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권력을 만났을 때 - 서로 협력하거나 함께 타락하거나
제프 멀건 지음, 조민호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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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문, 사회학이 발 디딜 틈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부분을 찾아내 보여줘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반적으로는 전혀 동떨어진 분야로만 보이는 과학과 정치가 실제로는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참신함이 돋보인다.

정치권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학을 필요로 하고, 과학은 국민의 혈세가 자신의 연구로 흘러들어오게 하기 위해 정치를 필요로 한다.

역사적으로 이 둘의 관계는 정치의 통제, 혹은 계획 아래 과학이 힘을 보태주는 형태로 존속해왔다.

하지만 최근의 과학은 너무도 빠르게 발전하는 반면, 정치의 속도는 이에 비하면 너무도 느리기 때문에 과학과 정치가 괴리되고 있다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책이라 보면 되겠다.

저자의 표현을 빌면, 과학은 너무 정치적이지 못하고, 정치는 너무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결과로 과학과 일반 대중사회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정치는 비과학적인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사회적인 문제라고 보고 있다.

정치계는 과학의 주권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권위와 합법성에 대한 과학계의 주장에도 귀 기울이지 않으며,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과학적 통찰을 다른 유형의 지식과 융합하는

종합 역량이 부족한 과학의 약점도 애써 외면한다.

과학을 활용하지 않는 정치적 결정도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과학적 결정도 여전히 정치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pg 36)

요약하자면 과학 정책 추진을 위한 인적 조직이나 연구 지원 등의 구성은

우리의 기대보다 과학적이지 않다.

정책의 우선순위 또한 증거보다는 정치적 관행, 이해관계, 편의로

설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선순위를 정할 때 실제 대중의 의견은 '전혀' 또는 '거의' 반영되지 않으며,

때때로 정치인들은 높은 위상을 지닌 과학자들에게 감히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

(pg 239)

더욱이 과학이 구체적인 기술의 형태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녹아들기 시작해버리면 이후에 부작용이 발견된다 한들 제도적으로 이를 보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문제도 발생한다.

SNS가 사람들의 정신 건강에 상당히 안 좋을 수 있다는 점은 최근의 연구에서야 지적되고 있는데, 이미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SNS를 지금에서야 규제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과학과 정치는 일정 정도의 규제가 필요하고 이를 일반 대중들도 인지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렇게 되기 위해 저자가 말하는 이상적인 과학과 정치의 관계는 아래와 같다.

과학은 정치에 지식을 '공급'하고 정치는 그 지식을 '수용'해 전파함으로써

주변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이 과정을 미디어와 시민 사회가 감시하고 조율한다.

(pg 207)

물론 과학은 더 정치적이어야 하고 정치는 더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은 굉장히 논리적이지만 이를 현실화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문제를 단일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저자 역시 기대하지 않는다.

게임 중독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과 인공수정 시 DNA 조작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은 미치는 파급력이나 수반되는 과학 기술에서나 차이가 크다.

이 둘을 같은 제도로 규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탄력적으로 접근하는 방법밖에 없다. - 중략 -

절대적이고 고정된 주권은 이상적인 개념일 뿐이며 늘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 상황과 환경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고 보는 게 바람직하다.

(pg 262)

정치계도 변화가 필요하고 과학계 역시 변화가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미디어와 시민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대중들의 변화도 반드시 필요하다.

제도적인 정비도 물론 중요하지만, 정치와 과학이라는 두 세력의 활동에 우리의 세금이 들어가는 만큼 진짜로 납세자들이 원하는 분야에 적정한 재원이 투입되는지, 또 그만큼의 성과를 내고 있는지를 감시할 수 있는 역량 자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문제를 포괄적이고 종합적으로 판단하려면 거듭 강조하지만 '메타인지',

즉 생각할 대상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떠올리는 능력,

직면한 과제에 가장 적합한 사고방식이 무엇인지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 중략 -

이 경우 메타인지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를 인지할 때

그 각각에 적용되는 메커니즘을 구별할 줄 알고

특정 방법이 특정 문제에 가장 적합한 이유를 헤아릴 줄 아는 능력이다.

(pg 253)

물론 제도적으로도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특히 정치중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으면서도 여러 방면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구(심지어는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국제적인 규모로도)의 구성과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환경 파괴 등 부정적인 외부효과를 창출하는 활동에 과세를 한 뒤 그 재원으로 이러한 기구를 운영하는 방법 등 구체적인 방안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후미의 참고 자료 목록을 제외하면 300페이지 후반으로 그리 두꺼운 책은 아니지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번역의 문제라기보다는 원문 자체가 문장도 길고 꽤 현학적으로 쓰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사례를 좀 길게 설명해 주면 이해에 도움이 될 텐데, 마치 자신이 이렇게나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여러 나라와 학자의 사례들을 쭉 열거하는 부분이 많아서 읽는 양 대비 머리에 남는 양이 그리 많지 않아 아쉬웠다.

다만 저자의 문제 인식에는 격렬히 공감할 수 있었고, 사회과학 저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난 문제 제기만 할 거야. 해결책은 다 같이 찾아보자고. 안녕!' 식의 결말이 아닌 적극적인 해결책 제시도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책 중간중간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 다른 학자들에 대한 디스가 꽤 많이 숨어 있다.)

과학을 주제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과학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책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정치나 사회에 관심이 많다면 사회를 보는 눈을 더 키워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주의의 역설은 주권자인 국민이 자각하면 자각할수록 개인 지식의 한계, 편향과 왜곡, 문제와 격차, 다른 분야 지식의 중요성 등을 더 많이 깨닫게 된다는 데 있다.

(pg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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