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신이라는 착각 -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필리프 슈테르처 지음, 유영미 옮김 / 김영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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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신경과학자이자 정신의학과인 저자가 쓴 책으로 자극적인 제목이 눈길을 끈다.

독일어 원문을 영어로 직역하면 'The illusion of reason', 즉 '이성의 환상'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저자가 직접 이 책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두었다.

우리 머릿속에서 확신이 어떻게 생겨나는가?

(pg 337)

저자의 문제의식은 우리가 흔히 '정신질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기이한 확신에서 출발한다.

흔히 우리가 '미쳤다', '정신이 이상하다'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경우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들을 하는데(사람들이 다 나를 위협하는 것 같다, 비밀 조직이 나를 감시하는 것 같다 등등) 가만히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뇌가 정상적인 범주의 뇌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찾는 것이 문제의식의 출발점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뇌과학적으로 정신이상자와 건강한 사람의 뇌의 기능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정상인과 정신이상자 사이에 명확한 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라고 한다.

즉 우리는 모두가 정상과 미침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으며 이 점이 어느 쪽으로 조금 치우쳤느냐에 따라 환자가 되기도 하고, 그저 약간의 편집증이 있거나 망상이 있을 사람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천재와 광인은 한 끗 차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맞는 말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카테고리 사이의 고랑은 특히 깊다.

정상과 비정상의 중간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우리 머릿속에 그어진 이 두 카테고리 사이의 경계선은 너무나 예리하다.

'정상'인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다.

그러나 '비정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며,

낯설고 끔찍하고, 심지어 공공에 위험한 사람이다.

(pg 45)

게다가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마저도 교육수준이나 경제적 배경과도 상관없이 기이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경우는 너무도 흔하다.

흔하게는 이런저런 정치권의 음모론을 믿는 사람부터 저자 역시 책 후반에 예시로 들고 있는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를 보이는 사람들 역시 그러한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확신'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서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과학적인 시각에서 풀어내고 있다.

망상이 생겨나는 것과 '정상적' 확신이 생겨나는 것에는 범주적인 차이가 없다.

우리가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만든 고랑은 인위적인 것이다. - 중략 -

합리적이건 비합리적이건 우리의 확신은 주변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가설이다.

(pg 299)

우리의 뇌는 그저 캄캄한 뼈 속에 갇혀 있는데 생존과 번식이라는 생명의 본질적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감각 기관을 통해 주어지는 데이터들을 통해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뇌는 마치 예측 기계처럼 작동한다.

감각 기관에서 입력되는 데이터를 통해 예측을 하기도 하고(Bottom Up) 예측을 바탕으로 감각 기관의 데이터를 해석하기도(Top Down) 한다.

저자는 우리가 비합리적인 확신을 갖게 되는 이유로 이러한 예측과 감각 데이터의 균형이 살짝 틀어졌을 경우에 발생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감각 데이터에 더 많은 비중을 둘수록 - 이것은 우리의 소인(특질 요인)뿐 아니라,

현재 상황(상태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 그럴듯해 보이는 설명을 더 이상의 검증 없이

받아들이기가 쉽고, 그렇게 형성된 확신을 다시 포기하기가 어렵다.

그럴수록 인식적으로 비합리적이 되기 쉽다.

(pg 294)

하지만 이러한 비합리적인 확신이 우리가 진화를 거듭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

저자는 이러한 비합리적인 확신이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저자는 이러할 경우 비합리적 확신이 '적응적'이라고 표현한다.) 말한다.

비합리적 사고는 많은 상황에서 아주 기능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중대한 실수를 피하고, 빠른 결정이 요구될 때

쓸데없이 진실을 찾느라 힘을 낭비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진화는 우리 뇌가 그렇게 비합리적 확신을 만들어내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pg 299)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비합리적 확신을 무조건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대다수가 인간 역시 하나의 원시세포에서 시작된 동물의 한 종이라는 점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동물적 본능을 마냥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 것과 같다.

우리는 분명 합리성을 추구할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돌아볼 줄 알 뿐만 아니라 타인의 생각에 긍정하거나 혹은 건강한 토론으로 서로의 생각을 변화시켜나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불확실함은 거부감과 두려움을 안겨주기 때문에 도무지 견디고 싶지가 않다.

확신을 주는 확실하고 안전한 상태로 도망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안정감 있게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지만,

그것은 사회적으로 서로 심각한 갈등을 빚는 충돌의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불확실성을 용인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좋으며,

이 일 역시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되면 가장 좋을 것이다.

(pg 332)

문제의식 자체가 흥미로워서 꽤 재미있게 출발했으나, 중반 이후로는 꽤 어렵게 느껴졌다.

정리하면 쉬워 보이기는 하나, 결론을 이끌어내기까지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탐색하고 그에 대한 예시를 들며 과정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읽는 과정이 아주 재미있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꽤 의미 있는 시각과 정보를 알게 된 것 같아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은 확실하게 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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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주에 가야 하는 이유 - 아르테미스 프로젝트에서 우주 경제의 내일까지
폴윤 지음 / EBS BOOKS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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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NASA)가 여러 우주 관련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태양계 홍보대사라는 직책이 있을 줄은 몰랐다.

저자가 바로 나사의 태양계 홍보대사라고 한다.

태양계 밖에 있는 외계인에게 태양계를 홍보하기 위해 만든 직책은 아닐 테고 나와 같은 과학 문외한들에게 우주 관련 지식들을 대중적으로 알려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제목 그대로 인류가 우주에 가야 하는 이유를 쉽게 설명해 주는 책이다.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이유는 인류가 가진 호기심 때문이다.

우리는 우주에 무엇이 있는지, 우주에 지적 능력을 가진 생물이 우리 밖에 없는지, 우주는 얼마나 넓은지, 멀고 먼 어느 날 결국 사라질 태양과 지구를 대체할 별과 행성을 찾을 수 있을지 등등 우주에 대해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다.

이러한 호기심이 인류의 발전과 번영을 이끌어온 원동력이었음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우주는 상수의 세계가 아니다. 변수의 세계다. 우리 인생과 닮지 않았는가?

24시간의 하루, 12개월의 1년 같은 절대적인 시간 개념은 더 이상 절대진리가 될 수 없다. 우리의 후손은 어느 미래에 화성을 포함 우주 밖 여러 행성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들의 하루는 과연 몇 시간일까?

(pg 31)

또한 우주에 가기 위해 개발되는 여러 기술들이 지구에서도 매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우주복, 우주선 등에 활용되는 신소재는 말할 것도 없고, 우주선에 사용되는 연료, 우주에서 지구로 연락을 취하기 위해 개발되는 통신 기술에 이르기까지 우주에 가기 위해 개발된 기술들은 우리 삶을 바꿔놓고 있다.

게다가 우주에서의 과학 실험은 중력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지구에서의 실험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특히 제약회사에서 신약을 개발할 때 단백질 구조의 결정화에 중력이 작용하면 결정이 균일하게 발생하지 않는데 이를 우주에서 실험하면 결과가 훨씬 더 정밀하고 효과적으로 나온다고 한다.

우리가 우주에 가기 때문에 인류의 생명과 건강도 증진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우주에 가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과 기업들이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투자를 하는 이유는 우주가 경제적으로도 매우 유망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다른 천체에 존재하는 희귀 광물들의 가치도 매우 높다고 추정되지만 우주를 개발함으로써 새로운 관광지, 경제권도 형성할 수 있다.

과거 식민지와 노예를 통해 얻었던 경제적 이점을 다른 천체와 로봇으로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한 것이다.

저자 역시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도 빨리 이 분야에 뛰어들어 다른 나라가 선점하고 있는 우주적 이점을 가져왔으면 하는 바람을 책의 많은 부분에서 표현하고 있다.

제목에 충실하게 책을 다 읽고 나면 왜 우주에 가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비용을 투자하고 있는지 대부분은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주에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발견된 관측 결과나 개발된 기술에 대한 설명도 매우 풍부해서 우주과학에 대한 교양서로서는 손색이 없다는 느낌이었다.

다만 뒤로 갈수록 앞에서 했던 이야기들의 반복이어서 다소 아쉽게 느껴졌는데 이는 짧은 글들의 모음이어서 그런 것이므로 책을 읽는 호흡이 긴 사람이라면 오히려 앞의 내용을 반복해서 읽게 되어 좋을지도 모르겠다.

책 자체는 그리 두껍지도 않고 짧은 글들의 모음이어서 읽는 부담이 그리 크지 않다.

저자의 설명도 현학적인 느낌 없이 담백하고 컬러로 된 사진 자료들이 많아서 읽는 동안 지루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주에 관심이 많은 중고등학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읽을 수 있는 괜찮은 과학 교양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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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성 문화, 사색 - 인간의 본능은 어떻게 세상을 움직였나
강영운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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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성이 발달하면서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하기는 하지만 지금도 전쟁이 났다 하면 표면적인 이유를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그 안에 경제적인 이유가 있다.

그만큼 먹고사는 문제는 생물인 이상 초유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고,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이제 생물의 다음 목표인 번식의 영역으로 관심사가 옮겨가게 마련이다.

인간 역시 생물의 한 종으로서 이러한 욕구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다만 그러한 이유가 아닌 것처럼 포장하는 능력을 키워왔을 뿐이다.

저자는 이러한 우리의 욕구가 역사 속에서 알게 모르게 엄청난 힘을 발휘했을지 모른다는 가설을 세우고 여러 사례들을 제시한다.

총 27개의 짧은 글들이 실려있는데 모두 제목만 읽어도 어떤 내용일지 궁금함을 불러일으킨다.

각각이 모두 다른 이야기들이어서 기억에 남는 사례들 위주로 소개하고자 한다.

최근 들어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문화권 국가들에서는 아직도 성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남아있는 것 같다.

막연히 인류가 문명을 형성한 다음에는 이런 경향이 생겼으리라 짐작했었는데 성에 대해 보수적인 문화가 생긴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절만 하더라도 성적으로 꽤나 개방적인 문화였고 우리나라 역시 고려 시대까지는 성에 개방적인 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학의 영향을 받은 조선시대 이후로 성에 관해 매우 보수적인 문화가 형성되었고 서구 사회 역시 기독교가 사회의 중심이 된 이후로는 성 담론이 매우 엄격하게 변화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러는 와중에도 종교인들이 매춘을 한다거나 정부를 두는 등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은 할 짓은 다 하고 살았다는 점이다.

국가와 교회는 결국 성매매를 배척하기보다 관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프랑스 파리와 툴루즈, 영국 런던 등 주요 도시에는

성매매 집결지인 '유곽'이 자리 잡게 됩니다.

모두 국가와 교회가 관리하는 지역이었습니다.

(pg 37-38)

사회 지도층 역시 인간임에는 틀림없으므로 욕망이 없을 수는 없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점이 왕정을 끝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 왕족이나 귀족들의 자극적인 성생활을 묘사한 야설에 가까운 문학 작품들이 크게 인기를 끌게 되는데, 비록 픽션이지만 당시 대중들은 그러한 작품들을 통해 왕족이나 자신들이나 그리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더욱 놀라운 점은 혁명 세력이 이러한 작품들을 이용해 권력을 잡게 되는데 자신들도 권력을 잡은 뒤에는 이러한 문학 작품들을 막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건 혁명 세력이 포르노에 대한 입장을 번복했다는 것입니다.

정권을 잡기 시작한 무렵인 1791년 7월 국민의회는 포르노를

규제하는 조치를 시행하려고 합니다.

또 한 번 정치적 포르노가 자신들의 집권을 위협할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pg 98)

유럽의 이순신이라 불리는 허레이쇼 넬슨이나 한 국가의 왕이었던 앙리 2세, 헨리 8세 등 걸출한 역사 속 인물들의 불륜 이야기 역시 기억에 남는다.

그러한 사례들을 통해 성에 대한 인식 역시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엄연히 역사 속 사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330여 페이지로 그리 두껍지도 않고 서술이 친절해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진 자료가 굉장히 풍부해서 따로 검색을 해보지 않아도 되는 점이 좋았다.

어디 가서 쉽게 아는 척할 수 있는 내용들은 아니지만 재미가 확실한 주제들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목차만 보면 꽤나 외설적인 내용일 것 같지만 생각보다 꽤 제대로 된 역사 교양서이니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일독해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이름을 걸고 출판까지 하기에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 꽤나 충실하고 재미있게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저자가 쓴 다른 책들을 계속해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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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보통 시 - 서울 사람의 보통 이야기 서울 시
하상욱 지음 / arte(아르테)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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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책을 읽기 전에 출판사의 소개를 먼저 읽게 되는데 이 책의 소개 글에 따르면 저자가 SNS를 중심으로 충격적인(?!) 시들을 공개하며 충격을 안겨준 것이 벌써 10년 전 일이라고 한다.

세월의 빠름과는 별도로 그가 낸 종이책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에도 놀랐다.

작곡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모양인데 그런 그가 오랜만에 본업(?)으로 돌아왔다는 소개에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들어 읽어보게 된 작품이다.

특히 책 속 그림도 저자가 직접 그렸다고 해서 더 기대가 되었다.



이 책 역시 인터넷에서 가끔 보던 저자 특유의 짧지만 강렬한 재미를 주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인상 깊은 구절들이 많아 옮기고 싶지만 워낙 짧은 글들이라 저작권이 걱정되어 직장인 입장에서 정말 공감이 갔던 몇 가지만 추려 소개해 볼까 한다.

먼저 SNS에서 보던 것과 종이책은 어떻게 다를까가 가장 궁금했는데, 확실히 저자가 수록 작품들의 순서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이 책장을 넘기다 보면 느껴지는 것 같다.

예전에 쓴 글과 추가된 글이 내용상 연관성이 있게 배치되어 있어서 읽는 재미가 좋았다.

하면

할수록

느는것

같아

- 하상욱 단편 시집 '업무량' 에서 -

(pg 22)

"거 봐. 하다 보면 는다니까."

(pg 23)

기대했던 삽화의 경우에도 매우 절제된 수준으로 잘 실려 있었다.

특히 아래의 삽화는 웃기면서도 짠한 감정을 단순한 그림체로 잘 살렸다는 느낌이 들어서 이 책에서 딱 한 장의 그림만 소개한다면 아래의 그림을 소개하고 싶다.

(pg 214-215)

개인적으로 이 책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10년 넘게 서평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400권이 넘는 책의 서평을 썼지만 그중 시집이라 할 수 있는 건 이 책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지하게 시를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 책이 무슨 시집이냐, 오히려 유머집에 가깝지 않느냐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읽는 이에 따라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그런 시각이 아이돌 음악이 한참 태동하기 시작할 때 '이게 음약이냐'라고 떠들던 사람들의 견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랬던 사람들이 지금의 K-Pop 열풍을 보고서는 어떻게 느낄지 사뭇 궁금해진다.

마찬가지로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대중적인 인기는 비례하지 않을 수 있고 또 비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대중문화'라는 속성에 더 적합하지 않나 싶다.

저자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굉장한 문학적 성취를 일궈냈기 때문이 아니라 아주 짧은 글 안에 자신의 생각을 함축적으로 담아내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웃음을 이끌어내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것에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충분히 일독할 가치가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워낙 짧은 글들의 모음이라 글자만 읽겠다고 하면 과장 없이 20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읽다 보면 잠깐 동안의 웃음과 가만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저자의 글이 가진 힘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즐거운 금요일이지만 이틀 뒤 나에게 읽어 주는 글로 소개를 마무리할까 한다.

가만있는

사람

짜증나게

하네

- 하상욱 단편 시집 '내일 출근' 에서 -

(pg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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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적 인생의 권유 - 최재천 교수가 제안하는 희망 어젠다 최재천 스타일 2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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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교수가 대한민국에 '통섭'이라는 단어를 소개한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이 책 역시 10살이 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통섭'은 발도 못 붙이고 있는 것 같고 이제는 통섭을 뜻하는 단어도 '융복합'으로 변화해 버렸다.

특히 대학에서 일을 하다 보니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직도 대학 내 전공의 벽은 견고하고 학생들 역시 부, 복수 전공 등으로 자신이 융복합 인재라는 것을 내세우지만 그것이 학문의 발전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취업 전략의 일환으로만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시점에 약 10년도 더 된 이 책은 어떤 시각을 던져줄 수 있을지 궁금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저자가 제시한 '통섭'은 말 그대로 과학과 인문학, 사회학적 시각을 고루 갖추는 것을 뜻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의 법칙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시도해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첫 번째 주제와 연관된 환경, 기후, 생물 다양성에 관련된 글들이 꽤 비중 있게 실려 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경제 활동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책임임은 자명하거니와 이제는 우리 자신의 삶마저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스스로를 호모 사피엔스, 즉 현명인 인간이라고 자화자찬하며 살았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진정으로 환경을 생각하고, 환경과 함께 살겠다는 마음을 지닌 공생인, 즉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가 결코 밝지 않을 것이다.

그 변화의 시작은 어렵지 않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밥상에서부터 그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

(pg 67)

특히 생물학자답게 진화의 계보 상 인간은 매우 최근에서야 등장한, 진화 계통도 상 막내라는 저자의 시각은 매우 신선하면서도 의미가 있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다운 법이다.

모든 생물은 나름대로 존재 가치와 권리를 지니고 있다.

인간에게는 그들을 인정하고 섬길 의무가 있다.

우리가 막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땅의 생명이, 모든 동물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게 될 그 날을 기대해 본다.

(pg 24)

통섭적 인생의 두 번째 요건이었던 '모든 것을 시도해 보는' 삶을 위한 방법으로는 역시 독서를 강조한다.

수명이 아무리 길어졌다고 한들 학위를 두, 세 개씩 취득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관련 분야의 책을 몇 권 읽는 것은 그에 비하면 아주 작은 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통섭이 가능한 인재가 되려면 자신이 이미 잘 아는 주제의 책이 아니라 정 반대의 책을 전략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기획 독서가 무엇인가? 몇 가지 분야를 정해 놓고 계획성 있게 공략하는 독서다.

자신의 전문 분야 외에 관심이 가는 분야가 있다면 치열하게 탐닉하라.

자기계발서나 말랑말랑한 책들은 기획 독서가 아니라 취미 독서를 위한 책이다.

진짜 철학책과 과학책을 읽어야 내 자산이 된다. - 중략 -

평소 호기심을 갖고 주변을 관찰하는 습관을 조금만 길러도

기획 독서를 할 분야를 어렵지 않게 정할 수 있다.

(pg 147)

최근에 어쭙잖게 양자물리학이나 천문학 등 과학 서적으로 독서 범위를 넓히고 있는 도중이라 저자가 잘 하고 있다고, 계속 시도하라고 격려해 주는 느낌이 들어 내심 기분이 좋았다.

최근에 아예 본인의 유튜브를 개설해 대중들과 소통하고 있는데, 확실히 더 젊었을 때 쓴 글들이어서 그런지 지금의 온화한 모습과는 잘 매치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글에 날이 다소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튜브로 저자를 알게 된 독자라면 본 책을 통해 보다 젊었을 시절 저자의 날카로움을 경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대한민국의 인문학자들은 왜 그토록 앓는 소리만 하는지 모르겠다.

'배고파 못 살겠다', '인문학의 위기다' 말만 하지 말고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문학은 늘 그래 왔다.

배고픈 학문이기 때문에 더더욱 자연과학과 손을 잡아야 한다.

(pg 122)

기본적으로는 저자가 여기저기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둔 책이라서 '통섭'이라는 키워드가 있기는 하지만 저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짧은 생각들이 수록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다.

각 꼭지들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고 대화하듯 어렵지 않게 쓰여서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10년 전이면 대학에 갓 입사해 일을 하고 있었을 시절인데 그때 읽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지만 지금 시점에서도 꽤 좋은 시사점이 많았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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