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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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작가의 작품으로 수상 경력이 화려하기도 하고 범죄소설을 좋아하기도 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감상에 앞서 상당한 재미를 주는 작품이라는 점을 먼저 언급하고 싶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인데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되는 매력이 있었다.

작품은 30년 전에 아나라는 십 대 여성이 토막 난 후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된 사건으로 시작된다.

당시 경찰 조사로는 성폭행 후 살해로 보인다며 잠정 결론이 나지만 범인은 찾지 못한 채 미결로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린다.

아나의 집안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아나의 둘째 언니인 리아는 무신론자의 길을 걷기로 하고 집을 나가 버린다.

그나마 자신을 이해하던 아버지와도 편지만 주고받던 리아에게 어느 날 마테오라는 조카가 나타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사건을 남몰래 조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로는 사건의 진상이 각기 다른 인물들의 관점에서 조금씩 밝혀지는 구조로 전개된다.

이러한 서술 방식 때문에 목차를 보면 대충 누가 범인인지 예상할 수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작품의 재미가 반감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그러한 행동 이면에 숨겨진 동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기에 종교적 광신이 큰 역할을 차지한다.

작품 전반에 걸쳐 종교라는 것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얼마나 옭아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려서부터 세뇌되듯 주입된 종교관이 갖는 무서움도, 가족과 종교인들이 보여주는 가스라이팅의 전형적인 모습도 잘 묘사하고 있다.

사건의 진상이 모두 밝혀진 후에는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쓰레기 같은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종교의 이름을 빌리고는 있지만 뼈 속까지 이기적이었던 이 인물들은 결국 세속적인 측면에서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하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이 종교의 힘이라면 힘일 수도 있겠다 싶다.

나 역시도 무신론자인지라 '고해를 통한 용서'라는 형식적인 행위로 죄의식을 씻고 태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물들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믿음이라는 건 순진한 속임수일지도 몰라.

적어도 여러 가지 소박한 속임수에 의해 지탱되는 삶에서는 말이다.

(pg 418)

범죄소설 부류에 속하지만 법적으로 범죄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가 없었다는 점도 특이한 지점이다.

그래서 결국 누구도 처벌받지 않고 끝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이 찜찜하게 끝나는 작품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결국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끝이 나고, 마지막에는 감동적인 여운도 남는 좋은 결말이었다고 생각한다.

너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빈다.

그리고 나의 귀염둥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나도.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무신론자인 너희의 생각이

옳았음이 증명되는 셈이겠지.

그렇다면 지금 이 삶이 끝난 뒤에는 아쉽지만 아무것도 없을 거야.

너희를 사랑한다, 언제나처럼.

(pg 419)

출판사의 책 소개가 다소 거창한 느낌이었는데 그것이 그저 상투적인 마케팅 용어들이 아니었음을 책을 다 읽은 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이 올해 읽을 마지막 소설이 될 것 같은데 한 해의 마무리로써도 더없이 좋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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