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 원자에서 인간까지
김상욱 지음 / 바다출판사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항상 '친절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물리학자의 최신작이다.

저자의 책을 몇 권 읽었었는데 서평 작성에 실패했던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인 '양자 공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물리학자가 바라본 세상 이야기라서 그렇게 무겁지 않게 느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 역시 그렇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접했는데 생각보다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단 '과학 공부'나 '떨림과 울림'같은 이전의 에세이들과는 책의 기본 구상 자체가 다르다.

물리학자로서 "인류의 근원을 빅뱅부터 지금까지 한번 정리해 보겠다"라는 야심찬 포부를 가지고 인류가 발견한 과학적 사실들을 최대한 교양서 수준에 맞게 정리한 책이라고 보면 되겠다.

양자역학 전문가인 그의 인간 이야기는 당연히 원자로부터 출발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원자들이 지배한다.

지구상 생물은 포도당 분자를 산화시켜

이산화탄소와 물로 바꾸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이는 탄소, 산소, 수소 원자가 배열을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

사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처럼 원자들이 배열을 바꾸는 사건이다.

이때 원자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pg 158)

물론 지금은 원자를 구성하는 쿼크, 힉스 보손 등의 기본 입자도 많은 부분이 밝혀져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도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나 어찌 됐든 '이 세상은 원자로 되어 있다'라는 명제는 그럭저럭 참이라 할 수 있다고 하니, 이 책도 원자에서 출발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사실 기본 입자 부분은 용어도 생소하고 이해도 잘 안됐다.)

수소와 산소가 만나 생긴 물은 수소나 산소와는 완전히 다른 것처럼, 원자들이 모이면 분자가 되고 분자가 되면 분자만의 특징이 나타난다.

그리고 분자가 커지면서부터는 물리가 아닌 화학의 영역으로, 분자들이 모여 세포를 이루면서부터는 생물의 영역으로 전환된다.

생명도 어찌 됐든 원자로 되어 있으니 물리 법칙에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물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환원론적 논리로 독자들을 이끌어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물리로 밝혀낸 부분은 아직도 매우 제한적이며 원자에서 분자로, 분자에서 단세포로,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층위가 올라갈 때 창발적인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을 알아냈지만 이 원자들을 통에 넣어 흔든다고 언젠가는 생명체를, 그것도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생명도 물리 법칙에 따라 작동된다.

하지만 생명을 설명하려면 우리는 원자의 층위에서 한 단계 올라가야 한다.

생명을 원자의 집단이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생명을 단순히 원자의 집단으로 환원하기는 힘들다.

(pg 261)

게다가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생물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뿐이다.

이 우주에 우리와 같은 탄소 기반의 생명체만이 존재할 수 있는지도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어찌 됐든 지금까지 우리가 밝혀낸 생명의 실체는 엄청난 시간이 쌓아온 우연의 결과물이라는 것뿐이다.

만약 외계 생명체의 화학 체계가 지구의 생명과 유사하다면

생명의 보편 원리가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편 생명에 대한 이론을 구축해야 한다.

지구 밖에 생명체가 없다는 것은 우주 전체를 샅샅이 확인할 때까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외계에 생명체가 없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그냥 엄청난 우연의 산물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pg 262)

하지만 우리가 우연의 산물이라고 해서 우리의 삶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연의 산물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필연적인 것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물체를 떨어뜨리면 땅으로 낙하한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

감동은커녕 여기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사실 물리학은 필연을 다룬다. - 중략 -

다시 말하지만 필연에 의미는 없다. 그냥 그런 것이다.

의미는 우연, 그러니까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과학이 아닌 것에서 나온다.

(pg 310)

논리로 승부하는 과학자의 책답게 책 후미에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한 번 더 정리해 주고 있어서 읽은 내용을 다시 되새기기에 좋았다.

이 책을 한 문단으로 요약한다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싶은 문단도 저자가 직접 후미에 기술해 두었다.

세상은 기본 입자에서 원자, 분자, 생물, 지구, 태양, 우주로 이어지는

다양한 층위로 구성된다.

각 층위는 자기만의 창발된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하나의 층위를 그것을 구성하는 하위 층위의 특성으로 쉽게 환원할 수 없다.

각 층위의 개별 특성을 알고, 이웃한 층위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파악하고,

전체를 조망할 때에만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pg 396)

저자의 전공 영역이 아닌 부분의 설명이 꽤 많아서 단순 지식 전달 부분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감성 넘치는 문장들이 돋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아래와 같은 문장들은 '역시'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부분들이었다.

우리 몸의 원자는 고양이에서 왔을 수도, 태양에서 왔을 수도 있다.

우리가 죽으면 원자로 산산이 나뉘어져 나무가 될 수도 있고 산이 될 수도 있다.

'나'라는 원자들의 '집합'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겠지만,

나를 이루던 원자들은 다른 '집합'의 부분이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주의 일부가 되어 영원불멸한다.

(pg 48)

더욱더 나쁜 것은 인간의 활동으로 지구의 평균 온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기후 변화는 생태계를 훨씬 극적으로 교란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생물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것이다.

하지만 대멸종이 일어날 때, 최상위 포식자는 언제나 멸종했다.

참고로 지금 최상위 포식자는 인간이다.

(pg 304)

전반적으로 저자의 기존 에세이들에 비하면 다소 이론적이라 진도가 훅훅 나가는 느낌은 덜하지만 물리나 양자역학에 국한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난이도가 아주 높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인간이 탄생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를 원자 수준에서 출발해 단세포를 거쳐 척추동물을 지나 인류에 이르기까지를 책 한 권으로 정리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과학을 일반인들이 조금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책들을 많이 내는 저자인지라 다음에는 어떤 주제로 대중들을 찾아올지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우 작은 세계에서 발견한 뜻밖의 생물학 - 생명과학의 최전선에서 풀어가는 삶과 죽음의 비밀 서가명강 시리즈 35
이준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소한 분야라도 어렵지 않게 맛을 보여주는 서가명강 시리즈의 생물학 책이다.

저자는 지난 30년간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생물을 연구해온 생물학자다.

선충이라는 이름답게 길이 1mm 정도의 매우 작은 지렁이처럼 생겼는데 이 생물의 매력이 무엇이길래 그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한 것일까?

물론 그 생물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을 좀 더 잘 알아내고 싶다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쥐나 초파리 같은 모델생물을 이용한다.

예쁜꼬마선충 역시 이러한 모델생물의 하나인 것이다.

모델생물이 되기 위해서는 생애 주기가 짧고 사육하는데 비용이 저렴해야 하며 인간과의 유사성이 충분해야 한다.

그나마 척추동물인 쥐는 이해가 되지만 선충이 어떻게 인간과 유사할 수 있는지 의아할 텐데 놀랍게도 이 생물의 유전자가 인간과 절반 이상 유사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생물을 통해 발견한 것들을 인간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래 그림이 잘 보여주듯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모두 같은 시조를 가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저자는 생물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특히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와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밝혀내는 것이 가장 큰 두 축이다.

이는 모든 과학 분야에 일관적으로 적용해도 통용되는 내용일 것 같다.

그런 다음 어떤 생물의 유전적 작용을 연구하려면 끊임없이 돌연변이를 찾아내야 한다.

저자의 경우 한 연구를 할 때 적절한 돌연변이를 찾아낼 때까지 예쁜꼬마선충을 약 1억 마리 정도 들여다본다고 한다.

한 마리를 관찰할 때 1초씩만 걸린다고 쳐도 어마어마한 시간을 쏟아야 하는 일일 것이다.

아무런 의미 없이 일어나는 생명현상은 없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새로운 생명현상을 마주했을 때

'이런 현상이 어떻게 일어났지? 왜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될 것이다.

(pg 54-55)

이렇게 적합한 질문을 찾아낼 수 있는 호기심과 수많은 개체를 직접 살펴볼 끈기가 있다면 저자는 생물학을 공부할 충분한 자질이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무척 쉬운 일인 것처럼 썼지만 누구나 갖추기는 힘든 재능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모델생물을 통해 이런저런 생명의 신비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여러 유전자 조작 기술을 활용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생물의 유전자를 조작한다는 행위 자체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조작'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부정적인 뉘앙스 탓도 있을 것이고 유전자는 변형해서는 안 될 그 어떤 것이라는 인식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굳이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지 않더라도 변이를 쌓는다는 측면에서 유전자 조작은 종 다양성에 기여하는 일이라 말한다.

사실 자연 상태에서도 변이는 늘 일어나고 있고 변이가 없었다면 지구상에 이렇게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었다.

정리하자면 유전물질이 가진 본연의 특성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복제가 잘 되는데,

아주 드물게 그 특성에 실수가 발생하면 염기서열이 바뀌어 돌연변이가 나타난다.

그런데 그 유전물질이 가진 엄청나게 낮은 확률의 실수 가능성이 바로 진화의 동력이 된다.

(pg 170)

시리즈 특성상 200페이지 정도로 두께도 얇고 설명도 매우 친절해 읽기가 어려운 책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유전과 진화를 연구하는 생물학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맛보기에는 충분한 책이었다.

이런 특징들 때문에 생소한 분야로 독서의 폭을 넓히기에 딱 좋은 시리즈인지라 앞으로도 어떤 주제가 나올지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냥이 끝나고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품은 몰라도 이름을 모르기는 쉽지 않은 러시아의 대문호가 쓴 '유일한 장편 범죄 소설'이라는 소개가 붙어 있다.

나름 독서가 취미라는 사람이 이런 문구에 휘둘리지 않을 여력은 없었기에 얼른 읽어보게 되었다.

280여 페이지로 그리 두껍지는 않지만 다 읽은 소감은 다소 복잡하다.

형식적으로는 작가 지망생이자 예비 판사인 한 남성이 자신이 쓴 소설이라며 한 편집장에게 작품을 하나 건네고 이 작품이 책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처음과 끝만 그 작가 지망생과 편집자가 맡고 있는 액자식 구성을 가지고 있다.

내용적으로는 140여 년 전 러시아를 배경으로 주색에 빠진 귀족들의 방탕한 생활 중에 석연치 않은 치정 살인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는 구조이다.

일단 본 작품이 140여 년 전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요즘 범죄 소설들처럼 간결한 맛을 추구하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고전 소설을 많이 접해보지 않았다면 장황한 문장들과 전개에 당황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범죄 소설임을 감안하고 스토리 전개로만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고 범인이 누구인지도 뻔히 보이는데 정작 사건이 일어나질 않으니 초반의 몰입도는 아무래도 덜한 편이다.

개인적으로도 책의 70%를 읽을 때까지 '대체 사람은 언제 죽는 걸까?'라는 질문을 가슴에 품은 채로 읽었다.

실제로 본 작품에서 살인이 두 번 일어나는데, 그중 첫 번째 살인의 등장 시점이 전체 280페이지 중 211페이지다.

즉, 그전까지는 그 살인이 발생하게 된 배경과 인물들의 소개라는 의미다.

물론 그 안에 당시 러시아의 계급 사회와 술독에 빠져사는 공직인들, 타인의 아내도 공공연히 탐하는 문란한 성의식까지 사회의 여러 문제적인 측면을 자세히 보여준다.

이러한 부분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전의 내용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후로 이어지는 사건의 에피소드와 나름의 반전을 생각한 결말까지가 전체 분량 대비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적어서 뭔가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후다닥 결말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흐름이 당시 문학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현대 소설에만 익숙한 독자 입장에서는 되려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솔직히 대입 연극 실기에 저자의 작품이 단골로 올라온다는 것 정도나 알았지 작품을 진지하게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저자가 주로 희곡, 단편소설로 유명한데 작가 생활을 순수하게 생계를 위해 시작했던 터라 작품의 수도 많고 시도해 본 작품의 유형도 다양하다고 한다.

이 작품 역시 저자의 다양한 시도 중 하나였고 저자 자신은 그리 높이 평가하는 작품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영화화가 될 정도로 대중적으로는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치정 살인을 주제로 하고 있고 당시 사회 지배계층의 타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부분들이 많아서 대리만족을 느끼기에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혼의 눈이 멀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이 백작의 회색 대리석 상판 하나하나,

그림들 하나하나, 그리고 백작의 정원 어두운 구석구석 서려 있는 사람들의 땀과 눈물,

굳은살 박인 손을 보지 못한다. - 중략 -

그런데 지금 결혼식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제일 가혹한 진실조차도 서슴치 않고 말하는 부유하고 독립적인 사람들 중에서

백작의 그 잘난 미소가 어리석고 부적절하다고 말해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pg 134-135)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본래 좋아하던 독자라면 당연히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단순히 범죄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간만에 고전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 작품이 오히려 새로운 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이 괴로울 땐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 일상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발견한 사는 게 재밌어지는 가장 신박한 방법
박치욱 지음 / 웨일북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짝 낚시성이 엿보이는 제목으로 미국의 한 대학에서 생화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쓴 책이다.

특이하게도 트위터를 통한 소통에 상당히 적극적이라는 소개가 있어 과학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것에도 능할 것 같아 읽어보게 되었다.

책은 총 7개의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음식, 언어, 자연, 예술, 사회, 퍼즐, 인체로 구분되어 있는데 각각의 키워드들이 무슨 연관성이 있거나 논리적인 이유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저 저자가 순수한 호기심에서 출발해 '덕질'하듯 공부했던 분야들을 소개할 뿐이다.

저자는 이렇게 특정한 방향성이 없어 보이는 이런저런 분야를 조금씩 공부하다 보면 그 공부가 의도치 않은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가족을 위해 시작했던 음식의 레시피가 화학 실험의 프로토콜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충동적으로 공부해 본 이탈리아어가 히브리어, 그리스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언어를 공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특히 이렇게 '재미 삼아' 공부를 할 때 공부한 내용을 잊어버릴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조언이 기억에 남는다.

개인적으로도 올해만 약 100여권의 책을 읽었는데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 내용을 다 기억하기는 하냐고 묻곤 한다.

영화를 100편 본 사람도 그 내용을 다 기억하기 어려울 텐데 책 100권을 기억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콩나물시루에 물 붓듯 개중 남는 것이 있겠지 하며 읽어갈 뿐이다.

이 책에서도 비슷한 논지로 공부에 부담을 갖지 말라고 당부한다.

다들 그동안 본 소설이나 영화 내용을 대부분 잊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잊어서 섭섭하다고, 괜히 봤다고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볼 때는 재미있고 보고 나서는 조금이라도 남은 게 있을 테니 시간 낭비가 아니다.

(pg 57)

저자는 이처럼 공부라는 것이 꼭 학위를 따야만 한다거나 특정 정보를 외우고 시험을 준비하려는 공부가 아니어도 좋다고 말한다.

그저 자신이 '꽂히는' 어떤 분야가 있을 때 이를 자기 나름의 속도로 계속 파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런 공부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몰입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이렇게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면 의도치 않게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융복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자신을 구속하는 고정관념을 넘어야 하고, 문제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찾아야 하고,

그 과정의 기발함에 가치를 둔다.

결국 미술이든 과학이든 전적으로 인간의 창의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가는

분야라는 접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pg 153)

서두에서 제목에 낚시성이 엿보인다고 농담조로 언급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자가 전혀 괴로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으니 괴로워할 겨를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 더 솔직한 감상일 것이다.

분량이 그리 두껍지 않고 기본적으로 SNS를 통해 대중들과 소통해온 저자인지라 쉽게 읽히는 맛이 좋다.

그러면서도 저자의 특급 김치 레시피에서부터 mRNA 백신의 작동 방식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흥미를 가졌던 여러 분야의 잡지식을 재미나게 얻을 수 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책들이 특성상 다 읽은 후 기억에 남는 것이 생각보다 적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저자에 따르면 망각의 과정도 학습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르헨티나 작가의 작품으로 수상 경력이 화려하기도 하고 범죄소설을 좋아하기도 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감상에 앞서 상당한 재미를 주는 작품이라는 점을 먼저 언급하고 싶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인데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되는 매력이 있었다.

작품은 30년 전에 아나라는 십 대 여성이 토막 난 후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된 사건으로 시작된다.

당시 경찰 조사로는 성폭행 후 살해로 보인다며 잠정 결론이 나지만 범인은 찾지 못한 채 미결로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린다.

아나의 집안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아나의 둘째 언니인 리아는 무신론자의 길을 걷기로 하고 집을 나가 버린다.

그나마 자신을 이해하던 아버지와도 편지만 주고받던 리아에게 어느 날 마테오라는 조카가 나타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사건을 남몰래 조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로는 사건의 진상이 각기 다른 인물들의 관점에서 조금씩 밝혀지는 구조로 전개된다.

이러한 서술 방식 때문에 목차를 보면 대충 누가 범인인지 예상할 수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작품의 재미가 반감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그러한 행동 이면에 숨겨진 동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기에 종교적 광신이 큰 역할을 차지한다.

작품 전반에 걸쳐 종교라는 것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얼마나 옭아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려서부터 세뇌되듯 주입된 종교관이 갖는 무서움도, 가족과 종교인들이 보여주는 가스라이팅의 전형적인 모습도 잘 묘사하고 있다.

사건의 진상이 모두 밝혀진 후에는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쓰레기 같은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종교의 이름을 빌리고는 있지만 뼈 속까지 이기적이었던 이 인물들은 결국 세속적인 측면에서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하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이 종교의 힘이라면 힘일 수도 있겠다 싶다.

나 역시도 무신론자인지라 '고해를 통한 용서'라는 형식적인 행위로 죄의식을 씻고 태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물들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믿음이라는 건 순진한 속임수일지도 몰라.

적어도 여러 가지 소박한 속임수에 의해 지탱되는 삶에서는 말이다.

(pg 418)

범죄소설 부류에 속하지만 법적으로 범죄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가 없었다는 점도 특이한 지점이다.

그래서 결국 누구도 처벌받지 않고 끝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이 찜찜하게 끝나는 작품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결국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끝이 나고, 마지막에는 감동적인 여운도 남는 좋은 결말이었다고 생각한다.

너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빈다.

그리고 나의 귀염둥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나도.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무신론자인 너희의 생각이

옳았음이 증명되는 셈이겠지.

그렇다면 지금 이 삶이 끝난 뒤에는 아쉽지만 아무것도 없을 거야.

너희를 사랑한다, 언제나처럼.

(pg 419)

출판사의 책 소개가 다소 거창한 느낌이었는데 그것이 그저 상투적인 마케팅 용어들이 아니었음을 책을 다 읽은 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이 올해 읽을 마지막 소설이 될 것 같은데 한 해의 마무리로써도 더없이 좋은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