즉 관찰하는 나라는 존재가 없으면 이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별다를 것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나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고, 그런 게 어딨냐고 반박하고 싶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진짜로 그럴지 우리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상대가 죽어도 세상이 돌아갈지는 확인할 수 있지만 내가 죽어도 세상이 돌아갈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는 말이다.)

반대로 세상이 없는 나도 떠올릴 수 없다.

아무 상호작용이 없는 원자 하나가 의미를 갖기 어려운 것처럼 내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공기 안에, 땅 위에, 무엇인가를 섭취하고, 무엇인가와 상호작용하며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모든 것은 관계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 양자론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임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양자역학이라는 어려운 개념을 소개하는 책이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교양서로 나왔기 때문에 지식적인 측면뿐 아니라 과학적인 사고와 태도의 중요성도 꽤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양자역학의 많은 사실들이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직관들에 반하는 내용이고 이러한 것들이 사실임을 밝혀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의문과 탐구가 이어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하고자 했던, 그리고 현상을 더 잘 설명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과학적 사고가 반드시 필요했다.

과학적 사고는 이미 얻은 확실한 사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고이며, 그 힘은 항상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시 시작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더 유효한 설명을 찾기 위해서라면 세상의 질서를 뒤엎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것에 다시 물음을 던지고 모든 것을 다시 뒤집어엎는 능력이죠.

(pg 94-95)

과학은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라,

진리의 담지자 같은 것은 없다는 자각 위에 놓여 있습니다.

배움의 가장 좋은 길은,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발견한 것에 맞춰

자신의 정신적 틀을 재조정하면서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것입니다. - 중략 -

우리의 지식 자체도 수많은 자연적 과정 중의 하나이며

자연의 일부로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pg 164)

저는 인간이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할 때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가,

확실성을 원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에 대한 탐구는 확실성을 먹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성의 근본적인 부재를 먹고 성장합니다.

우리의 무지를 날카롭게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의심에 마음을 열고 더욱 더 잘 배울 수 있습니다.

(pg 182)

분량도 200페이지가 조금 넘어 부담이 없고 문체도 친절하게 존댓말로 되어 있어서 술술 읽히는 맛이 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정보적인 측면에서 다른 양자역학 교양서들보다는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양자역학 관련 책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그나마 거부감 없이 양자역학의 기본 개념들을 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읽은 후 약간 더 어려운 양자역학 책을 더 읽는다면 개념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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