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암관의 살인
다카노 유시 지음, 송현정 옮김 / 허밍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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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출처: 출판사 증정

몇 년 전부터 일본의 미스터리 추리 소설을 좀 읽고 있는데 끊임없이 새로운 작가의 작품을 접하게 된다.

그만큼 미스터리 추리 장르의 저변이 넓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번 작품은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작가의 작품이지만 작품의 설정이 특이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탐정 유희'라는 일종의 게임을 소개한다.

부자들이 실제 탐정이 되어보는 일종의 연극을 체험하기 위해 거액을 지불하면 미스터리 작가가 시나리오를 만들어 실제 살인이 일어나는 배경을 만들어주고, 그 고객이 탐정이 되어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그야말로 정신 나간 게임이다.

작품의 화자는 총 두 명으로, 고수익 아르바이트라는 명목에 혹해 가명을 부여받고 엑스트라로 참여하게 된 '사토'라는 청년과 탐정 유희 게임의 진행 실무 책임자이자 게임 내 집사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고엔마'라는 남성이다.

사토는 아르바이트를 하다 만났던 일용직 청년이 고수익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다고 했다가 영영 사라지자 궁금증을 참지 못해 결국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 것으로 등장한다.

고엔마는 중년 남성으로 고연봉을 받는 일자리를 가졌지만 상사와 작가의 갑질을 고스란히 받아 내면서도 게임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모든 면에서 신경을 써야 하는 극한 직업인이다.

저자는 대범하게도 초반부터 독자들에게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이 진짜 살인이 수반되는 게임이며,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각자가 맡은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게다가 첫 살인이 일어난 직후 '범인'이 의도치 않게 같이 죽어버리면서 준비된 시나리오가 꼬이는 부분까지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후로 큰 구멍이 난 시나리오를 작위적인 설정까지 동원한 임시방편으로 때워가자 사토 역시 이 상황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리고 곧 자신이 이 게임에 휘말려 죽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도 알아내게 된다.

여기까지가 초중반까지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독자들에게 남는 궁금증은 이것이다.

독자들이 찾아내야 할 감춰진 이야기는 무엇일까?

사토는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을까?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간략히만 소개하자면, 이 게임에 숨겨진 고객의 정체와 사토가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저자가 독자들에게 기대한 바가 아닐까 싶다.

다만 저자가 준비한 반전이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첫 번째 반전인 클라이언트의 정체와 그의 동기는 예측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아주 짜임새가 좋은 반전이었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사토의 마지막 행보 역시 그가 보여준 행보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어서 반전이라고 느껴지긴 하나 개인적으로 공감이 가는 부분은 아니었다.

두 반전 모두 빌드업이 다소 부족하게 느껴진다는 점이 아쉬웠다.

하지만 3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에 등장인물의 수가 그리 많지 않고 중간중간 사건들이 분산되어 일어나기 때문에 읽는 재미는 충분했다.

어제부터 조금 피곤한 일과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매력은 충분했다.

굉장한 수작이라 하긴 어렵지만 9월을 앞둔 시점에도 푹푹 찌는 날씨에 시원한 실내에서 읽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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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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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저자의 산문집을 읽고서 다시금 그의 이야기가 읽고 싶어졌다.

사실 제목만 봐도 무슨 내용을 다루고 있을지 대충 짐작이 가서 그동안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봐도 그다지 손이 가지 않았었는데, 최근에 그의 모든 저작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 작품도 읽어보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것 같고 이 책 역시 무서운 속도로 완독하게 되었다.

하단부터는 스포가 일부 있을 수 있으며, 제목과는 달리 특정한 사상을 담은 댓글을 무지성으로 달아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혀둔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작품의 주요 소재인지라 등장인물들 역시 이름이 없다.

ID로 추측되는 별명 같은 것들로 불리며 소위 온라인 바이럴 마케팅 회사를 운영하는 3인이 어마어마한 거부가 의뢰하는 사상 공작에 투입된다는 내용으로, 이름을 가진 자는 이들을 인터뷰하는 기자와 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이철수'라는 실명이라 믿기 어려운 이름을 가진 자뿐이다.

그들이 처음 벌인 일은 한 시사 영화에 대대적인 안티 활동을 벌여 그 영화가 화제에 오르지 못하게 아예 묻어버리는 작업이었다.

이 일이 성공하자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우리가 뭐?" 찻탓캇이 물었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 같다고."

(pg 51)

그들의 잠재력(?)을 알아본 물주는 점점 보수를 올려 뭔가 더 거시적인(?!) 일을 해 나가도록 유도한다.

여기에는 20-30대 진보 커뮤니티를 해체하는 것부터 빨갱이 물이 들기 전에 10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 등이 포함된다.

저자가 이 주제로 작품을 쓰기 위해 얼마나 취재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조사량이 굉장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특히 커뮤니티 박살 내기 부분은 커뮤니티를 조금이라도 들락거린 경험이 있다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잘 묘사되어 있는데 이 정도의 묘사는 집요한 사전 조사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터넷 싸움은 정력과 멘탈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희는 정력 많아요.

그게 직업이니까. 그리고 멘탈도 정말 강해요. 왜냐하면 멘탈이 없거든요.

저희랑 댓글로 논쟁을 벌이는 건 쇳덩이로 된 로봇이랑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쪽이 진 쪽 따귀를 때리는 게임을 하는 거나 비슷한 겁니다.

가위바위보는 질 수 있지만, 큰 틀에서 저희는 절대 지지 않아요.

(pg 82)

그들이 하는 일이 다분히 지저분한 일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동기부여하는 과정도 꽤나 지저분하다.

특히나 남성들이 뒤로 무언가 일을 꾸미고자 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성매매다.

더욱이 그들이 전형적인 키보드 워리어 출신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루트로는 이성 경험이 거의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이러한 당근이 매우 큰 위력을 발휘한다.

술자리에서 술 외적인 것에 돈 쓰는 것을 굉장히 아까워하는 사람으로서 쉽게 이해는 되지 않지만 읽기에 자극적인 재미를 주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다.

결국엔 돈과 인정을 쫓던 이들이 씹다 버린 껌 취급 당하게 되는 결말 역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마지막까지 적들을 나락으로 보냈지만 이런 작업에 끝이라는 것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 과정 중에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대체하면 그만인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픽션이고 현실 세계에서의 키보드 워리어들이 모두 묘사된 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펼치는 공작이 반드시 극우가 극좌를 음해하기 위해서만 일방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는 좌우 가릴 것 없이 펼쳐지는 이러한 공작이 이제는 정치의 기본 행동 양식이 된 지 오래며 경제분야 역시 뒤질세라 가세하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는 하나하나가 고유의 질서와 법칙을 지닌 생태계다.

그 세계들은 태어나고 성장하며, 진화하고 죽는다.

어떤 것들은 아름답고 어떤 것들은 위대하다. 어떤 섬의 숲은 산불에도 잘 버틴다.

그러나 모든 세계에는, 그 자신만의 약점이 있다.

(pg 95)

읽는 과정은 매우 즐거웠지만 읽고 난 감상은 꽤 복잡하다.

이러한 세력이 있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과연 나는 이러한 세력에게 얼마나 휘둘리고 있었나?

심지어는 자신이 흔들려 본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이라도 할 수 있을까?

이런 세력이 우리 사회의 중요 의사결정을 좌우하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

떠오르는 모든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할 것 같다.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사회 현상이지만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확인하기가 매우 어렵다.

물론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허구이며 읽다 보면 '에이 설마 진짜 이럴까'하는 부분도 분명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왠지 모르게 작품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현실과 꽤나 닮아 있을 것만 같다.

저자의 사회를 보는 통찰이 잘 담긴 작품이었던 것 같아 저자를 잘 알든 처음 접하든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할 수 있을만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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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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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제목에 표지에는 문어 한 마리가 그려져 있고 각 챕터의 이름마저 수산물 종류인 독특한 SF 작품이다.

수산물 형태를 한 외계인 정도가 등장하겠거니 하고 부담 없이 집어 든 책이었지만 뜻밖에도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허구와 현실이 합쳐져 꽤 강한 울림을 주었다.

시작부터 여느 SF 작품들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주제로 이야기의 포문을 연다.

바로 몇 년 전부터 시행된 강사법으로 해고 위기에 몰린 강사 노조의 투쟁이다.

교원도, 책임 있는 위치에 올라간 것도 아니지만 벌써 10년 넘게 대학에서 녹을 먹는 입장에서, 게다가 '기획'이라는 부서명을 이직하고서도 떼지 못하는 자로서 이런 부분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문어 형태를 한 외계인이 등장한다는 점 외에는 무조건 현실적으로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나의 천직이었다.

학생은 선생이 없어도 스스로 배우고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학생이다.

그러나 선생은 학생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학생들을 사랑했고 강단을 사랑했고 교육의 가치를 진심으로 믿었다.

그것이 내 존재의 의미였다.

그러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학교가 원하는 대로 조용히 사라져줄 수는 없었다.

(pg 18-19)

그 밖에도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과 일본의 원전 오염수 무단 방류, (내 고향이기도 한) 구미의 비정규직 무더기 해고(검색을 통해 알아보니 아사히글래스 비정규직 지회의 투쟁인 듯하다.) 등 실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그대로 옮겨두고 있다.

여기에 강사 노조 시절 저자 본인과 위원장이었던 남편의 개인적인 스토리까지 얹어져 있고, 이를 해양생물 모양의 외계인이라는 양념으로 버무려 놓은 작품이라고 보면 되겠다.

노조 활동을 통해 만난 부부는 알 수 없는 외계 생명체와 지속적인 접촉을 하게 되고, 이를 추적하는 혹은 경계하는 듯한 검은 양복의 무리들이 연이어 등장하게 된다.

양복 입은 사람들이 집회에 참여했다고 끌고 간다고 오해했지만 사실 그 이유가 외계인 접촉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대게' 편에서 등장하는 대게 모양의 외계 생명체는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해저 건설 노동자였고, 국가로부터 배신당한 그의 처지에 화자와 남편이 공감하게 되면서 그들은 투쟁의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니까 싸워야죠." 잠든 줄 알았던 남편이 중얼거렸다.

"싸워서 못 하게 해야죠."

"그렇지만 어떻게요? 게는 집게발이 전부인데 이걸 다 어떻게 막아요?"

"이길 것 같으니까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pg 66)

후미에 저자의 말에서 저자 스스로도 고백하고 있듯이 본래 하나의 스토리로 엮을 의도로 집필된 작품이 아니다.

때문에 읽는 입장에서도 솔직히 서사가 탄탄하다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사실 주요 내용을 간추리면 '바다를 터전으로 진화한 외계의 지성 생명체가 지구에 협력 차 왔다가 우리가 지구를 오염시키는 모습에 실망하여 떠나기로 결심하는' 것이 전부다.

심지어 한 어린이의 동화 같은 체험을 보여주는 '개복치' 편은 굳이 읽지 않아도 전체 서사를 이해하는데 지장이 없다. (물론 상당히 재미있기 때문에 그냥 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단순한 서사가 저자의 쫀쫀한 문장들에 힘입어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마법으로 변한다.

"어째서요? 돌고래는 착한 동물 아니었어요?"

"착하거나 나쁜 동물 같은 건 없습니다." 검은 정장 사람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그냥 동물입니다."

(pg 172)

해양생물을 닮은 외계인이라는 조금은 유치한 소재도 저자의 체험과 진짜 우리 사회의 사건들이 결합되자 독특한 생명력을 발하며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기존 SF 작품들처럼 외계인들이 인류에게 실존적인 위협을 가하지도 않는다.

그저 같은 종을 착취하고 환경 따위는 나 몰라라 하는 경향은 외계인이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떠날 뿐이다.

비인간 생물종을 위해 인류가 멸종해야 한다 해도 남편만은 살아남기를 원한다.

가능하면 나도 같이 살아남으면 더 좋다. 나도 결국은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pg 208)

250페이지가 조금 넘는 얇은 분량에 대화도 많아서 읽는 부담이 적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탁월한 재미가 있어서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소재로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준 작품이지 않을까.

저자의 작품 중 이 작품보다 더 유명한 작품들이 꽤 많아서 빠른 시일 내에 다른 작품을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 그리고 응급실에서 기다리면서,

나는 하늘과 바다가 뒤집히던 순간 온몸을 통과하던 파동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세상이 맥박 치고 우주가 진동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물속을 질주하던 빛나는 존재들은 서로에게 외쳤다. - 저항하라.

(pg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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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 좌절의 시대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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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몇 번 접한 바 있는 장강명 작가의 산문집이다.

읽고 나면 기억에 남는 것이 적은 것 같아 짧은 글들을 모아둔 책은 되도록이면 잘 읽지 않으려고 하는데 제목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뭔가 우리 시대를 잘 관통하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막상 해당 제목을 가진 글은 그다지 임팩트가 있지는 않았다.

언제부턴가 국가적으로도 '경제개발 00개년 계획'과 같은 장기적 계획을 수립하지 않고 있듯이 우리 경제나 사회의 발전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보니 무언가를 계획한다는 것 자체가 점차 힘들어지는 현상을 지적하고 있는 글이었다.

그러면서도 상호의존성은 점점 높아져서 바로 내일의 일을 계획하더라도 다른 누군가, 외부의 일정이나 사정 때문에 번번이 그 계획이 틀어지곤 한다.

그렇게 세세한 계획들이 틀어지다 보면 '에라, 계획 따위 세워서 뭐해.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라는 심리가 되기 쉽고 이러한 현상을 저자가 미세 좌절의 시대라 이름 붙이고 있다.

하지만 기자 출신의 저자가 쓴 글들을 모아놓은 책인지라 대체로는 읽는 재미가 좋은 글들이 많았다.

특히 저자가 글을 쓴 시점이 문재인 정부 말부터 현 정부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 있기 때문에 양 정권에 대한 쓴소리들이 많이 담겨 있어서 지금 현안들을 돌아보기에 적합한 주제들이 많았다.

저자는 보수주의자라고 자처하고 있지만, 이 구분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민주당 대 국민의힘으로 나눠지는 좌우 구분이라기보다는 보다 어원 그 자체에 근거한 구분인 것 같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의 양쪽 정치 진영 모두는 진보나 보수로 명쾌하게 가르기 힘든 영역에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저자도 여러 차례 지적하고 있듯이 이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정권 획득이기에 정책에서의 차별성이 그다지 없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다.

따라서 저자 역시 어느 한 정권의 편에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양 정권을 겪은 시민이자 유권자 중 하나로서 느낀 아쉬운 부분들을 잘 토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글들에서 우리 사회가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무언가 목표를 상실한 느낌, 가야 할 방향을 잃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을 많은 글에서 강조하고 있다.

사실 무력감으로 귀결되는 이야기의 결말을 바꾸면 고전적인 영웅서사다.

가진 게 없었고, 시련을 겪었으나, 결말은 창대한. 미

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같은 소재로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그

러므로 희망이, 목표가 필요하다.

(pg 36)

우리는 지금 혼미하다.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서다.

막연하게 소망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을 감성적인 구호 이상의,

길고 차분하고 현실에 부합하는 논리로 풀지 못한다.

거기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그냥 다 같이 시시해졌다고.

(pg 191)

꼭 정치나 사회에 대한 날선 비판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40대 후반인 저자가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소회들도 담아내고 있다.

워낙 여러 분야에 걸친 글들의 모음이라 몇 가지 주제로 압축하기 쉽지는 않지만, 기억에 남았던 몇 구절을 소개하고자 한다.

특히 아래의 '꿈'을 '친구'로 치환해 보는 구절은 언젠가 술자리에서 한번은 써먹지 않을까 싶은 부분이었다.

'꿈이 꼭 있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친구가 꼭 있어야 하느냐'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친구가 의식주만큼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그러나 친구 없는 삶은 황폐하다.

친구가 있으면 덜 외롭고, 힘들 때 위로를 얻는다.

혼자라면 시도하지 않을 일을 친구가 있으면 같이 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진다.

(pg 232)

너무도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해야 하는 현대인의 피로도 저자가 주목하는 것 중 하나였다.

AI의 발달이 예술 창작 분야에까지 실존의 위협으로 다가오는 시대가 되었다.

누구나 자신의 일은 언제까지고 안전할 것이라 믿고 싶지만 사실 확실하게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직업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변화의 속도는 계속해서 빨라지기만 할 뿐, 멈춤의 가치는 아직도 철학과 종교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도시락을 든 채 생각했다. 이게 한계라고. 사람이 이보다 더 바빠질 수는 없다고.

이대로 가다간 쓰러지거나 사고가 난다고.

사람이 너무 바빠지면 현재를 살피지도 미래를 대비하지도 못하게 되는데,

우리 사회 전체가 그 단계에 이른 것 같다고.

(pg 416)

또한 저자는 스마트 기기의 보급과 SNS의 범람으로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타인과 가깝게 연결되어 있지만 정작 외로움은 더욱 심하게 느껴지는 것 같고, 타인과 진정으로 소통하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조차도 점점 잊어가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법한 주제들이었다.

나는 한국뿐 아니라 주요 선진국들 모두 지금 '대중의 기분'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의 기분은 사납고 변덕스럽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며 책임지지도 반성하지도 않는다.

- 중략 - 그래서 짧고 강하게 조롱을 잘하는 이들이 몇 년 전부터 여론을 이끌고 있다.

(pg 69)

기자 출신이니 글 잘 쓰는 것은 기본이었겠지만, 그럼에도 저자가 소설만 재미나게 쓰는 작가가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아직 읽지 못한 저자의 책들이 좀 있어서 조만간 다시 소설로 그를 만나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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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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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과학 지식들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신작이다.

이번에는 블랙홀의 반대 개념인 화이트홀을 주제로 삼았다.

그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개념이기에 당연히 화이트홀의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블랙홀을 알아야 한다.

가서 보는 것, 그것이 바로 과학입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서 알아보려는 것.

수학, 직관, 논리, 상상력, 이성을 사용해서요.

태양계 주변, 원자의 중심, 살이 있는 세포 내부, 우리 뇌의 뉴런 내부,

블랙홀의 지평선 너머까지... 정신의 눈으로 보러 갑니다.

(pg 34)

태양과 같은 별이 그 수명을 다하면 자신의 중력을 버티지 못하고 한 점으로 수축하게 되고 이로 인해 블랙홀이 탄생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블랙홀은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중력을 지닌 천체로 오직 들어가기만 할 뿐 나오지는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블랙홀에는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선인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저자는 이 단어를 쓰면 화이트홀이라는 개념이 탄생할 수 없기에 일부러 이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주석에서 밝히고 있다. 하지만 가수 윤하 때문에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개념이라 소개해 보았다.)

그 경계선에서는 중력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시간이 거의 멈춘 것처럼 보이게 된다.

물론 그 안에 있는 존재에게는 시간이 흐를뿐더러 매우 빠른 속도로 다음 일들이 벌어지겠지만 밖에서 관찰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멈추어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달라진다는 것 때문에 블랙홀을 이해하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알아야 하기에 저자가 친절히 책 초반부에 상대성 이론을 간략하게 소개해 주고 있다.

이렇게 생성된 블랙홀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모양이 점점 변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입구가 점점 좁아지면서 그 내부의 길이가 굉장히 좁고 길게 늘어나는데, 이론상 한 입자가 가지는 최소한의 크기인 플랑크 스케일까지 좁아지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양자 도약이 일어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화이트홀이라는 것이 생겨난다고 보고 있다.

물론 화이트홀은 아직까지 수학적으로만 제시된 개념이다.

하지만 저자는 블랙홀도 처음에는 이론적인 개념이었다가 실제로 관측되면서 그 존재가 인정되었듯이 화이트홀 역시 언젠가는 인류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심지어는 이 화이트홀이 어쩌면 암흑 물질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노벨상은 실험으로 증명되어야만 수상 가능하다고 알고 있으니 만약 저자 생전에 누군가가 화이트홀을 발견하게 되면 저자도 노벨상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천문학자들은 중력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신비한 보이지 않는

먼지가 우주에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관찰해왔습니다.

이를 '암흑 물질'이라고 부르죠.

암흑 물질의 일부는 어쩌면 수십억 개의 작고 섬세한

화이트홀로 이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블랙홀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잠자리들처럼 우주를 가볍게 떠다닐 화이트홀 말입니다.

(pg 181)

책을 읽기 전에는 무한히 빨아들이기만 하는 구멍이 있다면 무한히 뱉어내는 구멍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접했는데 화이트홀이라는 개념이 마냥 블랙홀의 반대쪽 구멍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론상 화이트홀이 크면 경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화이트홀은 매우 작을 것이라 예측된다고 한다.

최소 단위인 플랑크 질량만큼 작을 수도 있다고 하니 화이트홀을 실험으로 관측해 내는 것이 결코 만만히 볼 문제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어려운 개념이라 제대로 이해한 건지 확신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저자의 책은 술술 넘어가는 마법 같은 힘을 보여준다.

주석을 제외하면 180여 페이지로 그리 두껍지 않고 문체도 친절해서 읽는데 절대적인 시간이 많이 필요한 책은 아니지만 그림을 보면서 저자의 설명을 이해해야 해서 마냥 읽다 보면 저절로 이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블랙홀의 반대되는 화이트홀이라는 개념에 대해 개략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넘칠 정도로 충분히 재미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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