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평점 :
성석제 작가의 소설은 위풍당당, 왕을 찾아서 이후 세
번째이다.
저자의 작품을 아주 많이 접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글을 읽을 때면 내가 한국어를
모국어로 한다는 것이 즐겁게 느껴질 때가 있어 좋다.
저자의 문장력이야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이전에 본 두 책과 비교하면 상당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투명인간'이라는 제목과 책 표지의 그림 만으로도 이 책이 '인간 소외'를 다루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들었다.
그 예상은 기분 좋게 맞아 떨어졌지만, 역설적이게도 막상 마지막 책장을 덮었는데 속에 무언가 씁쓸한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아
도무지 한잔 걸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이책은 '김만수'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전후 세대로 태어나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삶을 한
편의 영화처럼 보여주고 있다.
전개부터가 상당히 색달라서 내용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형식에 관한 이야기도 해야 할
것 같다.
'주인공'이라 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김만수라는 남성이지만
주인공이 직접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거니와 한 인물이 주인공을 쭉 관찰하고 있지 않다.
학창시절에 들은 용어로 표현하면,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쭉 진행되지만 그 관찰자가
계속 바뀐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김만수라는 인물이 태어날 때부터 지켜보던 조부모부터 부모,
형제, 회사 동료, 심지어는 지나가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김만수라는 인물을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등장하는 듯하다.
모두들 '나'로 지칭되는 3인칭 관찰자들이 저마다 자신이 보는 시각에서 김만수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각 등장인물 별로 매우 주관적인 시각으로 김만수를 보게 되므로 그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을 달린다.
신기한 것은, 이러한 주관적인 평가들이 모이고 모이면, 독자들의 머릿속에는 김만수라는 인물이
직접 자신을 설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객관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상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아래부터는 소설의 줄거리를 일부 담고 있으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푸른색 글씨는 원문 발췌임을 밝힌다.)
김만수라는 인물은 태어날때부터 비쩍 마른 몸에 커다란 머리를 달고 태어났다.
머리도 썩 명석하지 않아 친구들은 물론이요 친동생에게도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타고난 선함과 부지런함이 있었다.
이를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순하디 순하고 착하디 착한
사람이지만,
이를 볼 수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멍청하고 미련한 사람일
뿐이었다.
소설 초반에는
길도 나 있지 않은 시골에서 비록 하루하루 먹을 것 걱정을
하며 살았지만
그래도 행복했던 그의 유년기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내가 겪은 시절은 아니지만 시골 출신인 양친이 술안주삼아 들려주던
이야기와 비슷해서 무언가 모를 따뜻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따뜻함도 잠시, 소설의 중반을 넘어서면 작가는 서슬퍼런 현실의 칼날을
들이댄다.
집안의 큰 재산이던 소까지 팔아 대학을 보냈던 집안의 장남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고엽제 피해로 사망하게 되면서
온 가족들이 바뀌게 된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장남이 사라진 것이다.
졸지에 장남이 되어버린 만수는 가족들을 책임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독재정권 치하에 있을 때에도, 온 나라가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요동치고 있을 때에도
그는 오로지 가족만을 위해 살아간다.
다니던 회사가 부도났을 때에도, 7명의 동료들과 함께 회사를 지켜내려 한 투쟁의
결과로 억대의 빚을 지게 되었을 때에도,
남동생이 연락이 끊기고 처음 보는 여자가 동생의 아들이라며 왠 아기 하나를 주고
갈 떄에도...
수많은 고난이 그를 찾아왔지만 만수는 이 모든 것들을 그저 수용하고
살아간다.
정권이 바뀌든지 말든지, 독재정권이든지 문민정부이든지 그를 둘러싼 현실에는 변화가
없었다.
만수가 하루 20시간에 달하는 노동을 하며 살아갈 때에도 그의 가족들은 제 살길을 찾아 가고 때로는 아주 등을 돌려버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래도 굶어죽지 않음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사실은 사회라는 시스템이 가져다 주는 온갖 불합리함의 절대적인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살다보면 볓 들 날이 있겠지'라는 식의
삶...
또한, 만수를 둘러싼 여러 등장인물들 중 흔히 '의식을 가진 존재들'로 분류되는 만수의 할아버지와 큰형인 백수,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여동생과 매제의 불행한 삶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책을 덮고서 너무도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뒤엎었다.
현실은 개인을 동정하지 않으니 신념을 지키며 사는 삶 따위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인가.
만수의 여동생이 한 말 중 한 구절이 가슴에 꽃혔다.
"오빠, 사람은 꼭 앞으로 나가기만 해야 될까요?
그냥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 가치가 세상과 어긋난다 하더라도 그걸 가지고 그냥
살면 안되는 것일까요?"
이성은 믿음과 이상을 추구하라 하지만 소설은 이상을 추구한 이들의 손에 절망을 쥐어 주었다.
소설은 만수처럼 '믿음' 자체도 사치스러울만큼 악착스레 현실을 살아간 이들의 손에도 절망을 한 웅큼 쥐어 주었다.
우리는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수 없는 꼭두각시들인가?
우리가 어떻게 살든 가진 자들은 배를 두드리고 없는 사람들은 평생 없이 살텐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의 삶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가?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러 만수의 입에서 나온 말을 옮겨보면 저자가 하고 싶던 말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죽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사는 게 훨씬 쉽다.
나는 한번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현실이 이상과 다른 것은 물론이요 오히려 비루하고 남루할지라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저자는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단순히 SF영화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있든지 없든지 상관이 없어져 타인에게 인식되지도 않게 된 인간.
이런 인간들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면서 답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이 책이 지닌 독특한 서술 덕분에
다른 작품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묘한 감칠맛이 있었다.
특히나 한 관찰자의 서술이 한 반 정도 지나기까지 그 인물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나도 모르게 저자의 문장 속에 집중하며 빠져들게 된다.
그들의 눈에 비친 만수는 너무도 제각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만수 그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 살았던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에 대한 흐릿한 그림도 보여주고 있다.
뭔가 이번 소설의 느낌은 참 차가웠다.
작가가 정말 사랑하는 캐릭터를 만들어둔 뒤 이 캐릭터가 마음껏 절망할 수 있도록
차디찬 현실에 내 던져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저자가 의도한 차가움이라기 보다는 이 현실 자체가 가진 차가움을 그저 담담히
이야기했을 뿐이라는 것 말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죽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사는 게 훨씬 쉽다. 나는 한번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