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52-1961 - 오래된 방랑하는 집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프랭크 허버트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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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니버스의 창시자 프랭크 허버트의 단편집 중 1권이다.

듄2 개봉 시기에 맞춰 총 두 권의 세트로 발매되었다.

작품이 발표된 시기 순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그의 초기작들에 해당한다.

550페이지 정도로 꽤나 두꺼운 편이지만 그 안에 무려 열네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작인 '오래된 방랑하는 집'은 중간 정도에 등장하는데 이 작품을 포함해 외계 생명체가 있다면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 수 있을지를 상상한 작품들이 많았다.

외계인과의 관계에서는 당연히 우리를 정복하는 시나리오가 가장 대표적일 것일 텐데, 개중에는 우리가 정복 당한 줄도 모른 채 70만 년을 살아온 스토리(점령군)도 있다.

특히 '짝짓기 소리'나 '기억하려 하다' 등의 작품에서는 외계인과 인류의 소통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우리 외의 지적 생명체가 있다면 당연히 우리와 비슷한 언어 체계를 가졌을 것이라 가정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발상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노래로 소통하고 심지어는 노래를 통해 단성 생식까지 가능한 외계인이라던가, 거짓으로 꾸며내기 쉬운 문자와 음성 언어가 아닌 몸짓 언어를 극한으로 발달시킨 외계인 등이 등장해 상상력을 자극한다.

우리는 이성의 힘을, 조종하는 언어의 힘을 그 어떤 기능보다도 높이 여겨 왔어.

글말은 우리의 신이 되었지. 말 이전에 행동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어.

항상 말 위에 사물이 있다는 것을. 입말이 글말보다 선행한다는 걸 잊었고.

글로 쓴 형태의 문자가 표의 문자에서 유래했음을,

모든 문자 뒤에는 이미지가 고대의 유령처럼 서 있음을 잊었어.

이미지는 신체 또는 다른 생물들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상징하지.

(pg 553)

그런가 하면 '무능자' 같은 작품에서는 만화 시리즈인 '엑스맨'을 연상하게 하는 초능력자들이 등장한다.

단순히 허황된 이야기라면 매력이 적을 텐데, 이런 스토리에도 유전학에 관련된 부분이 섞여 있어서 '듄'에서 '베네 게세리트'들이 오랜 세대에 걸쳐 초월적인 유전자를 만드려고 했던 시도들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건초 더미 작전'과 '사이의 사제'에서는 뒤에서 교묘하게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이 등장하는데 그 자체로 '베네 게세리트'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듄'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모든 폭발 무기들을 무력화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하자 전쟁이 다시 원시적인 무기를 쓰는 양상으로 돌아가는 작품인 '사격 중지'라는 작품 역시 행성 간 이동이 가능한 미래 사회를 그린 '듄'에서 왜 칼을 들고 싸우는지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수록된 작품들이 모두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들이어서 500페이지가 넘는 두께에도 불구하고 읽으면서 전혀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다음 권을 읽고 나면 끝이라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다.

'듄'이라는 희대의 걸작이 하루아침에 탄생한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 이러한 단편 작품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작품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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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숲에서 - 바이칼에서 찾은 삶의 의미
실뱅 테송 지음, 비르질 뒤뢰이 그림, 박효은 옮김 / BH(balance harmony)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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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여행가이자 작가인 '실뱅 테송'이 바이칼 호수 근처의 한 오두막에서 보낸 6개월 동안 쓴 글을 '비르질 뒤뢰이'라는 작가가 그래픽 노블로 표현해 낸 책이다.

원문의 경우 국내에는 '희망의 발견: 시베리아의 숲에서'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내용은 제목처럼 매우 담백하다.

저자가 말 그대로 시베리아의 한 숲에 있는 외딴 오두막에 들어가 살게 되는 이야기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을 만나려면 한나절 이상을 걸어야 하는 오지 중의 오지다.



떠나기 전 저자는 장을 보다가 진열장에 케첩이 열댓 종류나 된다는 것에 의문을 품는다.

왜 우리는 고작 케첩에까지도 이렇게나 많은 선택지를 만들어 복잡하게 살고 있을까?

저자는 현대인과 현대 사회의 복잡함을 떠나 오지에서의 새로운 6개월을 보낸다.

들어갈 무렵에는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겨울이었고 나올 무렵에는 얼어있던 호수가 녹아 배를 탈 수 있을 정도의 봄이 된다.

저자는 이 오두막에서 오로지 자신에게만 몰두하며 시간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워간다.

(pg 25)

우리나라의 중년 남성들도 유독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좋아한다는 점이나 최근의 캠핑, 차박 등이 인기를 끄는 현상에도 근원적인 이유는 저자가 시베리아를 선택한 이유와 같지 않을까 싶다.

복잡한 사회,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만 천착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래픽 노블 형태라서 쉽게 읽히고 분량도 그리 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이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저자가 보여주는 시베리아의 삶과 그의 생각들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특히 그림이 글과 상당히 잘 어우러져서 글의 여운을 느끼며 오랜 시간 그림도 감상할 수 있었다.

요즘 사람들에게 툭하면 쏟아지는 눈과 비, 문만 열면 야생 곰이 지나다니는 오지에서 홀로 6개월을 견딘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6개월이 힘들어 보인다기보다는 오히려 행복해 보이고 그래서 부럽기까지 했다.

육신의 편안함을 상당히 중시하는 편인지라 내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렇게 긴 기간이 아니라면 꼭 도전해 보고 싶은 형태의 삶이었다.

저자의 글도 담백하면서도 울림이 좋아서 이 책을 다 읽자마자 그의 대표작이라는 작품을 대출했다.

이렇게 또 한 명의 좋은 프랑스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다음 독서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이 내게 왜 이곳까지 들어왔느냐 물으면,

나는 밀린 독서를 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내면의 삶이 곤궁하게 느껴질 때는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

그러면 언제든 가난한 마음을 채울 수 있다.

(pg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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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권력을 만났을 때 - 서로 협력하거나 함께 타락하거나
제프 멀건 지음, 조민호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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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문, 사회학이 발 디딜 틈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부분을 찾아내 보여줘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반적으로는 전혀 동떨어진 분야로만 보이는 과학과 정치가 실제로는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참신함이 돋보인다.

정치권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학을 필요로 하고, 과학은 국민의 혈세가 자신의 연구로 흘러들어오게 하기 위해 정치를 필요로 한다.

역사적으로 이 둘의 관계는 정치의 통제, 혹은 계획 아래 과학이 힘을 보태주는 형태로 존속해왔다.

하지만 최근의 과학은 너무도 빠르게 발전하는 반면, 정치의 속도는 이에 비하면 너무도 느리기 때문에 과학과 정치가 괴리되고 있다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책이라 보면 되겠다.

저자의 표현을 빌면, 과학은 너무 정치적이지 못하고, 정치는 너무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결과로 과학과 일반 대중사회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정치는 비과학적인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사회적인 문제라고 보고 있다.

정치계는 과학의 주권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권위와 합법성에 대한 과학계의 주장에도 귀 기울이지 않으며,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과학적 통찰을 다른 유형의 지식과 융합하는

종합 역량이 부족한 과학의 약점도 애써 외면한다.

과학을 활용하지 않는 정치적 결정도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과학적 결정도 여전히 정치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pg 36)

요약하자면 과학 정책 추진을 위한 인적 조직이나 연구 지원 등의 구성은

우리의 기대보다 과학적이지 않다.

정책의 우선순위 또한 증거보다는 정치적 관행, 이해관계, 편의로

설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선순위를 정할 때 실제 대중의 의견은 '전혀' 또는 '거의' 반영되지 않으며,

때때로 정치인들은 높은 위상을 지닌 과학자들에게 감히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

(pg 239)

더욱이 과학이 구체적인 기술의 형태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녹아들기 시작해버리면 이후에 부작용이 발견된다 한들 제도적으로 이를 보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문제도 발생한다.

SNS가 사람들의 정신 건강에 상당히 안 좋을 수 있다는 점은 최근의 연구에서야 지적되고 있는데, 이미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SNS를 지금에서야 규제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과학과 정치는 일정 정도의 규제가 필요하고 이를 일반 대중들도 인지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렇게 되기 위해 저자가 말하는 이상적인 과학과 정치의 관계는 아래와 같다.

과학은 정치에 지식을 '공급'하고 정치는 그 지식을 '수용'해 전파함으로써

주변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이 과정을 미디어와 시민 사회가 감시하고 조율한다.

(pg 207)

물론 과학은 더 정치적이어야 하고 정치는 더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은 굉장히 논리적이지만 이를 현실화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문제를 단일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저자 역시 기대하지 않는다.

게임 중독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과 인공수정 시 DNA 조작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은 미치는 파급력이나 수반되는 과학 기술에서나 차이가 크다.

이 둘을 같은 제도로 규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탄력적으로 접근하는 방법밖에 없다. - 중략 -

절대적이고 고정된 주권은 이상적인 개념일 뿐이며 늘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 상황과 환경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고 보는 게 바람직하다.

(pg 262)

정치계도 변화가 필요하고 과학계 역시 변화가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미디어와 시민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대중들의 변화도 반드시 필요하다.

제도적인 정비도 물론 중요하지만, 정치와 과학이라는 두 세력의 활동에 우리의 세금이 들어가는 만큼 진짜로 납세자들이 원하는 분야에 적정한 재원이 투입되는지, 또 그만큼의 성과를 내고 있는지를 감시할 수 있는 역량 자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문제를 포괄적이고 종합적으로 판단하려면 거듭 강조하지만 '메타인지',

즉 생각할 대상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떠올리는 능력,

직면한 과제에 가장 적합한 사고방식이 무엇인지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 중략 -

이 경우 메타인지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를 인지할 때

그 각각에 적용되는 메커니즘을 구별할 줄 알고

특정 방법이 특정 문제에 가장 적합한 이유를 헤아릴 줄 아는 능력이다.

(pg 253)

물론 제도적으로도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특히 정치중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으면서도 여러 방면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구(심지어는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국제적인 규모로도)의 구성과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환경 파괴 등 부정적인 외부효과를 창출하는 활동에 과세를 한 뒤 그 재원으로 이러한 기구를 운영하는 방법 등 구체적인 방안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후미의 참고 자료 목록을 제외하면 300페이지 후반으로 그리 두꺼운 책은 아니지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번역의 문제라기보다는 원문 자체가 문장도 길고 꽤 현학적으로 쓰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사례를 좀 길게 설명해 주면 이해에 도움이 될 텐데, 마치 자신이 이렇게나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여러 나라와 학자의 사례들을 쭉 열거하는 부분이 많아서 읽는 양 대비 머리에 남는 양이 그리 많지 않아 아쉬웠다.

다만 저자의 문제 인식에는 격렬히 공감할 수 있었고, 사회과학 저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난 문제 제기만 할 거야. 해결책은 다 같이 찾아보자고. 안녕!' 식의 결말이 아닌 적극적인 해결책 제시도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책 중간중간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 다른 학자들에 대한 디스가 꽤 많이 숨어 있다.)

과학을 주제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과학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책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정치나 사회에 관심이 많다면 사회를 보는 눈을 더 키워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주의의 역설은 주권자인 국민이 자각하면 자각할수록 개인 지식의 한계, 편향과 왜곡, 문제와 격차, 다른 분야 지식의 중요성 등을 더 많이 깨닫게 된다는 데 있다.

(pg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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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되돌릴 수 있을까 - 스티븐 호킹의 마지막 제자에게 듣는 교양 물리학 수업
다카미즈 유이치 지음, 김정환 옮김, 김범준 감수 / 북라이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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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단골 주제인 시간 여행이 과연 과학적으로 가능할지 궁금해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솔깃할 제목을 가진 물리학 책이다.


책 제목이 질문이기 때문에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하자면, 당연히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 과정이 왜 불가능한지를 여러 과학적 사실들로부터 밝혀가는 책이라고 보면 되겠다.

가령 SF 마니아들이 상대성 이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자주 등장하는 타임머신도,

설령 만들 수 있다 한들 인과율 때문에 미래로만 갈 수 있다.

과거로 돌아가서 원인에 어떤 영향을 주면 현재의 결과와 모순이 발생해

인과율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pg 76)

시간이 무엇인지,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를 정리한 후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해 현재까지 인류가 밝혀낸 시간에 대한 개념들이 알기 쉽게 정리되어 있다.

상대성 이론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하면 공간은 3차원인데 시간은 왜 1차원인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이 책은 이 의문에 대한 지금까지의 과학적 해석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아닌 여러 학설들도 같이 소개하고 있어서 여러 시각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우리는 아직 우주의 형태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명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학설들도 여러 가지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책에 소개된 여러 이론들 중 카를로 로벨리의 루프 양자중력 이론으로 설명한 시간의 개념이 상당히 참신하면서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시간이란 사전에 정해진 특별한 무엇인가가 아니다.

시간은 방향 지어져 있지 않으며, 현재도 없고 과거도 미래도 없다.

그렇다면 대체 시간의 무엇이 남는가?

남는 것은 오직 관측되었을 때 정해지는 사건끼리의 관계뿐이다.

극히 국소적인 A라는 사건과 B라는 사상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pg 190)

결국 시간이라는 것도 우리의 관념이 만들어낸 것일지 모른다는 이론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고 하니 다음에 꼭 읽어볼 생각이다.

여러 이론과 과학적 사실들을 통해 알아낸 바로는 양자 수준에서는 시간을 역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결과가 나온 적이 있지만, 양자의 세계는 너무도 작은 세계이기 때문에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그러한 결과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다소 힘이 빠지는 결론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물질의 근원인 양자부터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까지 꽤 폭넓은 과학적 사실들을 책 한 권으로 훑어볼 수 있어서 읽는 과정이 꽤 즐거웠다.

과학 지식들을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게 잘 풀어주는 커뮤니케이터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 책의 저자 역시 이 분야에서 꽤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우리는 자신이 순수하게 지성만으로 사고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뇌라는 물리적 기능 없이는 사고가 성립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물리적인 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의 화살도 이러한 사고를 통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pg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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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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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책이다.

주로 단편소설집이 공통된 주제들을 갖고 있기 쉽지 않은데, 이 책 속의 작품들은 대체로 시간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e북으로 읽었는데 해당 콘텐츠에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아서 발췌문에 페이지를 표기하지 못했다.)

표제작이자 첫 작품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독특한 시간 인식을 다루고 있다.

작품 속에 여자친구의 어머니가 자살하기 전 남긴 소설이 하나 등장한다.

동반자살하는 한 커플이 등장하는 작품인데 특이하게도 죽기 직전,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과거로 하루하루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을 한다.

즉 가장 좋았던 과거가 오히려 가장 미래에 일어난다면 삶의 궤적이 매우 달라진다는 경험을 한 것이다.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은 과거는 기억할 수 있지만 미래는 기억할 수 없기에 오히려 미래를 기억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이토록 평범한 미래' 中

마지막 작품인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라는 작품에서도 인간에게 시간이란 개념은 무엇인지를 묻는다.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바르바라'라고 불렸던 세 여인의 삶과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세계를 인식하는 시간의 흐름이 독특하게 맞물려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80년을 살면서 이전 80년의 이야기를 듣고 죽음 이후의 80년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240년이라는 독특한 발상(?!)인데, 이 발상이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의 과거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되어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지고 살아가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담긴 '난주의 바다 앞에서', 아내를 잃은 슬픔을 안고 몽골로 떠난 남자의 이야기인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젊은 날의 사랑을 추억하는 '엄마 없는 아이들', 이미 끝나버린 사랑이었지만 그 여정이 뜻밖에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인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등도 읽는 재미가 좋았다.

책의 길이는 짧은데 문장들이 좋아서 기억에 남는 구절들이 꽤 많았다.

"나는 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中

영원한 여름이란 환상이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사랑이 저물기 시작하자, 한창 사랑할 때는 잘 보이지도 않았던 마음이 점점 길어졌다.

길어진 마음은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미워한다고도 말하고, 알겠다고도 말하고,

모르겠다고도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고, 말만 하고.

마음은 언제나 늦되기 때문에 유죄다.

'사랑의 단상 2014' 中

수록된 작품들 중 '진주의 결말'만은 유독 분위기가 독특하다.

마치 추리소설처럼 한 여인이 치매를 앓던 아버지를 죽이고 집에 불까지 지른 후 도망친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도 그녀가 진짜 범인이냐 아니냐를 따지기보다는 인간이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런 일이 가능은 한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2022년에 발매된 작품이어서 그런지 코로나19가 지배하고 있던 세상의 모습이 작품 속에 그대로 담겨 있다.

그리고 여덟 작품 중 두 작품에서 세월호 이야기를 직,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등, 배경으로는 현대 한국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냈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꽤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야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이야기의 형식은 언어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 역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

이렇듯 인간의 정체성은 허상이다.

하지만 이렇게 규정하는 것도 언어이므로 허상은 더욱 강화된다.

말로는 골백번을 더 깨달았어도 우리 인생이 이다지도 괴로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中

저자의 작품은 이 책으로 처음 접했는데 문장들이 너무 좋아서 e북이라는 집중 안 되는 매체로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꽤 단시간에 읽은 것 같다.

저자가 단편은 오랜만에 썼다고 할 정도로 장편이 더 많은 것 같아서 다음에는 저자의 장편을 읽어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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