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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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 분야의 책으로 꽤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데다 최근에 읽었던 '자연에 이름 붙이기'라는 책이 이 책을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흥미가 생겨서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 역시 '분류학'과 '분류학자'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저자가 어릴 때부터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분류학자를 동경해왔는데, 그의 삶을 공부하다 보니 과학자와 스텐퍼드 대학의 초대 총장이라는 화려한 업적 뒤에 숨겨진 어두운 측면도 알게 된다.

그의 양면성을 긴 호흡으로 보여주고 그와 자신의 삶을 교차시켜가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다소 철학적인 질문까지도 던져주는 책이다.

저자가 어릴 적 그를 동경하게 된 계기는 그가 30년간 수집한 엄청난 양의 표본들이 지진으로 모두 부서지고 말았을 때,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물고기의 이름을 바늘로 꿰어 붙였다는 일화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일화가 저자를 사로잡은 이유는 과학자였던 저자의 아버지가 어릴 적 저자에게 해준 말 때문이었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pg 54)

과학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진리를 이야기해 준 것에 지나지 않지만 어린아이였던 저자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빠 T발 C야?!)

이후로도 소중했던 연인을 떠나보내는 등 이런저런 굴곡들이 겹치면서 삶의 의미를 잃고 헤매던 중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화에 푹 빠지게 된 것이다.

대체 그는 어떻게 그 엄청난 절망 속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묵묵히 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저자의 탐색은 뜻밖에도 그의 어두운 측면에도 도달하게 된다.

죽을 때까지도 '부적격' 인간들을 색출해 강제로 불임 수술을 하게 하는 등 우생학에 기반한 정책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자신을 초대 총장으로 만들어 준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제인 스텐퍼드의 의문의 죽음에도 관여한 것으로 밝혀진다.

우리가 이 나라의 정체성을 정의할 때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라 간주하는 그 사고방식,

우리가 초등학생에게 나치, 다른 사람들,

나쁜 놈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가르치는 그 악행,

그것을 세계 최초로 국가 정책으로 삼은 나라가 바로 우리였다.

(pg 213)

엄청난 충격을 받은 저자는 반대로 그 정책의 피해자들(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은 여성들)을 찾아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그 인터뷰 끝에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즉 이 세계의 진화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왔고 그중에 하나인 우리도 다양성을 거스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우리 모두가 독특한 하나의 개체로서 전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신념이었다!

(pg 228)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생전에 저지른 수많은 과오가 바로잡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후에도 분에 넘칠 정도의 인정과 존경을 받던 그였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책의 제목인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게 된 이유'에 주목한다.

데이비드가 평생을 걸쳐 이룩한 '물고기'라는 종이 최근 연구에서 '어류'라는 단일 종으로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미 천수와 부귀영화를 누리다 간 사람이지만 그래도 사후에 평생의 업적이 부정당하고 이 책이 출간된 후 나름의 재인식 운동도 일어났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는 그저 최근 연구에 따르면 '어류'라는 분류가 의미를 상실했다 정도로만 요약하고 있는데,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최근에 국내에도 소개된 '자연에 이름 붙이기'라는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

과학적으로 좀 더 논리적인 일은

어류란 내내 우리의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너무도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pg 242)

사실상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

먹이와 천적 정도만 구분할 뿐 그 이상의 구분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경계를 나누고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것을 어떻게든 구분하려 한다.

어쩌면 인간이 이 정도의 문명을 이루고 생태계의 지배적인 종이 된 이유도 이런 '구분하는' 능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구분 능력이 너무도 지나치기 때문에 지금처럼 같은 인간 종 안에서도 서로 차별하고 싸우는 모습이 끊이질 않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 자연이 프린트된 커튼 뒤를 들춰보았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를 보았다.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이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느낌이었다.

(pg 262)

자연과학의 탈을 쓰고는 있지만 저자의 인생 에세이라고도 볼 수 있을 책이다.

저자의 어린 시절 성장 이야기부터 성적 취향에 이르기까지 자기 고백이 생각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지식적인 부분을 나열하는 일반적인 자연과학 책에 비해 가독성도 좋고 다 읽은 후 여운도 많이 남는 것 같았다.

지식적인 측면에서는 생각보다 새로운 정보를 얻는다는 느낌은 크게 없었지만 왜 인기가 있는지, 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사견이지만 정보적인 측면에서는 이전에 읽었던 '자연에 이름 붙이기'가 더 알차게 느껴졌던 것 같아서 이 책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면 그 책도 한번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 서평: https://blog.naver.com/rssun_books/22324086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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