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가 능력이다 - 사람을 움직이는 설득의 힘
김영래.백경운 지음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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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강연의 목적은 모든 것을 전달한다기보다는 동기를 일으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강연에 필요한 요소는 방대한 지식이 아니라 확고한 방향성이다. (pg 48)

 

다니는 직장에서 사내 강의를 맡아 하게 되었다.

이전 직장에서 몇 번의 강의 경험이 있어 자료는 충분하지만 역시 2년쯤 손을 놓았다가 다시 잡으려니 적지 않게 부담이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접하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산업체 강사로 수년간 일해왔다는 두 명의 저자가 공저로 쓴 구두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책이다.

제목이 그냥 '말하기'이므로 딱 '강의용'에만 국한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이 책에서는 평소에 아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과 남들 앞에서 스피치를 하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말 속에 자신의 진심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기억에 남는다.

아무리 화려한 수식어를 쓰고 몸짓, 발짓까지 해가며 연설을 해도 말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그것을 믿고 있지 않다면

청중에게도 그 감정이 그대로 전해진다.

(특히 정치인들이 선거 기간에 연설을 할 때 이러한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반대로 전달 스킬이 다소 어수룩하더라도 말하는 사람이 '내가 지금 얘기하는 게 정말 중요한거야! 모두들 알고 있어야 해!' 라는

마음을 가지고 전달하면 그 마음이 청중에게 전해진다.

스피치를 할 때에는 마치 교회의 목사라도 된 듯이 자신이 믿고 있는 바가 절대적 진리라고 믿어야 그 믿음이 청중에게도 전해진다.


물론 "내가 주장하는 바가 100% 옳다, 너희들은 틀렸다."라고 우기라는 뜻은 아니다.

내가 주장한 바에 대해 청중쪽에서 반박을 하거나 이견을 제시할 경우에는 부드럽게 수용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전달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저자들에 비하면 나의 강의 경력은 매우 일천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커뮤니케이션 관련 강의를 해 본 경험 상

커뮤니케이션이 단순히 글이나 강의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도 잘 안다.

다들 어떤 말하기가 '좋은' 말하기인지는 경험적으로 충분히 알고 있다.

다만 내가 그렇게 되지 않을 뿐이다. 즉,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분야에 관한 책을 볼 때에도 크게 기대감을 많이 가지고 보지는 않는다.

특히 뭔가 새로운 방법을 발견할 거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좀 실망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았다.


일단 목차의 흐름이 자연스럽지가 않다. MECE 하지 않다고 할까?

중복되는 부분이 많아서 뒤로 갈수록 앞에서 본듯한 내용의 반복이 이어진다.

물론 말하기가 이성적 활동이 아닌 감성적 활동이라 논리적으로 정돈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면 크게 할 말은 없지만

이 책을 보는 내내 내 마음도 불편했으므로 그 또한 성공적이라 말하긴 어렵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저자 둘이 모두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책이 전반적으로 번역체로 쓰여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책에서 등장하는 사례들이 전부 외국의 사례라 딱 와닿는 느낌이 적다.

아무래도 타국어로 한 스피치를 한글로 번역하여 옮겨 적다보니 스피치의 감동이 그대로 전해질리 없다.


안그래도 본래 발언 자체의 영향력이 100이라 할 때 발언의 내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것의 7% 정도라 하는데,

그 7% 마저도 제대로 와닿지 않으니 책을 보는 내내 불편했다.

책의 후반부 부터는 문장에 비문도 많아져서 원서 여기 저기에서 내용을 따다 이어 붙인 것 아닌가 하는 의혹까지 들 정도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저자들이 썼다는 부분은 여는 글 1, 2가 전부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저자들의 강의 경력이 상당히 화려한데, 그러면 그들이 직접 체험한 강의 참가자들의 사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책에 담겨 있지 않아서 매우 아쉬웠다.

('직접 체험한 외국인의 사례'라고 생각하기엔 링컨이나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사례가 너무 많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책의 내용은 정작 "자신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라"라고 하고 있으니 저자들 스스로도 책대로 하고 있지 않은 모양새다.



글을 매우 잘 쓰는 사람이 말은 잘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다.

따라서 저자들의 강의를 들었다면 느끼는 감동이 달랐을 수 있겠다.

하지만 단연코 책 자체는 훌륭하다는 판단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배운 점들을 굳이 좀 찾자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아래부터 나오는 푸른 글씨는 모두 원문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청중 자신이 스스로의 성장을 상상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라.

듣는 사람이 당신한테서 어떤 화제에 대한 지식을 받아들인 결과 어떻게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는지,

강연이 청중 각자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자문자답 시켜 보는 것이다. (pg 83)

만약 상대를 자기의 의견에 찬성시키고 싶으면, 우선 자신이 그의 편이라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pg 124)

아쉬운 부분이 상당히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수준은 아니다.

뭐랄까...저자들의 경력 대비 많은 것들을 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느껴졌을 뿐이다.

어찌되었든 '말하기'는 일종의 스킬이기 때문에 결코 책으로는 배울 수 없다.

스스로를 항상 돌아보며 연습하는 길 밖에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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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동물 - 파국적 결말을 예측하면서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인간의 심리
더글러스 T. 켄릭 외 지음, 조성숙 옮김 / 미디어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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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 숲을 뒤지거나 무서운 포식동물을 걱정하는 대신에
차분히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의 뇌가 정교하게 발달했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pg 31)

'왜 우리는 미친 짓을 멈출 수 없는가?'

이 책의 부제로 달려 있는 문구이다.

 

미친 짓이라고 하면 다소 어감이 거칠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누구나 살다보면 자신도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 미련한 실수들을 하게 마련이다.

 

보험설계사 말만 믿고 필요도 없는 보험 상품에 덜컥 가입해버리는가 하면
좀 더 기다리면 싸게 구입할 수 있었던 물건을 충동적으로 구매해 버리거나
고심해서 산 옷을 입지도 않고 옷장에 쳐박아두기도 한다.

 

우리는 왜 이런 실수들을 하는걸까?
이 책은 두 저자가 이런 인간의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을 연구한 책이다.
나 자신도 누구보다 이성적이라 생각하며 살지만 사실은 말도 안되는 실수들을 너무도 많이 하는 터라, 어떤 내용일지 기대가 컸다.
(아래부터 나오는 푸른 글씨는 모두 원문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저자는 우선 인간의 행동의 근원이 되는 동기를 파악하는 이론적 배경 두 가지를 먼저 비교하고 있다.

 

 

전통경제학자로 불리는 학자들은 대체로 인간을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존재로 본다.
이 때 합리성의 근거가 되는 것은 단연코 경제적 이익의 극대화이다.

 

 

사람은 누구나 같은 물건을 산다면 10원이라도 저렴하게 사고 싶어한다. (물론 사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노력도 고려한다.)
하지만 이 이론적 배경으로는 인간이 행동 중 경제적 이익의 극대화와는 상관없이 결정되는 수많은 행동들을 설명해줄 수 없다.

 

책에 나오는 예시를 들면, A와 B라는 두 명의 사람에게 만원을 준다.
A에게는 돈을 나눌 수 있는 권한을 주고, B는 이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다고 해보자.
만일 B가 받아들이면 서로는 그 돈을 갖고 끝나지만, 만약 B가 거절할 경우 A와 B는 둘 다 돈을 받지 못한다.
이 경우 서로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 하려면 B는 A가 1원을 제시하더라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이익이다.
하지만 실제로 실험을 해보면 A가 불공평하게 돈을 제시할 경우 B는 차라리 둘 다 돈을 받지 않는걸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들을 바탕으로 행동경제학자들은 인간이 상황에 따라 경제적 이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비합리적'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으며 인간의 의사결정에는 다양한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행동경제학자들의 다양한 실험들로 인간이 특정한 상황 하에서 보이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의사결정들이 많이 연구되어 왔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두 사람은 이러한 행동경제학자들의 시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스스로를 진화심리학자라 부르는 연구자들은 아래와 같은 주장을 펼친다.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 종과 마찬가지로 자연선택이 현대의 인간에게 부여한 뇌는
특정 방식에 따라 결정을 내리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특정한 방식은 조상들의 유전자가 되물림될 가능성을 꾸준히 향상시켜 주었던 방식을 말한다. (pg 32)

 

 

다시 말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진화적으로 더욱 도움이 되는 선택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심층 합리성'이라 부른다.
이 논리에 따르면 행동심리학에서 주장했던 인간의 판단미스, 오류들은 실제로는 설계상 결함이 아니라
설계상 특징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특정 상황에서는 비이성적인 판단을 한다고 결론낼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진화적으로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이러한 시각은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

수년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본 실험이 기억난다.

횡단보도에서 누가 먼저 길을 건너려는 모션을 취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따라 건너려고 하는지를 관찰했었는데,

이 때 정장을 입은 남자와 캐주얼을 입은 남자로 나누어 복장에 따라 사람들의 판단이 달라지는지를 실험했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정장을 입은, 권위적으로 보이는 사람을 따라 가려는 경향이 더 강했다.

이 실험의 결과도 진화적으로 따져보면, 단순히 우리가 권위 있어 보이는 사람을 더 쉽게 따르는 경향이 있다고 결론낼 것이 아니라,

권위 있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 생존에 더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어떤 부족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할 때,

산전수전 다 겪고 부족에서 추앙받는 권위 있는 어르신의 말을 따르겠는가, 패기 넘치는 젊은 청년의 말을 따르겠는가?

어떤 선택이 생존에 도움이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납득이 갈만한 추론이다.

 

이러한 진화론적 관점은 아래와 같은 통찰을 준다.

 

첫째, 인지 편향이나 행동 편향 대부분은 진화적으로 더 깊은 기능을 지닌다.

둘째, 특정 편향의 적응 기능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그 편향이 어느 순간에 강해지고 어느 순간에 약해지는지 한결 쉽게 예측할 수 있다.

(pg 84)

 

따라서 저자는 어떤 행동의 원인을 추론할 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원인(근접인) 뿐만 아니라

좀 더 깊숙한 진화적 차원에서의 원인(궁극인)을 찾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궁극인을 찾아내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이 '부분자아'라는 개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의 자아는 단일한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하지는 않는다.

흔히 그날 기분에 따라, 컨디션에 따라, 상황에 따라 동일한 사람이지만 다른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이 '기분에 따라'라는 애매한 말 대신, 어떠한 상황에서 우리의 자아가 무엇을 더 중시하느냐에 따라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부분자아라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계속해서 다양한 도전 과제를 해결해야 했고, 그로 인해 인간의 정신은 각각의 과제 해결에 부합하도록

다양한 심리 시스템을 갖추는 진화적 결과가 생겨났다. - 중략 -

이렇게 각자 역할을 맡아 나뉜 심리 시스템이 부분자아라고 생각하면 된다. (pg 64)

 

저자는 위와 같은 부분자아가 누구에게나 최소한 다음과 같은 7개는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pg 80)

 

 

 

 

결론적으로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우리의 부분자아 중 어느 것이 활성화되어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결정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의도적으로 부분자아 중 어떤 것을 활성화 시킬 수 있다면 의사결정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타인의 부분자아의 활성화 정도를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타인의 의사결정의 방향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책의 후미에서는 이렇게 타인의 부분자아에 영향을 미쳐 교묘히 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들의 예도 들어주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진화론적으로 보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행동경제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어떠한 의사결정이 인간이 비이성적이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진화적 성향이 언제나 우리를 옳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말은 아니다.

심층 합리성은 현대 세계가 아니라 고대 세계에 맞게 계기판이 조정되어 있다. (pg 320)

 

 

우리의 자아는 단일하지 않다.

따라서 지난 의사결정을 돌아보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자책하기 보다는,

그 당시 자신의 어떤 부분자아가 그러한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반추해 본다면

동일한 상황에 다시 처하게 될 때 자신의 부분자아에 영향을 주어 보다 현명한 의사결정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물질적 욕구가 더 깊은 진화적 욕구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신용카드를 한도까지 꽉 채워 사용하기 전에

똑같은 진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다른 방법을 고민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중요한 통찰이 생겨난다. - 중략 -

우리의 뇌는 물질적 재화가 아닌 진화적 욕구를 충족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현명한 조상들처럼

오늘날의 우리도 굳이 은행 잔고를 비우지 않아도 이런 욕구를 충족시킬 능력이 충분하다. (pg 316)

 

단순히 어떤 의사결정에 대한 판단을 할 때에도, '이때는 합리적이었어', '이때는 비합리적이었어' 라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어떠한 부분자아가 의사결정의 배경이 되었는지를 파악해 본다면, 이후에는 보다 상황에 적합한 의사결정을 내릴수도 있을 것이다.

 

책 자체는 기대한만큼 재미있는 책이었다.

먼저 나같은 문외한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만큼 문장이 쉽고 명료하다.

술술 읽히는 재미가 있으면서도 (나에게는) 새로운 시각이 가득해서 읽고난 후 얻는 것도 많았다.

 

예시나 실험 결과들도 매우 흥미로웠다.

일부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예를 들면 성별에 따라 이성에게 어필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주장 등)

전반적으로는 아주 논리적으로 전개되어 쉽게 이해가 갔다.

그러면서도 곳곳에 유머러스한 표현들을 집어넣어 책이 지루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누구에게든 '요즘 뭐 읽을만한 책 없어?'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딱 추천해 줄 수 있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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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질문 김영사 모던&클래식
로버트 노직 지음, 김한영 옮김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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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모든 사랑에는 공통점이 있다.

나 자신의 안녕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의 안녕과 긴밀히 묶여 있는 것이다. (pg 91)

 

 

책의 저자인 '로버트 노직'은 최근 신정완 교수의 저작과 강의를 접하면서 친숙해진 이름이다.

자유주의 대표 사상가로 알려져 있어서 저작을 한번 보고 싶었는데 우연치않게 기회가 닿아 접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자유주의를 그다지 옹호하지 않는 입장이지만,

내 나이에 이미 하버드대 철학과 정교수가 된 자의 책이라면 무언가 배울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특히나 책의 주제인 '삶'이라는 것을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아래부터 나오는 푸른 글씨는 모두 원문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많은 사람들이 부제인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질문'이라는 말에 낚여서 이 책이 마치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담고 있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차용했을 뿐이지, 책 자체는 오로지 로버트 노직 본인의 사상을 담고 있다.

물론 본인의 사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다양한 다른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이 등장하지만 책의 핵심은 삶에 대한 로버트 노직의 사상이다.

(따라서 이 책을 보고 소크라테스 운운하는 사람들은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제목을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책은 '삶'에 대한 사색이 담겨 있는 책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누구나 궁금해하지만 누구도 답해줄 수 없는 이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이 26개의 소주제들로 묶여 있다.
이 소주제들은 마치 저자가 생각나는대로 써 나간듯이 배치되어 있어 얼핏 크게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부분부분 발췌해서 읽기 보다는 한 흐름으로 쭈욱 읽어가야 하는 책이다.

 

저자는 일상생활에서부터 생각을 전개해 나간다.

흔히 행복한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꼽고는 한다.

하지만 저자는 죽음, 사랑, 일상 등을 다루면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생의 목적인 행복한 삶이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또한 쾌락이나 행복은 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삶, 어리석은 쾌락이나, 소처럼 둔감한 만족이나,

경솔한 재미로만 채워진 삶, 행복하지만 피상적인 삶 등을 고려할 때,
쾌락이나 행복보다 더 큰 무엇인가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pg 140)
얼핏 그럴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무엇이 더 중요한걸까?

저자는 사고의 흐름에 따라 쭉 논리를 전개해 나가지만 짧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행복과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삶, 그러한 자아다. (pg 164)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저 그것들에서 즐거움을 얻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정말 그렇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것들이 정말 그렇다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들이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우리는 단지 그것들이 그렇다는 생각에서 즐거움을 얻지 않는다. (pg 147)

이게 뭔소리야 싶지만, 저자는 자아, 실재의 향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신의 실재를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과의 소통, 세상의 다른 존재들과의 소통이 필요하고,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추구하고자 하는 바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어떤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로 해야할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현재 우리가 무엇에 집중하는가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영향을 받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개인은 그가 어디에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가에 따라 구체적인 모습이 형성된다. (pg 171)

 

저자는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것들을 주욱 나열한 다음, 이를 목록표로 정리하는 작업도 하고 있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사진 pg 267)

사실 이 표보다 더욱 완성된 형태도 책에 제시되어 있는데, 이 표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저자가 이 표 자체를 삶의 정답으로 내세우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미리 정해진 척도에서 위로 이동할 때가 아니라,

실재의 차원들을 결합하고 드러내는 우리만의 새로운 방법을 찾고 발명할 때 가장 진실해진다.
우리 자신의 특징과 기회를 활용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삶을 형성해 실재의 차원들 속에서 특별한 궤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중략-
우리 각자는 최소한 은연중에라도 자신의 도표를 만들어야 하고, 상호 연결된 실재의 본성을 이해하고 살아야 하며,
도표에 추가하고 탐구하고 대응하고 우리 삶에 통합된 새로운 차원들을 식별해야 한다. (pg 295-296)

 

 

결국 우리 스스로가 위의 표처럼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들의 목록들을 만들고 이를 성실히 추구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것들을 추구해야 하는지가 결정되면 어떤 것들을 얼만큼 추구할 것인가도 선택의 여지로 남는다.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들의 이상적인 한계라는 것이 사실상 무한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무한대로 추구해가다 보면 결국 신의 존재에 도달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신은 존재의 기원이나 그 이전의 원인이 아니라 그 목표이고, 존재가 움직이고 작동하는 지향점인 것이다.

존재가 도달하는 곳은 신이 되는 것이다! (pg 264)

 

 

하지만 위 구절이 결코 '모두가 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자!'의 의미는 결코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착실히 추구하여 신에 근접한 예수나 석가모니같은 성인들이 있었다.

그 성인들은 우리같은 범인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지만 모두가 그런 삶을 모델로 삼아야 하는가는 사실 다른 문제라고 말한다.

 

더 큰 실재를 향한 이동은 어두운 길을 따를 필요는 없지만, 행복 원칙에서는 멀어질 수도 있다. (pg 293)

 

우리는 두 가지 유혹, 즉 성인이고 싶은 유혹과 인간이고 싶은 유혹을 충분히 그리고 똑같이 느끼지 않을까? (pg 365)

 

사실 성인들의 일대기를 보면 이들이 보통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삶을 산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위해 살아갔으므로 행복했을 것이라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정말로 '행복'하기만 하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리 살아가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성인의 삶이 정말 행복할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저자는 따라서 모두가 성인으로 살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저 자신의 일상 속에서 자신의 실재를 향상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법륜스님의 책에서 본 생활 속의 수행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과적으로 책 자체는 참 괜찮았다.

별점이 다소 적은 이유는 역시나 이 책의 난이도 때문이다.
일단 가치, 의미 등 추상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머릿속에 확 와닿는 느낌 자체가 좀 적으며 문장 자체도 상당히 어렵다.
분명히 국어인데도 문장을 서너번 읽어야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번역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냥 원문 자체가 어려웠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흔한 말로 진도가 참 더디게 나가는 책이었고,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불쑥불쑥 들었다.

 

이해의 어려움은 물론 내가 가진 기초 지식의 함량 미달에 그 원인이 있겠지만, 누구에게든 쉽게 권해줄만한 책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출퇴근 시간 지하철 같은 곳에서 읽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생각되며 장시간 책상 앞에 정자세로 앉아 차근차근 읽어가야 할 책이다.

 

하지만 다 읽고 났을 때 건질것은 상당히 많을 것이다. (뭔가 모를 뿌듯함도 느껴진다!)

특히 본인의 이해 정도에 따라 삶에 대한 풍부한 사색을 하게 해주는 책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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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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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작가의 소설은 위풍당당, 왕을 찾아서 이후 세 번째이다.

저자의 작품을 아주 많이 접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글을 읽을 때면 내가 한국어를 모국어로 한다는 것이 즐겁게 느껴질 때가 있어 좋다.

저자의 문장력이야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이전에 본 두 책과 비교하면 상당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투명인간'이라는 제목과 책 표지의 그림 만으로도 이 책이 '인간 소외'를 다루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들었다.

그 예상은 기분 좋게 맞아 떨어졌지만, 역설적이게도 막상 마지막 책장을 덮었는데 속에 무언가 씁쓸한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아

도무지 한잔 걸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이책은 '김만수'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전후 세대로 태어나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삶을 한 편의 영화처럼 보여주고 있다.

 

 

 

 

전개부터가 상당히 색달라서 내용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형식에 관한 이야기도 해야 할 것 같다.

'주인공'이라 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김만수라는 남성이지만

주인공이 직접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거니와 한 인물이 주인공을 쭉 관찰하고 있지 않다.

학창시절에 들은 용어로 표현하면,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쭉 진행되지만 그 관찰자가 계속 바뀐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김만수라는 인물이 태어날 때부터 지켜보던 조부모부터 부모, 형제, 회사 동료, 심지어는 지나가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김만수라는 인물을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등장하는 듯하다.

 

 

 

모두들 '나'로 지칭
되는 3인칭 관찰자들이 저마다 자신이 보는 시각에서 김만수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각 등장인물 별로 매우 주관적인 시각으로 김만수를 보게 되므로 그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을 달린다.

신기한 것은, 이러한 주관적인 평가들이 모이고 모이면, 독자들의 머릿속에는 김만수라는 인물이 직접 자신을 설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객관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상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아래부터는 소설의 줄거리를 일부 담고 있으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푸른색 글씨는 원문 발췌임을 밝힌다.)

 

 

 

 

김만수라는 인물은 태어날때부터 비쩍 마른 몸에 커다란 머리를 달고 태어났다.

머리도 썩 명석하지 않아 친구들은 물론이요 친동생에게도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타고난 선함과 부지런함이 있었다.

이를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순하디 순하고 착하디 착한 사람이지만,

이를 볼 수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멍청하고 미련한 사람일 뿐이었다.

소설 초반에는 ​길도 나 있지 않은 시골에서 비록 하루하루 먹을 것 걱정을 하며 살았지만

그래도 행복했던 그의 유년기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내가 겪은 시절은 아니지만 시골 출신인 양친이 술안주삼아 들려주던 이야기와 비슷해서 무언가 모를 따뜻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따뜻함도 잠시, 소설의 중반을 넘어서면 작가는 서슬퍼런 현실의 칼날을 들이댄다. ​

 

 

 

집안의 큰 재산이던 소까지 팔아 대학을 보냈던 집안의 장남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고엽제 피해로 사망하게 되면서

온 가족들이 바뀌게 된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장남이 사라진 것이다.

 

 

 

졸지에 장남이 되어버린 만수는 가족들을 책임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독재정권 치하에 있을 때에도, 온 나라가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요동치고 있을 때에도 그는 오로지 가족만을 위해 살아간다.

​다니던 회사가 부도났을 때에도, 7명의 동료들과 함께 회사를 지켜내려 한 투쟁의 결과로 억대의 빚을 지게 되었을 때에도,

​남동생이 연락이 끊기고 처음 보는 여자가 동생의 아들이라며 왠 아기 하나를 주고 갈 떄에도...

수많은 고난이 그를 찾아왔지만 만수는 이 모든 것들을 그저 수용하고 살아간다.

 

 

정권이 바뀌든지 말든지, 독재정권이든지 문민정부이든지 그를 둘러싼 현실에는 변화가 없었다.

만수가 하루 20시간에 달하는 노동을 하며 살아갈 때에도 그의 가족들은 제 살길을 찾아 가고 때로는 아주 등을 돌려버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래도 굶어죽지 않음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이 미련한 캐릭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사실은 사회라는 시스템이 가져다 주는 온갖 불합리함의 절대적인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살다보면 볓 들 날이 있겠지'라는 식의 삶...
또한, 만수를 둘러싼 여러 등장인물들 중 흔히 '의식을 가진 존재들'로 분류되는 만수의 할아버지와 큰형인 백수,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여동생과 매제의 불행한 삶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책을 덮고서 너무도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뒤엎었다.
현실은 개인을 동정하지 않으니 신념을 지키며 사는 삶 따위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인가.
만수의 여동생이 한 말 중 한 구절이 가슴에 꽃혔다.

 

 

 

"오빠, 사람은 꼭 앞으로 나가기만 해야 될까요?
그냥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 가치가 세상과 어긋난다 하더라도 그걸 가지고 그냥 살면 안되는 것일까요?"
 

 

이성은 믿음과 이상을 추구하라 하지만 소설은 이상을 추구한 이들의 손에 절망을 쥐어 주었다.
소설은 만수처럼 '믿음' 자체도 사치스러울만큼 악착스레 현실을 살아간 이들의 손에도 절망을 한 웅큼 쥐어 주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수 없는 꼭두각시들인가?
우리가 어떻게 살든 가진 자들은 배를 두드리고 없는 사람들은 평생 없이 살텐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의 삶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가?

 

글쎄...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러 만수의 입에서 나온 말을 옮겨보면 저자가 하고 싶던 말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죽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사는 게 훨씬 쉽다.
나는 한번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현실이 이상과 다른 것은 물론이요 오히려
비루하고 남루할지라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저자는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투명인간'이라는 단어로 표현된 인간.
단순히 SF영화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있든지 없든지 상관이 없어져 타인에게 인식되지도 않게 된 인간.
이런 인간들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면서 답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이 책이 지닌 독특한 서술 덕분에 다른 작품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묘한 감칠맛이 있었다.

특히나 한 관찰자의 서술이 한 반 정도 지나기까지 그 인물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나도 모르게 저자의 문장 속에 집중하며 빠져들게 된다.

그들의 눈에 비친 만수는 너무도 제각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만수 그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 살았던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에 대한 흐릿한 그림도 보여주고 있다.

 

뭔가 이번 소설의 느낌은 참 차가웠다.

작가가 정말 사랑하는 캐릭터를 만들어둔 뒤 이 캐릭터가 마음껏 절망할 수 있도록 차디찬 현실에 내 던져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저자가 의도한 차가움이라기 보다는 이 현실 자체가 가진 차가움을 그저 담담히 이야기했을 뿐이라는 것 말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죽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사는 게 훨씬 쉽다.
나는 한번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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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시대 십대는 소통한다 - 네트워크화 된 세상에서 그들은 어떻게 소통하는가
다나 보이드 지음, 지하늘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인상깊은 구절

"인터넷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상이며 그 거울은 우리가 보는 것을 비출 것이다.

우리가 거울 속에 보이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거울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고치는 것이다."

- 컴퓨터과학자 빈트 서프

 

 

사회 생활이라는 것을 시작한지 크게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대학생들과 함께 할 일이 많았다.

지금은 아예 대학이라는 공간에 있으니 대학생들과 함께 호흡하며 살고 있다.

그들과 크게 나이차이가 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들의 삶과 나의 삶에 큰 괴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고, 대학생이 되기 전 십대를 이해한다면 그들을 이해함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들어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소셜 미디어(SNS)를 대하는 십대들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스마트폰이 바꿔놓은 풍경이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마 지하철 안의 모습일 것이다.

사실 지금은 애고 어른이고 모두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지만,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뭔가 걱정이 될법하다.

어른의 눈을 통해 본 십대는 늘 휴대폰 속에서 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뭐 그리 대단한 정보를 탐색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카톡에 카스에 페이스북에 트위터에 휴대폰 안에서도 이리저리 한참을 떠돈다.

 

저자는 미국의 연구원으로서 미국 각지를 돌며 계층, 연령, 성별에 따라 많은 십대들을 직접 만나보고 연구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속칭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걱정과 오해에 대한 반박을 제시하고 있다.

(아래부터 나오는 푸른 글씨는 모두 원문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아래부터는 '어른들'이라는 속칭 대신 '기존 세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먼저 일반적인 면대면 소통에 비해 SNS 소통이 갖는 특징이 있다.

온라인에는 한번 뱉은 말이 내가 의식적으로 지우기 전까지는 항상 남아있게 되고 (지속성)

내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다. (가시성)

또한 클릭 한번, 터치 한번으로 쉽게 공유가 가능하며 (퍼짐성)

누군가가 검색엔진에 키워드를 입력함으로써 의도치않게 노출될 가능성도 있다. (검색성)

 

이러한 특징들은 기존 세대들에게는 굉장히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이로 인한 다양한 걱정들이 생겨나게 된다.

실제로 최근에는 뉴스에서도 어떤 사건을 다룰 때 해당 사람의 온라인 흔적들을 많이 언급한다.

자살한 이의 SNS에서 왕따에 대한 내용을 찾아낸다던가, 살인 용의자가 온라인에서 반사회적인 글들을 검색했다거나,

폭력 혐의자가 폭력적인 게임을 즐겨했다는 등의 내용은 우리가 매일 뉴스에서 접하는 것들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걱정들을 유형화하여 아래와 같은 목차로 정리하고 있다.

1. 정체성: 왜 십대는 온라인에서 이상해 보이는가?

2. 사생활: 왜 십대는 그토록 공개적으로 공유하는가?

3. 중독: 십대는 무엇때문에 소셜 미디어에 집착하는가?

4, 위험: 성범죄자는 모든 곳에 숨어 있는가?

5. 왕따: 소셜 미디어가 비열함과 잔인함을 증폭시키는가?

6. 불평등: 소셜 미디어가 사회 분열을 해소할 수 있는가?

7. 해독능력: 오늘날의 십대는 디지털 네이티브인가?

 

하지만 저자는 기술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이득도, 해로움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 기술을 쓰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십대들이 SNS에 빠져있는 현상의 이유를 '중독'이라는 단어 대신 '사회'라는 단어로 분석하고 있다.

 

십대는 직접 만나는 것을 훨씬 선호한다고 지속적으로 내게 이야기했지만,
빡빡하게 짜인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일상 생활과 이동의 제한, 부모의 두려움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을 더욱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중략-
거의 항상 소셜미디어를 향한 그들의 열정은 사람을 사귀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다.
대부분의 십대는 소셜 미디어에 중독되어 있지 않다. 뭔가에 중독되어 있다면, 서로에 중독되어 있다.

 

결국 십대도 '사회적 동물'로서 주변과 소통하고 싶어할 뿐이라는 것이다.

 

십대들은 자신의 방 그 너머의 세상을 이해하게 해줄 자신만의 공간을 찾고 있다.
소셜 미디어는 그들의 참여를 유도하며 우리가 '네트워크화된 대중'이라 부르는 것을 형성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십대들의 욕구는 당연한 것이며 기존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걱정의 대부분이 지나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컴퓨터 스크린으로 밝혀진 십대의 얼굴은 예전 십대를 끌어들이던 TV의 흥미로운 불빛과 닮았다.
예전의 부모들은 십대가 놀러 다니거나 친구들과 통화하느라 시간을 낭비한다며 초조해 했다.

나는 부모들이 자녀가 '실제' 사람보다 컴퓨터를 더 선호한다며 불평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한편, 내가 만난 십대들은 친구들과 직접 만나는 것을 훨씬 선호한다며 반복적으로 대답했다.

 

종합해보면, 십대들이 친구를 만들며 또래집단에 소속되고 싶어하는 감정 자체는 인간 본연의 감정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린 시절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데 이를 위해 이용하는 기술 자체가 달라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이 과연 기술에서 아이들을 억지로 떼어놓는 것인지,

아니면 그 기술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들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인지를 저자는 묻고 있다.

 

나는 온라인에서 교제하는 것이 십대의 뇌를 재설계하고 있다는 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믿는다.
소셜 미디어에 대한 참여를 통해 십대는 깊게 네트워크화되고 서로 뒤엉킨 세상에 대해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발전된 기술이 무조건 옳다고 옹호하는 입장인 것은 아니다.

저자는 기술에 대한 걱정 뿐만 아니라, 기술의 발전을 너무도 이상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기술을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의 십대들이 그렇듯이 태어나면서부터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던 세대들은

자연히 디지털 세상을 이해할 것이라 믿는 것도 매우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청소년을 디지털 네이티브라 보는 것은
우리가 사회로서 해야 하는 것의 전부는 그저 인내심을 갖고 이 디지털 신동의 세대가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자유방임주의적 태도는 계속해서 나타나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다.

 

단순히 페이스북을 사용할 줄 아는 것과 디지털 세상을 정확히 읽어내는 능력은 결코 같을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사회적, 인종적, 계층적 차이가 그러한 능력의 차이에도 영향을 준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학교에서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아이와

집, 버스, 지하철 어디서든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아이는 정보 처리 능력에 격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인터넷 세상이 되었어도 기존의 불평등이 그대로 이전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실제로 '정보화 사회'를 표방하면서 정보의 자유로운 이동 때문에 불평등이 상당히 해소될 것이라 기대하는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저자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항상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소셜 미디어는 인종차별과 심한 편견을 포함한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을 극대화한다.
어떤 이들은 소셜 미디어를 이용해 무감각하고 악의담긴 의견을 피력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같은 기술을 이용해 자신이 느끼기에 사회의 예절을 위반하고 있는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망신시키고 때론 협박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인종 갈등이 극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지역적 대립은 상당히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온라인 상에서도 특히 일베를 위시한 경상도 네티즌들의 호남 비하는 상당히 우려할만한 수준인데,

이를 십대가 무심코 접하게 되면 이 시각이 그대로 자신의 가치관이 되어 편견을 확대재생산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더욱이 인종 갈등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주 노동자와 이로 인한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에 대한 편견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터넷 세상에서의 십대가 이러한 편견들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을 거슬러갈 수는 없다.
이제와서 다시 카톡 대신 문자를 쓰는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이러한 기술 발전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요 주장이었다.
 

"인터넷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상이며 그 거울은 우리가 보는 것을 비출 것이다.
우리가 거울 속에 보이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거울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고치는 것이다."
- 컴퓨터과학자 빈트 서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기술 자체는 문제도, 축복도 아니며,
결국은 기술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달려있음을 저자는 마지막까지 강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상당히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이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도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SNS 이외에 게임에 몰두하는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게임이 각종 폭력 사건들에 영향을 준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살인적인 스케줄에 자살까지 고려하는 청소년들에게 이동 시간에서도 즐길 수 있는 게임은 고마운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뭔가 게임에는 SNS가 가지는 '소셜'이라는 요소가 상당부분 빠져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친구들과 어울려 게임을 즐길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게임은 사람과 기계의 상호작용이기 때문이다.

 

또한 십대들이 서로를 만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SNS에 접속되어 있는 현상도 이 책을 통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저자에 따르면 십대들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SNS를 한다는 것인데 이 설명만으로는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SNS에 빠져있는 모순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굉장히 길게 쓴 듯 하지만 전체적으로 책 자체의 메시지는 간결하고 분명하다.

특히 저자가 실제로 만나보고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가고 있어서 그런지 전반적으로 신뢰가 갔다.

 

하지만 별점을 좋게 줄 수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 번역(혹은 편집?) 때문이다.

정말 단어 하나하나 영어로만 바꾸면 그대로 원문으로 되돌릴 수 있을 정도의 직역에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분명 국문임에도 불구하고 영어 수업처럼 주어, 동사 찾아가며 해석해서 읽어야 한다.)

 

게다가 오탈자는 왜 그리도 많은지, 처음에는 오탈자가 참 많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읽다 보면 특히 조사 부분에서 오류가 많은 것으로 볼 때 번역한 사람이 한국말을 잘 못하는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300페이지짜리 책을 읽으면서 서른개까지 찾은 뒤 숫자를 못 세었으니 여튼 최근에 본 책 중에 가장 심했다.

 

이걸 번역한 사람의 탓이라 해야할지 그걸 그대로 실은 편집자의 탓이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여튼 그 때문에 책에 집중이 잘 안되었다.

참신한 주장을 담고 있어서 색다른 기대를 가지고 읽었는데 내용 외적인 부분에서 실망스러운 부분이 너무 커 내심 안타까운 책이다.

마지막으로 책에 담긴 저자의 연구 결과는 상당히 재미있는 편이었고 나에게는 색다른 시각을 주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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