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이 끝나고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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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몰라도 이름을 모르기는 쉽지 않은 러시아의 대문호가 쓴 '유일한 장편 범죄 소설'이라는 소개가 붙어 있다.

나름 독서가 취미라는 사람이 이런 문구에 휘둘리지 않을 여력은 없었기에 얼른 읽어보게 되었다.

280여 페이지로 그리 두껍지는 않지만 다 읽은 소감은 다소 복잡하다.

형식적으로는 작가 지망생이자 예비 판사인 한 남성이 자신이 쓴 소설이라며 한 편집장에게 작품을 하나 건네고 이 작품이 책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처음과 끝만 그 작가 지망생과 편집자가 맡고 있는 액자식 구성을 가지고 있다.

내용적으로는 140여 년 전 러시아를 배경으로 주색에 빠진 귀족들의 방탕한 생활 중에 석연치 않은 치정 살인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는 구조이다.

일단 본 작품이 140여 년 전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요즘 범죄 소설들처럼 간결한 맛을 추구하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고전 소설을 많이 접해보지 않았다면 장황한 문장들과 전개에 당황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범죄 소설임을 감안하고 스토리 전개로만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고 범인이 누구인지도 뻔히 보이는데 정작 사건이 일어나질 않으니 초반의 몰입도는 아무래도 덜한 편이다.

개인적으로도 책의 70%를 읽을 때까지 '대체 사람은 언제 죽는 걸까?'라는 질문을 가슴에 품은 채로 읽었다.

실제로 본 작품에서 살인이 두 번 일어나는데, 그중 첫 번째 살인의 등장 시점이 전체 280페이지 중 211페이지다.

즉, 그전까지는 그 살인이 발생하게 된 배경과 인물들의 소개라는 의미다.

물론 그 안에 당시 러시아의 계급 사회와 술독에 빠져사는 공직인들, 타인의 아내도 공공연히 탐하는 문란한 성의식까지 사회의 여러 문제적인 측면을 자세히 보여준다.

이러한 부분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전의 내용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후로 이어지는 사건의 에피소드와 나름의 반전을 생각한 결말까지가 전체 분량 대비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적어서 뭔가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후다닥 결말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흐름이 당시 문학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현대 소설에만 익숙한 독자 입장에서는 되려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솔직히 대입 연극 실기에 저자의 작품이 단골로 올라온다는 것 정도나 알았지 작품을 진지하게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저자가 주로 희곡, 단편소설로 유명한데 작가 생활을 순수하게 생계를 위해 시작했던 터라 작품의 수도 많고 시도해 본 작품의 유형도 다양하다고 한다.

이 작품 역시 저자의 다양한 시도 중 하나였고 저자 자신은 그리 높이 평가하는 작품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영화화가 될 정도로 대중적으로는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치정 살인을 주제로 하고 있고 당시 사회 지배계층의 타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부분들이 많아서 대리만족을 느끼기에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혼의 눈이 멀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이 백작의 회색 대리석 상판 하나하나,

그림들 하나하나, 그리고 백작의 정원 어두운 구석구석 서려 있는 사람들의 땀과 눈물,

굳은살 박인 손을 보지 못한다. - 중략 -

그런데 지금 결혼식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제일 가혹한 진실조차도 서슴치 않고 말하는 부유하고 독립적인 사람들 중에서

백작의 그 잘난 미소가 어리석고 부적절하다고 말해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pg 134-135)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본래 좋아하던 독자라면 당연히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단순히 범죄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간만에 고전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 작품이 오히려 새로운 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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