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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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요. 박사님, 아시죠. 우리는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답니다...

나 자신도 그래요...그리고 어느 날, 그만두게 되죠." pg 307


작가가 이쪽 분야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작가라는데 소설을 잘 보지 않는 나는 처음 접하는 작가였다.

이 책을 덮고 나서는 좋은 작품을 하나 읽었다는 뿌듯함과 함께 엄청난 작가 한 명을 알게 되었다는 기쁨이 더해졌다.


소설을 평하자면 부득이 스토리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스토리를 정리하려면 사건 위주로 정리해야 할 터인데, 이 책의 사건은 매우 단순하다.

아래는 출판사에서 책을 소개하면서 정리한 내용이다.

(출처: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496649)


시골에서 사는 열두 살 소년 앙투안. 그는 우연한 사고로 동네 꼬마를 죽이고 만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앙투안은 숲에 꼬마의 시체를 숨긴다. 시체는 결코 발견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 12년이 지나도록. 이제 앙투안은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그날의 기억에서 슬슬 떠나도 좋은 것일까? 이때 갑자기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고향에 내려가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생기는데......


책에서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은 사실 저게 다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게다가 저 사건은 책의 초반부에 등장한다.

저 사건을 알고 책을 읽기 시작해도 책이 주는 흥미는 전혀 반감되지 않는다.

이 책의 묘미는 핵심이 되는 사건 자체가 주는 충격보다는(물론 충격적인 사건이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변화하는 주인공의 심리상태 묘사에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열두 살 남자아이라면 학교 다니면서 한두번씩은 크고 작은 싸움에 휘말릴 수 있는 나이다.

만 나이가 아닌 한국 나이로 치면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 정도가 될 테니 살면서 가장 겁이 없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 때 내가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여튼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어떤 심경이었을까?


그 시기에 앙투안은 의도치않게 한 꼬마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딱 한 번이었다. 분을 참지못해 엉뚱한 상대에게 터뜨린 분노의 한 방.

게다가 자신이 싫어하거나 모르던 누군가도 아니고 그 자신도 아끼던 이웃 동생이었다.


그 후 앙투안이 겪는 공포와 불안이 가히 압도적인 문체로 묘사되어 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동들이 다 그 사건을 파헤치기 위한 행동처럼 느껴지는 상태가 지속된다.

그러다 발각되기 전에 삶을 마감하는 것이 어떨까 싶기도 하고 사람들이 발견 못하는 것 같으니 조용히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마치 작가가 진짜 살인을 해보고 적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만약 내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나도 이런 심리상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들키면 자신의 파멸은 물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의 삶도 끝내버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

그 불안감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앙투안도 나이를 먹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끔은 그 사건을 잊고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룬 것이 많아질수록 그 사건은 불쑥 머릿속에 찾아와 앙투안을 괴롭힌다.

그 동안 노력한 것이 한 순간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역사 속 최악의 영아 살인마로 기록될 시나리오까지.


누구나 자신이 이룩한 것이 어느 정도이든지 간에 공감이 될만한 것들이었다.

특히나 야밤에 발생하는 교통사고의 경우 가해자가 뺑소니 치고 도망가는 사건이 많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운전자들의 심리가 앙투안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까지 겪게될 고통에 대한 공포로 피해자측의 고통은 외면하게 되는 그런 심리.


이후 앙투안이 살게 되는 삶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아래에는 소설의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보지 않기를 권한다.)

그는 자신의 과오에서 진정으로 해방되려면 고향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고 준비도 거의 끝나간다.

하지만 그러다 또 한 번의 실수를 저지른다. 어릴 적 로망이었던 여인과의 단 한 순간의 접촉.

그로인해 그는 자신의 과오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그 마을에 잡혀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인생을 살게 된다.

법적인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혐의가 모두 없어졌다고 하기도 어려우며 때문에 불안감은 지속되고

그 곳을 떠나 그 사건을 아주 잊어버릴수도 없는 그런 삶.

오히려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더 긴 형벌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작가는 처벌받지 않은 '운좋은 완전범죄'를 묘사하기 보다는,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는 법적인 처벌 유무에 관계없이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까지 다 보면 이 사건을 둘러싼 전말이 모두 밝혀지면서 '와, 이 작가 정말 장난 아니구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요. 박사님, 아시죠. 우리는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답니다...

나 자신도 그래요...그리고 어느 날, 그만두게 되죠." pg 307


인상깊은 구절로 이 구절을 택한 이유는 책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대사에 불과하지만

책을 다 본 사람들이라면 잊을 수 없는 구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스토리 구성 역량이 여기서 폭발적으로 느껴졌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 작품의 영화화를 준비하고 있다는데 만약 영화로 나온다면 이 대사를 누가 어떻게 하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사건이 워낙 초반에 나오고 중반까지는 별다른 사건 없이 앙투안의 심경 변화 위주의 서술이 진행되다보니 약간 지루할 수 있다.

하지만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다시 긴장감이 고조되며 책이 그리 두껍지 않아서 순식간에 읽어간 책이었다.

(이건 저자의 잘못은 아니지만, 요즘 책 답지 않게 중간중간 오타들이 눈에 많이 띄는 편이어서 아쉬웠다.)

책을 덮자마자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 장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좋은 작가와의 만남은 좋은 선순환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책을 보는 즐거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새삼 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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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합니다, 동네 바보형이라는 말 - 한국에서 10년째 장애 아이 엄마로 살고 있는 류승연이 겪고 나눈 이야기
류승연 지음 / 푸른숲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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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우리는 서로 반대편 길로 향하지만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저들과 내가 사는 세상이 같은 세상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세상은 버스와 달리 안과 밖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

저들은 내 세상의 일부이기도 하고 나는 저들 세상의 일부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다. 그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pg 199)



직장 근처에 지적장애인들을 위한 특수학교와 장애인 직업재활센터가 있다.

그덕에 장애인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출퇴근 길에 장애인들과 보호자들을 자주 만난다.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이곳에서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내 팔목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당시 나는 20대 후반의 건장한 남성이었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한 지적장애인 학생이 내 옷을 움켜쥐고 있었다.

지금에서 하는 추측이지만, 그 때 내 옷의 재질이 약간 반짝거리는 소재여서 그랬던 모양이다.

아는 사람이겠지 싶었던 터라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신호가 바뀌고 옆에 있던 학생의 어머님이 그 상황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손을 치우며 재빨리 사과하셨다.

그때까지도 당황스러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아닙니다' 한마디를 못했고, 그 어머님은 학생을 데리고 길을 건너가 버렸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위 경험이 30대 중반인 지금까지도 중증 장애인을 직접적으로 접한 최초의 사례이자 마지막 사례이다.

그 뒤로는 지나가면서 보긴 했어도 직접적인 접촉이나 말을 섞거나 부딪혀본 경험도 전무하다.

그랬기 때문에 그 때 그렇게 당황했던 것 같다.

일반적인 생면부지의 남학생이 그랬다면 시비의 의도로 받아들였을 것이고 아는 사람이었다면 친근함의 표시로 받아들였을텐데

윗 사례는 어떤 의도로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당황했었던 모양이다.

난 그때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까?


이렇게 가벼운 질문으로 접하게 된 책이다.

하지만 책을 다 본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의문으로 책을 접한 것이 저자에게 미안할 정도로 나의 장애인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기자 출신인 저자는 10년 전 쌍둥이를 출산했다.

이란성 쌍둥이였는데 첫째인 딸은 정상이었지만 둘째 아들이 발달장애인 판정을 받게 되었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서 저자는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아이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장애 판정을 받고 일반학교를 거쳐 현재 다니고 있는 특수학교에 들어가기까지 저자와 가족들이 겪게된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러면서 아직도 부족하기만한 장애인 복지 제도와 사람들의 장애에 대한 깊은 편견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장애인 복지뿐만 아니라 이 나라 자체가 '복지'라는 단어와 썩 잘 어울리는 나라는 아니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충격적인 뉴스 축에도 끼지 못한다.

그 중에서도 장애인 복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실제 장애인 복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 입장에서 담당 공무원도 잘 모르는 복지제도를 찾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는 과정이 얼마나 지치고 고된 일인가를 잘 보여줌으로써 무엇이 문제인지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사실 복지제도라는 것은 단기간에 보완되기 어렵다.

최근에 이슈가 되는 아동수당만 보더라도 해당 가정에 10만원이 지급되는 간단한 제도임에도 

관련 뉴스 댓글 속 사람들의 생각은 천차만별이다.

각자가 생각하는 복지의 개념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흡한 복지제도 만큼이나 장애인과 그 가족들을 괴롭히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편견어린 시선이었다.


지적장애 확진을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아들을 대한민국 최초의 지적장애인 출신 서울대 박사로 키우겠다는 야무진 꿈을 꿨다.

자폐 아이를 키운 선배를 통해 유치원 때는 장애 1등급이었는데 엄마의 노력으로 초등학교 6학년 땐 전교 학생회장까지 한 아이가 주변에 있다는 얘길 듣고 나도 욕심을 부렸다. - 중략 -

장애를 엄마가 노력해서 고칠 수 있는 병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장애는 '완치되는 병'이 아니라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하는 '하나의 특성'임을 알게 되었다. (pg 161)


저자 자신도 발달장애를 '병'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시절이 있었음을 고백하는 구절이다.

특히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하기 쉬운 실수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이 장애인을 처음 접했을 때 질문을 하면 흔히 '응, 저 아이는 어디어디가 아파서 그래'라고 답해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아파서..."라며 자식을 '아픈 아이'라고 말하는 장애 아이 엄마들이 있다. - 중략 -

나는 '아픈 아이'라는 말에 조용히 반대표를 던진다.

우리 아들은 병에 걸린 게 아니다. 신체가 아픈 것도, 정신이 아픈 것도 아니다.

그저 생각 회로가 남들과 같은 속도로 돌아가지 않을 뿐이다. (pg 163)


장애인을 환자 취급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다리가 부러져 깁스를 하고 있는 사람과 다리가 절단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똑같이 '아픈' 사람이라고 정의하게 되면

장애인도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런 편견 외에도 저자가 사람들에게 당부하는 인식 개선 포인트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적당한 무관심'이다.

'아니, 장애인 현실이 개선되려면 관심이 많아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관심이란 개인적인 관심을 의미한다.


발달장애인의 경우 공공장소에서도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상하게 여길만한 언행을 보이곤 한다. (떼를 쓰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이러한 행동의 경우 특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멈추게 된다고 한다.

이 때 사람들이 적당히 무관심하게만 기다려줘도 해당 장애인과 가족에게는 큰 도움이 된단다.

자신도 모르게 쳐다보며 무언의 비난을 쏟아붓지 말아달라는 당부였다.


이렇게 장애 아이를 키우면서 겪는 이야기들을 풀어낸 책이지만, 일반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이야기도 많았다.

특히 정상인 딸 아이가 자신도 장애인으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라는 말을 했던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형제, 자매 중 어느 하나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아이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상대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정상인 아이가 무턱대고 투정을 부리기도 어려워진다.

그렇게 되면 자라고 나서의 인성에 문제가 될 소지도 생기게 된다고 한다.

우리 집은 나이 차이가 4살이 나는 형제 집안인데, 특이하게 동생과 나 모두가 편애로 인한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며 살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이가 둘 이상이면 아무리 공평하게 대하려 해도 순간순간 누군가는 아쉬울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쌓여 서른을 넘긴 지금도 부모님 앞에서 옛날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부모 노릇이 쉽지 않다는 것이 피부로 와 닿는다.

하물며 한 쪽이 장애를 가진 경우니 오죽 했겠는가.


또한 사고없이 평균적인 삶을 산다고 가정했을 때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죽게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보통의 부모라면 자식이 자신보다 오래 사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될 테지만, 자식이 장애를 가진 경우라면 이것이 두려울 법 하다.

그래서 저자도 이런 저런 계획을 세워 자식을 위한 완벽한 조건을 물려주고 싶었단다.


결국 이전까지 세웠던 모든 계획이 엄마인 나의 욕심이고 허영일 뿐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내 생각대로 아이의 인생을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닐뿐더러 내가 계획한 대로 아기가 따라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이 모든 자식 된 자의 본성이다. (pg 260)


윗 구절을 읽고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우리도 자랄 때 부모 뜻대로 자라주지 않지 않았던가.

비단 장애아이를 둔 부모 뿐만 아니라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부모라면 무언가 와닿는 게 있을 구절일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눈을 감고 현실을 피하고 싶어도 장애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지금도 늘 함께 살고 있다.

언젠가 마트에서, 공원에서, 지하철에서 딸과 함께 장애인을 만난다면 나는 어떻게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처럼 무심하게 '아, 어디어디가 아파서 그런가봐'라는 말로 얼버무리지는 않으리라.


지금 다시 그 횡단보도로 돌아간다면 난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까?

'옷이 맘에 들어요? 저도 큰 맘 먹고 샀어요. 하하하' 하고 웃으며 넘어갈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까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어머님이 죄송하다고 했을 때 '그럴 수도 있지요 뭐'하며 덜 무안하게 해 드릴 수 있지는 않았을까.


저자가 기자 출신이라는 것이 책 전체에 걸쳐 잘 드러난다.

읽으면서 '야...이 사람 글 참 잘쓴다'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300페이지 정도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분량이지만 쉽게 술술 읽힌다.

게다가 그 안에 가끔은 가슴 찡한 슬픔이, 가끔은 유쾌한 유머가 묻어 나온다.

주변에 장애인과 장애인의 가족이 있든 없든,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에게나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었다.

자녀가 책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면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서평에 다 담지 못한 인상깊은 구절을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서로 반대편 길로 향하지만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저들과 내가 사는 세상이 같은 세상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세상은 버스와 달리 안과 밖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

저들은 내 세상의 일부이기도 하고 나는 저들 세상의 일부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다. 그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pg 199) 


내 아이는 인간적 가치 면에서 효율성이 낮아 '맞아도 어쩔 수 없는 장애인'이 아니다.

오히려 나보다도 반짝반짝 빛나는 가치 있는 존재다.

나는 살면서 그 누구도 변화시켜본 경험이 없지만 내 아들은 이미 나를 변화시켰다.

어쩌면 아빠와 누나도 변화시킬 것이다. 존재 그 자체로 말이다.

내 아들을 비롯한 발달장애인의 인권이 나와 동등한 개인으로서 지켜져야 하는 이유다. (pg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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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애주가의 고백 - 술 취하지 않는 행복에 대하여
다니엘 슈라이버 지음, 이덕임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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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상깊은 구절

술을 마실 때 나 역시 일행 중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을 견딜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혼자서만 부끄러운 짓을 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pg 71)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핑계로 '나는 술자리를 좋아하지 술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

난 내가 술을 좋아하지 술자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몇 년 전에 깨달았다.

난 참 술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맥주를 좋아하고 가장 좋아하는 술자리는 오로지 나 혼자 있는 술자리이다.

결혼하고서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 회식 후 2차 가자는 동료들에게는 집에 간다고 하고서

맥주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온 적도 있을 정도다.


살면서 혼술이 크게 늘게 된 계기가 두 가지 있다.

첫번째는 컨설턴트라는 허울에 반해 뛰어든 내 첫 직장일이 결국은 영업사원에 지나지 않았고,

난 사람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다.

대인기피증이 심해 평일에 연차를 내고 휴대폰을 끄고 방안에만 있다 출근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원래도 가끔 혼술을 하긴 했지만 이때부터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아니,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일, 인간관계, 인맥을 핑계로 술을 마셨다.

밤을 새워 마시기도 하고 아침에 모르는 사람과 눈을 뜨기도 하고.

그러다 급작스럽게 어떤 '깨달음'을 얻어 이제는 술을 끊고 이런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책이 주는 메시지는 심플하다.

술 마시다 죽기 싫으면 그만 마시라는 것이다.

이 책을 한 문단으로 요약할 수 있는 구절이 비교적 초반에 등장한다.


술을 끊으려면 술을 그만 마시는 수밖에 없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항상 같다.

술을 마시는 데는 어떠한 심리적 이유도 없다.

누설해야 할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술주정뱅이가 술을 마시는 것은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pg 50)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중독' 상태에 있는데 본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알콜중독자' 하면 뭔가 TV에서 등장하는 노숙자나 컴컴한 방에 혼자 쭈구리고 앉아서 깡소주를 마시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 정도가 아닌 우리들은 그저 '술에 조금 의존적인'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위하지만,

실제로는 의존증과 중독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나역시 술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숙취로 보낸 시간까지 술이 영향을 준 시간이라고 치면 근래 10년은 술에 취해있던 시간이 그렇지 않았던 시간보다 더 길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이 책의 제목에 이끌렸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읽게 되었다.

어처구니없지만 책을 받은 첫 날에는 맥주 한잔 하면서 읽기도 했다.


위에 언급했던 두 번째 혼술의 증가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부터였다.

한 백일 정도까지는 아이가 밤에 자주 깨서 아예 술을 마실수가 없었다.

하지만 평소에 먹던 버릇이 있으니 계속해서 스트레스가 쌓이기만 하고 배출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폭발해서 집사람이나 아이에게 신경질을 내는 나를 발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금단증상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다보니 집사람이 그럴꺼면 그냥 마시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그 뒤로는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는 혼술을 하고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정도면 괜찮은 수준 아닌가 싶을수도 있다.

하지만 빈도를 통제한 뒤로 양을 통제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혼자 마시면서도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셔대는 날이 많아졌다.


나 또한 간헐적으로 금주를 실천해 봤지만 스스로 술을 조절할 수 있겠다는 자극을 받은 것 외에 별 이득은 없었다.

장기적으로는 점점 더 술을 마시게 될 뿐이었다.

잠깐의 절주는 통제 능력을 보여 주는 신호가 아니라 오히려 통제력이 상실되는 신호인 것이다. (pg 134)


저자도 마찬가지의 경험을 했었다.

위 구절을 읽고서는 일종의 무력감까지 느꼈다.

나도 건강검진 후나 한번씩 심하게 아프고 나서는 짧게는 한달, 길게는 두세달 정도 술을 조절했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시 원래 사이클로 쉽게 돌아오곤 했다.


군대에서 술을 못마시니 대안으로 찾은 것이 담배였다.

평균적인 흡연자들에 비해 늦게 시작해서 그런지 담배는 7년 정도 피우다가 결혼 전에 끊어버렸다.

한 1년 정도는 힘들었는데 그 뒤로는 생각도 안난다.

담배값이 올랐을 때 그 전에 끊길 잘했다는 생각도 했다. (물론 금연 후 주량이 더 늘었다.)


그치만 술만은 정말 끊기가 어렵다.

심지어 지금도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맥주를 한잔 할까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미련한 생각이지만 이 책에 술을 끊을 수 있는 비책이라도 있길 기대했다.

하다못해 저자만의 특별한 노하우라도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건 없었다.

심지어 저자는 한번 의존증에 빠진 사람은 평생 그것을 잊지가 쉽지 않다고까지 이야기한다.

핵심은 자신이 중독이라는 것을 깨닫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중독을 혼자서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절대로 가 보지 않은 길이 얼마나 힘든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 중략 -

실패란 동시에 자유를 의미한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죄의식을 견디기 위해, 불안함과 자책을 덜기 위해,

자신에 대한 커다란 기대와 스스로의 하찮음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건 완전히 어리석은 전략이다.

술은 삶의 어떤 경험, 어떤 경력, 위대한 생각,일 혹은 책과도 상관이 없다.

삶은 그 자체로 항상 충분하다. (pg 198-199)


멋진 말이긴 하지만 크게 와닿지 않는다고 할까. 뭐 책 한 권 읽는다고 인생이 바뀌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잘살겠지만...

나에게는 지금 닥친 불안함과 자책을 덜어내는 것이 더 시급한 것처럼 느껴진다.

저자가 말하는 그 '은총'의 시점이 아직 나에게는 오지 않은 모양이다.


담배도 끊은 나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술도 그만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그 때가 얼른 와서 이 책을 다시 평가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사족이지만, 저자가 말하는 독일의 음주문화가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술을 장려하는 직장 문화 같은 것들이 특히 그렇다.

이런 현상들이 개인들로 하여금 금주하기 더 어려운 환경을 만든다고 한다.

점점 직장 회식 문화도 변화해가고 있다고 하니 점차 더 바람직한 음주문화가 생겨나리라 믿는다.


아이가 눈에 띄게 커가고 있다.

어릴 적 내 눈에 비친 아버지에게 술은 일상이었다.

내 아이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그와는 달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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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채소를 먹어야 해요? - 건강과 웰빙 Q&A 어린이 인성교육 3
크리스토퍼 맥커리 외 지음, 루이스 토마스 그림, 김영옥 옮김 / 이종주니어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인상깊은 구절

질문하고 대다을 듣는 과정을 경험하는 동안 아이들의 뇌는 형태를 갖추어 갑니다.

특히 전두엽이 제 형상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런 교류관계를 형성하는 동안 아이들은 사회적 상황을 더 잘 다루고 유대관계를 더 단단이 쌓아

즐거움과 행복을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pg 5)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인연도 그렇듯 사람과 책과의 인연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책과의 만남도 그렇다.

 

벌써 결혼한지 3년이 훌쩍 넘었다.

아내와는 더없이 행복했고 이제는 2세에 대한 생각이 슬슬 싹틀무렵인 작년, 드디어 임신 소식을 들었다.

예정일이 이번 달에 속해있기는 했지만 월말이어서 아직은 긴장을 덜 하고 있을 무렵 이 책을 만났다.

 

초보 부모인지라 임신한 뒤 태교에서부터 막상 나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수유, 육아 등 다양한 책들을 미리 사 읽어보고 있는 중에 제목이 확 끌리는 책을 발견했다.

 

 

어릴적 나는 지독히도 편식이 심했다.

지금은 많이 좋아진 편이라지만 지금도 드레싱이 없거나 조리되지 않은 생야채는 잘 먹지 않는다.

내가 이 모양이니 내 자식에게 어찌 편식을 하지 말라고 할 수 있겠나 싶었다.

그래서 접하게 된 책인데...

우연의 일치인지 이 책을 받기가 무섭게 예정일을 1주일 여 앞두고 아이가 태어났다.

덕분에 집사람이 산후조리 중인 조리원 한켠에서 리뷰를 작성하게 되었다;;;

 

책 자체가 아이와 함께 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내용은 단순한 편이다.

 

 

 

이렇게 삽화와 함께 아이들이 궁금해할 수 있는 여러 질문들이 등장한다.

 

그런 다음 아이에게 스슬로 생각해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아이가 글씨를 쓸 줄 안다면 워크북처럼 간략히 작성해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그런 다음 부모를 위한 팁과 노하우가 제시되어있는 형태이다.

 

책에는 편식에 대한 부분 외에도 밤에 왜 자야 하는지, 양치는 왜 해야 하는지, TV는 왜 오래 보면 안되는지 등

어릴적 나도 한번쯤 궁금해했던 것 같은 질문들이 12가지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모든 질문들은 어른들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것들이다.

오히려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욱 어려울 것 같은 질문들이다.

그러다보니 어떤 접근법을 활용할지 책을 보기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접근법을 쓰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줌으로써

아이와 부모가 스스로 만족할만한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접근법이기 때문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뭐야! 질문만 있고 답이 없네!' 라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부모 입장에서 저런 질문의 답을 모를리 없다.

핵심은 아이가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부모가 대단한 논리를 세워서 조목조목 설명해주는 것도 물론 좋겠으나,

아이가 스스로 생각해보고 '아,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은거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훨씬 더 좋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는 권위적으로 '이게 정답이니까 당연히 옳은거야'라는 접근법이 아니어서 더욱 좋았다.

 

물론 이제 태어난 신생아니 내 아이와 함께 이 책을 보려면 앞으로도 최소한 2-3년은 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생각보다 빨리 자란다는 주변의 조언들을 들으면서 부모가 먼저 준비되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트이게 되면 엄청난 질문들을 쏟아낼테니 이 책은 물론 이 책 시리즈를 모두 산다해도

하루만에 쏟아내는 질문들도 채 답해주지 못하겠지만 어떻게 답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접근법을 학습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 같았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맞춤법이 달라질까봐 염려가 되긴 하지만 관련된 모든 시리즈를 집에 구비해두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오늘은 아이에게 남길 말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아가야, 무럭무럭 자라서 아빠랑 같이 책 보면서 같이 이야기 나누며 놀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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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기아'라는 뿌리 깊은 문제...

 

너무도 오래 미완으로 남아 있어서 이제는 문제라는 인식조차 희미해지고 있는 오늘날,

 

현장에서 기아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한 학자가 아버지의 모습으로 아들에게 이 세상의 비참한 현실과

 

이를 극복할 방법을 알려주는 책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흔히 '기아'라고 하면 아프리카 대륙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기아는 동남아를 포함한 아시아 대륙의 대부분, 남아메리카, 동부 유럽 일부, 북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통계적으로 전 세계에 약 8억 5천만명이 기아에 고통받고 있다.

 

이런 지역에서는 구호 물품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살릴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두 아이의 엄마가 큰 아들과 작은 아들 사이에서 누가 살아날 가능성이 높은지를 생각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

 

모든 사회문제가 그렇듯, 기아 역시 가장 힘없는 존재가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

 

바로 어린이들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레지 드프레는 이들을 "나면서부터 십자가에 못박힌 아이들"로 표현했다.

 

 

멜서스는 인구론에서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기아는 필수불가결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현재 지구상의 식량 생산량은 인구 120억 명을 먹여 살리고도 남는다.

 

남아도는 식량을 주체하지 못해 폐기하는 선진국과 길바닥에서 주린 배를 움켜진 아이가 죽어가는 개발도상국...

 

소는 배를 채우고 사람은 굶는 이 세상을 만든 것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가뭄, 홍수, 사막화, 삼림 파괴 등의 기후적 요인이다.

 

이와 더불어 낙후된 인프라와 기술 부족으로 적은 량의 비에도 쉽게 홍수가 나고

 

조금만 비가 오지 않아도 가뭄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 재해보다도 무서운 것은 인재(人災)이다.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부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낳았고 이렇다 할 경재 정책이 없는 국가는 방향성을 상실했다.

 

부족간 갈등으로 야기된 각종 전쟁이 가뜩이나 열악한 땅을 황폐화시키고 식량 생산에 힘써야 할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 몰고 있다.

 

여기에 선진국들의 경제적 침략, 강압적인 시장 개방, 무분별한 무기 수출이 더해져 개발도상국들이 스스로 일어설

 

힘 자체를 빼앗아가고 있다.

 

 

복잡한 원인을 가지고 있는 만큼 해결이 어려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작가는 그들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부르키나파소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토마스 상카라의 개혁을 사례로 들어

 

결코 그들이 멍청하거나 게을러서 기아에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4년만에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해진 부르키나파소...

 

하지만 안타깝게도 토마스 상카라의 개혁은 프랑스의 개입으로 인한 쿠데타로 비극적인 결말을 낳고 말았다.

 

 

이 때 선진국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

 

목발을 짚은 자에게 돈 몇푼 쥐어주고서는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며 

 

그들 스스로 일어나려고 하는 의지를 북돋아주기는 커녕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자의 목발을 걷어차고 있다.

 

 

우리에게는 그들이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을 하도록 지켜보는 것, 나아가 이를 지원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처한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인간의 정의...과연 우리는 이 정의에 부합하는 인간인가?

 

 

 

사족-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꽤 오랜 시간 사랑받고 있는 듯 합니다.

바람직한 일이긴 하나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단순한 자기 위로용으로 쓰이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자신보다 더 불행한 존재를 찾는다고 합니다.

 

이 책을 통해 느낄 점은 "아, 나는 저런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 "난 밥은 안굶으니 행복하구나."가

아니라 어떡하면 저들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느냐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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