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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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가 쓴 독특한 제목의 에세이다.

저자의 이름은 한 방송에서 처음 접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다소 우습긴 하지만 왕년에 문학소녀였을 것만 같은 비주얼의 여성이 조근조근 과학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런 저자의 성향이 이 책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대체 천문학자가 별을 보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서 온 사람들을 위해 먼저 답부터 언급하자면, 요즘은 전문화된 장비와 관측을 전담하는 인력이 있어서 그들이 생성한 데이터를 천문학자들이 받아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찾는 분석 작업을 주로 한다고 한다.

이처럼 기본적으로는 천문학자가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쓴 에세이집이라 보면 되겠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pg 13)

누구나 그렇듯 저자 역시 여러 역할을 가진다.

과학자 중에서도 천문학자이며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학생들에게는 강의를 지도하는 교수이고 선배 교수들에게는 몇 안 되는 후배 연구원이다.

그저 과학 이야기뿐 아니라 이렇게 여러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소감들이 모두 담겨있다.

특히 두 아이를 키우면서 '연구'라는 시간이 한없이 필요한 직업을 가진 자의 괴로움이 기억에 남는다.

저자는 아이와 일을 양립시키기 어려운 이 체제에 대한 아쉬움과 자신의 경험을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그러니 연구실에 홀로 남아 연구에 집중하는 밤은 정말이지 근사하다.

누군가로부터 전화도 걸려오지 않고, 누군가 찾아오지도 않으며,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재우는 일을 잊어도 되는 밤. - 중략 -

어떤 사람의 직업은 정해진 '시간'을 성실히 채우는 일이고,

또다른 사람의 직업은 어떤 '분량'을 정해진 만큼 혹은 그에 넘치게 해내는 것이라면,

나의 직업은 어떤 주제에 골몰하는 일이다.

(pg 78)

그런가 하면 우리 사회가 과학과 과학자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비판과 성찰도 담겨있다.

무언가 대단한 업적을 이뤄낸 과학자를 칭송하지만 정작 과학이 발달할 토대를 마련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풍토라던가 이제 과학자는 기업에나 존재하는 것 아니냐는 동네 학부모들의 말을 통해 과학자라는 정의가 보다 넓게 정의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구절들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연구들이 대부분 세금으로 이루어지며, 연구결과들이 전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는데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 역시 과학의 발전이 곧 인류의 발전이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흥미로웠다.

사실 일반인들의 눈으로는 대체 무슨 쓸모가 있어서 저런 연구에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규모의 예산이 투입될까 궁금하지만 이러한 활동들이 인류의 세계 인식을 확장해 왔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과학 논문에서는 항상 저자를 '우리'라고 칭한다.

물론 과학 논문은 대부분 여러 공동연구자가 함께 내용을 채워 넣기 때문에,

우리라고 쓰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학위논문이다.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의 저자는 당사자 한 명인데,

그래도 논물을 쓰는 저자를 자칭할 때 '우리'라고 하는 것이다. - 중략 -

연구는 내가 인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pg 265)

과학 지식을 곁들인 저자의 짧은 인생 에세이 묶음이기 때문에 공통된 주제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어떤 주제를 다루더라도 기본적으로 따뜻한 사람이구나 싶은 것이 글을 통해 잘 느껴진다.

과학자라고 하면 냉철하고 차가운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데 저자의 글에서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저 광활하기만 한 저 우주조차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느낌이었다.

뭐라도 되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고,

그리고 뭐라도 하면, 뭐라도 된다고, 삶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pg 270)

과학자가 쓴 에세이는 김상욱 교수의 책을 읽어본 경험이 있는데 물리와 천문학으로 다루는 학문은 다르지만 글의 느낌은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과학이 인문학과 예술,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 분야와 결합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과 동떨어진 그 무언가가 아니라 일생에 걸쳐 가깝게 배우고 익힐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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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이순신 - 명량에서 노량까지, 개정판
양승복 글, 박종호 그림 / 삼성출판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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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뽕 콘텐츠에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들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백 원짜리의 사용처가 마땅치 않은 요즘, 10만 원 권이 나온다면 마땅히 급을 격상시켜 드려야 하지 않을까 싶은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다룬 만화가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다.

만화도 독자층이 꽤나 세부적으로 나뉠 수 있을 텐데 본 작품은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면 충분히 읽을 수 있을 수준이라 생각된다.

물론 성인인 내가 읽기에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그림의 수준도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알리기 위한 책이니 당연히 잔인하게 표현되어 있지는 않다.

그래도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다루면서 전쟁을 묘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니 너무 어린 초등학교 저학년이라면 다소 잔인하게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만화로 되어 있지만 320페이지 정도로 꽤 두께감이 있고 내용도 이순신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다루면서 굵직한 사건들도 빼놓지 않고 있다.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이순신에게 어떤 피해를 가져다주었는지도 언급되고 있고, 이순신을 시기한 다른 장수들과 고위직들이 보여주는 비겁한 행태도 잘 묘사되었다.

특히 선조의 어처구니없는 사리판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자 했던 이순신 장군의 행보가 잘 대비되어 잔잔한 감동을 준다.

물론 한산도 대첩 등 굵직한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도 부족함 없이 표현되어 만족스러웠다.

만화로 표현된 거북선의 웅장한 모습과 학익진의 전술적 아름다움, 용맹한 우리 선조들의 모습도 꽤 보기 좋았다.

다만 만화적인 표현이기는 하나, 아군의 미화 대비 적군의 열화가 너무 극명해서 마치 다른 종(種) 간의 싸움처럼 느껴지는 부분은 다소 아쉬웠다.

왜군을 꼭 이순신 장군 급으로 멋지게 그릴 필요는 없었겠으나, 적어도 같은 세계관 안의 사람인 것처럼은 그려줬으면 어땠을까 싶다.

꽤 오래된 작품인데 영화 '노량'의 개봉 시기에 맞춰 재출간이 된 모양이다.

영화도 12세 관람가인 모양인데 영화를 볼 수 있을 나이대의 학생이라면 영화 관람 전후에 이 책을 접하면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이 더 피부에 와닿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오랜만에 역사 만화로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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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1학년 기적의 첫 독서법
오현선 지음 / 체인지업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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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적인 시간을 분절해 인식하는 인간의 특성상 특정 나이가 되면 갑자기 느낌이 달라질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내년이 딱 그런 시기인데, 내 나이 앞자리가 4로 바뀌기도 하고 아이가 처음 학교에 가게 되는 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저 천방지축인 아이를 보면 내년에 학교 가서도 잘 지낼 수 있을지 부모로서 걱정이 되기 마련이다.

특히 학업 걱정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문해력이 학업 성취와 상관관계가 높기 때문에 책을 많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모든 부모가 가진 바람일 것이다.

다행히 우리 딸은 책을 보는 행위 자체는 좋아하는 편이라 하루 독서 시간이 꽤 된다.

하지만 읽는 책의 종류가 학습만화 쪽으로 치중되어 있고 글이 많거나 글만으로 된 책은 아직 '어른 책'으로 인식되어 있어서 읽으려고 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그거라도 보는 게 어디냐고 할 부모들이 많겠지만 이미 형성된 습관이 있기 때문에 독서의 수준을 높여준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보다 전문적인 도움을 받고 싶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저자는 문해력이 학업에 중요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위해 별도의 문제집을 푸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취미 생활의 일환으로 독서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독서를 많이 하는 것과 문제를 잘 푸는 것은 다른 능력이기 때문에 책을 많이 읽는 것이 곧 높은 국어 성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문제를 잘 푸는 연습을 한다고 해서 깊이 있는 독서가 되는 것은 아니기에 일단 독서 습관을 먼저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책상에 바르게 앉아 문제에 집중할 때에만 읽기 실력이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뒹굴뒹굴 누워서 놀 때처럼 즐겁게 책을 읽을 때 읽기 실력이 성장합니다.

(pg 30)

저자는 특히 특정한 독서법을 습득하기 위한 처방은 지양하고 있다.

책에 따라 독서법을 스스로 달리할 수 있는 능동적인 독자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보는 것이다.

성인들 역시 책을 읽을 때 모든 책을 속독하거나 모든 책을 정독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지도 아니가 책을 좋아하다 보면 자연히 배우게 된다.

읽기 지도를 위해 어른이 가끔 정독과 다독을 시도하거나 권유할 순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독자 스스로 상황에 맞게 읽는 방법을 적용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자발적으로 읽어야 하고, 그래야 능동적으로 읽습니다.

섣불리 어떤 독서법을 강조하기보다 우선 스스로 읽을 수 있는 아이로 키워주세요.

(pg 34)

이 책을 읽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부모가 함께 할 수 있는 책놀이 방법을 상세히 알려준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루에 하나씩 해보더라도 두 달이 넘게 걸리는 66개가 수록되어 있고 난이도도 '등장인물 소개하기'처럼 단순한 것부터 '인권 선언문 쓰기'처럼 성인도 쉽지 않아 보이는 주제까지 다양하다.

물론 초등학생 수준에 맞는 문장을 떠올려보라는 뜻이지 그럴듯한 선언문을 쓰라는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책 후미에는 각 주제별로 저자가 추천하는 도서의 목록도 수록되어 있고 읽은 책에 간단히 별점을 줄 수 있는 독서 캘린더 양식도 있다.

도구는 충분히 주어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이를 활용할 부모의 의지뿐이다.

나름 독서 블로거인지라 집에서도 최소 1-2시간 정도는 책을 읽으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아이도 자연스럽게 저녁 식사 후에는 책 읽는 시간을 갖고 있다.

책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에는 충분한 성공을 거둔 듯 하니 저자가 추천해준 책들과 양식들로 독서 수준을 좀 더 높여줄 궁리를 해야 할 것 같다.

후미에 양식과 추천도서 목록을 제외하면 원론적인 부분은 150페이지 정도로 읽는데 부담을 느낄 분량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에게 독서를 가르치고 싶은 부모라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겠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읽고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와 얼마나 실제로 할 수 있을지에 따라 이 책의 효과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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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
스기타 슌스케 지음, 명다인 옮김 / 또다른우주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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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어느 방구석 인셀이 또 페미니즘 씹으려나 보다' 싶은 제목인데 의외로 그런 내용을 다루고 있지 않다길래 어떤 이야기를 펼칠지 궁금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일단 저자의 문제의식이 '모든' 남성이 힘들다거나 '남성도 여성만큼 힘들다'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 '약자 남성'이라는 계층이 분명히 존재한다며 이를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약자 남성'의 '약함'(취약성)은 여성, 성소수자,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안티'가 아니라 주변성과 비정규성을 의미한다. - 중략 -

정규직 고용, 표준적인 가족상, 정해진 궤도로 운행하는 인생, '남자다움',

지배적인 남성성 등의 '정규성=정답'에서 탈락하고 이탈한 다수자 남성 중 일부.

이들이 약자 남성이다.

(pg 72)

저자는 분명 남성이 여성에 비해 사회 진출에 유리한 것이 통념적으로나 데이터로 볼 때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경쟁에서 뒤처진 남성들은 힘듦을 인정받기도 어렵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서도 소위 잘나가지 못하는 남성들은 자신의 노력 부족이나 환경 부족을 탓하는 것 이외의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소수자들에 비하면 형편이 낫다, 더 우대받고 있다는 우월과 비교의 눈으로

남성 문제를 논하지 않았으면 한다. 구조적인 비대칭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누가 누가 더 힘든지 비교하고 경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불행한 건 불행한 것이고 괴로운 건 괴로운 것이다.

이런 단순한 인식이 '약자 남성' 문제의 근간에 있다.

(pg 34)

게다가 이미 전통적인 '가부장적 남성상'은 이미 해체된 지 오래인데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남성상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가부장적이건 가정적이건 관계없이 아직 남성에게는 경제력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인식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 인식 때문에 충분한 경제력(물론 경제력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여야 충분한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을 갖추지 못한 남성들은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사회 역시 그런 남성들을 조롱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장애인도, 소수민족도, 성적소수자도, 심지어는 여성도 아니면서 경제력이 없다니'라는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성차별과 인종차별은 용인할 수 없으면서,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빈곤과 비참한 삶은

자기책임으로 치부하고 그들을 차별 대상이자 공포와 모멸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노동자계급을 '야생화된 하류계급'으로 보는 것이다.

(pg 69)

문제는 이러한 절망이 쌓여 가끔씩 큰 사회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저자는 미국에서 일어난 여러 총기난사 사건이나 일본의 아베 총리 살해 사건 등을 예로 들고 있지만 국내에서도 변변치 못한 직업을 가진 남성들이 자신보다 신체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사태가 종종 발생한다.

절대적인 기준에서의 '약함'이 있다.

사실 '남성'이라는 속성도 부차적이어서 철저히 개인적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남자'로 태어난 이상, 남성이라는 속성에서

해방돼 빠져나오는 일도 용인되지 않는다.

(pg 34)

당연히 저자가 이러한 폭력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될 때까지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이들을 외면해왔다는 뜻이며 이에 대한 처방이 없을 경우 이러한 일들이 계속 발생하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사회의 양극화 심화 역시 비단 우리 사회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더 심각해질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언제까지고 이러한 일들이 '능력 없는 개인의 일탈'로 정의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격차와 사회적 배제의 시대에서

초격차 양극화와 무관용의 시대로 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탈감은 '인간'의 '존엄' 문제와 연결된다.

우리는 국민, 시민, 노동자이기 전에 응당 한 명의 '인간'이어야 하나,

이 '인간의 존엄'이 박탈당하고 있다.

(pg 42)

그리고 근본적으로 '남성'이라는 속성 자체가 약함의 개념을 포함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같은 '약자 남성'들은 서로 연대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약자 남성'이라는 개념을 차근차근 만들어 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소수자는 차별당하는 속성을 무기로 내세워 정체성 정치로 전환할 수도 있다.

부당하게 억압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처지가 더 낫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소수자 속성이 없는 '남성'들은 정치성을 띨 수 없다.

연대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개인이 충분히 성찰할 여유도 없다.

(pg 57)

그렇다면 우리는 '약자 남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것들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먼저 '약자 남성'이 엄연히 존재하며 이들을 위한 새로운 가치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천상'과 '최하층'을 이어주는 근본적인 '사상'을 찾아내지 않는 한,

약자 남성과 인셀이 일으키는 반란과 저항은 현대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단순한 '폭발'과 '경련'에 지나지 않는다.

(pg 138)

또한 절망한 '약자 남성'들이 온라인을 기반으로 주도하고 있는 '정규직 대 비정규직', '남성 대 페미니스트 여성' 등의 갈등을 가짜 대립으로 보고 보다 본질적인 원인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갈등이 오히려 문제의 진짜 원인을 가리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잘못 설정된 적을 겨눌 힘을 아껴 오히려 진짜 원인인 이 세상에 화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적'을 오인해 진흙탕 싸움처럼 서로를 미워하지 말고

이 세상의 시스템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

인셀 남성들은 인생의 굴욕에서 복받쳐 오르는 '적'에 대한 증오를,

자신과 적을 분열시키고 대립을 강요하는 '세계(시스템)'를 향한 분노로 바꿔야 한다.

용기 내어 싸우기로 결단해야 한다.

증오하지 말고 분노하라. 이 사회에 분노하라.

(pg 146)

물론 모든 '약자 남성'이 사회운동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고 격려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마저도 쉽지 않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내는 투쟁이라도 이어가야 한다.

절망에 빠져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지기보다는 계속 살아내어 자신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사회에 계속 인지시켜 주어야 한다.

저자 역시 그저 계속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존엄하다고 역설한다.

한쪽에는 이 쓸모없는 인생을 끝까지 살아내고,

계속해서 '노동'하는 '그냥 인생'을 완수하겠다는 존엄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가짜 적에 대한 증오가 아닌,

쓸모없음을 강요하는 사회를 향한 분노가 있고,

사회 변혁으로 가는 실천이 있다.

(pg 217)

굉장히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책 자체는 그리 두껍지도 않고 문체도 쉬워서 금방 읽을 수 있었다.

당연히 일본 저자라 일본의 사례가 많기는 하나, 사례들의 양상이 우리나라와 그다지 다를 바 없기 때문에 공감도 잘 되는 편이었다.

다만 저자가 전문적인 학자는 아니기 때문에 논지가 약간 중구난방으로 전개된다는 느낌은 있다.

이 책이 학술서가 아닌 에세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여하간 쉽게 입에 올리기도, 또 일관된 논리로 정리하기도 쉽지 않은 주제인데 이 부분에 관해 쭉 글을 써온 저자라 그런지 깊은 고민의 흔적이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저자가 이 주제에 관해 여러 책을 써 온 것으로 보이는데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된 것은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다른 저서에서도 어떤 논지를 펴는지 궁금한데 앞으로도 국내에 계속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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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하 인간 - 노력하고 성장해서 성공해도 불행한
제이미 배런 지음, 박다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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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이 과부하는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특히 선진국 축에서도 노동시간이 가장 긴 편에 속하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과부하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끝도 없는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좋은 조언을 해주지 않을까 싶어 읽게 된 책이다.

저자는 30대 이전까지 자신을 좀먹던 타인과의 비교, 자기 비하, 자괴감, 수치심들을 떨쳐 버리고 진정한 자신을 찾아 나간 자신의 여정을 독자들에게 풀어내고 있다.

이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성공적인 삶'이라는 목표가 사실은 사회가 주입한 가치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모두가 최고의 대학, 최고의 직업, 높은 연봉, 멋진 몸매,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싶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그 기준점이 타인과의 비교와 경제적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에서 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 중 몇 가지는, 사실 우리 인생에 별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한 것일 때가 많다.

이 사실을 인정하려면 상당한 자기 탐구와 솔직함이 필요하다. - 중략 -

진짜로 의미 있는 건, 당신이 어떻게 느끼느냐다.

당신이 당신의 삶을 어떻게 느끼는가다.

(pg 57)

요즘 워낙 사회적으로 자리 잡는 시기가 늦춰져서 요즘 서른이면 아직도 어리다는 시각이 대세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도 서른 즈음이면 적어도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시작은 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자연스레 생기게 마련이다.

미국에서 자란 저자 역시 비슷한 고민을 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저자는 인생이라는 것이 빨리 도달하면 끝나는 결승점 같은 개념이 아니라 각자의 속도로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30대가 되기 전에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려고 애쓰는 사람에겐 자신이 정말로,

진정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뭘 원하는지 멈춰서 자문할 겨를이 없다.

남에게 질세라 사회가 그린 지도를 따라가느라 바쁘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하루는 눈을 떴을 때 자기 인생이 이상하게도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pg 90-91)

이러한 점을 자각했다면 다음 단계로 자신을 가혹하게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하고 아껴줄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시도해 보라고 말한다.

먼저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을 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일기를 쓴다던가, 작은 목표들을 세워 성취감을 느낀다던가 하는 활동들을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자신만을 위해서' 해보라고 권하고 있다.

당신의 가장 자유로운 삶은 남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 가장 번쩍거리고 그럴듯해 보이는 삶이 아니다.

당신에게 맞는 삶은 남에게 보이는 이미지가 아니다.

당신에게 맞는 삶은 당신이 의식한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pg 191)

물론 효과가 있을 법 하고 다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렇게 아등바등 애쓰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저자의 충고가 지구 반대편의 무한 경쟁 사회 속 젊은이들에게도 통할까 싶은 것이 솔직한 감상이다.

시간을 쪼개 공부하고 자격증 따고 스펙을 쌓아도 자기 몸 하나 경제적으로 독립시키기 어려운 것이 현실인데 이런 상황에 자신이 진짜 원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일단 한번 해보라'라고 말하는 저자의 충고가 과연 와닿을까 싶다.

현대인의 과부하는 상당 부분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에서 기인하는 바가 큰데 이런 부분에 대한 통찰 없이 개인의 인식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남았다.

다만 이러한 아쉬움의 근원은 국문 제목 탓도 크다고 본다.

책의 원제는 'Radically content'로 직역하면 '근본적으로 만족스러운'이라는 뜻이며 부제로 '끊임없이 불만족스러운 세상에서 만족스럽게 살아가기' 정도의 표현이 붙어있다.

'과부하 인간(노력하고 성장해서 성공해도 불행한)'이라 붙은 국문 제목과는 내용의 결이 좀 다르다.

다 읽은 후 생각해 보니 확실히 원제가 책 내용을 더 잘 요약하고 있는 것 같다.

저자가 개인의 소진을 막기 위해 강조한 것들이 모두 개인적인 사고와 행동의 변화이고 그러한 변화를 통해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사회적인 접근을 기대하게 만든 것이 저자의 탓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신이 당신의 진실을 알길 바란다.

오롯이 당신만의 것인 삶을 선택하고, 만들고, 가꿔가길 바란다. - 중략 -

누구에게도, 그 무엇도 증명할 필요 없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을 필요도 없다.

당신은 그저 당신답게 살면 된다.

멋지게, 행복하게, 만족스럽게.

(pg 244)

물론 세상을 바꾸는 것은 말도 안 되게 어렵고 그나마 가능성 있는 것이 자신을 바꾸는 것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접근법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우리가 매일을 힘겹게 살아가는 이유의 상당 부분이 타인과의 비교에서 온 열등감의 발현일 수 있다는 통찰 역시 현대인에게 굉장히 큰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직장 후배들이 나보다 더 크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며 '아.. 빨리 차 바꾸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막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내 삶에 과연 큰 차가 정말 필요한 걸까, 아니면 그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사고 싶은 걸까'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효과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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