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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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제목에 표지에는 문어 한 마리가 그려져 있고 각 챕터의 이름마저 수산물 종류인 독특한 SF 작품이다.

수산물 형태를 한 외계인 정도가 등장하겠거니 하고 부담 없이 집어 든 책이었지만 뜻밖에도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허구와 현실이 합쳐져 꽤 강한 울림을 주었다.

시작부터 여느 SF 작품들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주제로 이야기의 포문을 연다.

바로 몇 년 전부터 시행된 강사법으로 해고 위기에 몰린 강사 노조의 투쟁이다.

교원도, 책임 있는 위치에 올라간 것도 아니지만 벌써 10년 넘게 대학에서 녹을 먹는 입장에서, 게다가 '기획'이라는 부서명을 이직하고서도 떼지 못하는 자로서 이런 부분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문어 형태를 한 외계인이 등장한다는 점 외에는 무조건 현실적으로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나의 천직이었다.

학생은 선생이 없어도 스스로 배우고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학생이다.

그러나 선생은 학생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학생들을 사랑했고 강단을 사랑했고 교육의 가치를 진심으로 믿었다.

그것이 내 존재의 의미였다.

그러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학교가 원하는 대로 조용히 사라져줄 수는 없었다.

(pg 18-19)

그 밖에도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과 일본의 원전 오염수 무단 방류, (내 고향이기도 한) 구미의 비정규직 무더기 해고(검색을 통해 알아보니 아사히글래스 비정규직 지회의 투쟁인 듯하다.) 등 실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그대로 옮겨두고 있다.

여기에 강사 노조 시절 저자 본인과 위원장이었던 남편의 개인적인 스토리까지 얹어져 있고, 이를 해양생물 모양의 외계인이라는 양념으로 버무려 놓은 작품이라고 보면 되겠다.

노조 활동을 통해 만난 부부는 알 수 없는 외계 생명체와 지속적인 접촉을 하게 되고, 이를 추적하는 혹은 경계하는 듯한 검은 양복의 무리들이 연이어 등장하게 된다.

양복 입은 사람들이 집회에 참여했다고 끌고 간다고 오해했지만 사실 그 이유가 외계인 접촉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대게' 편에서 등장하는 대게 모양의 외계 생명체는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해저 건설 노동자였고, 국가로부터 배신당한 그의 처지에 화자와 남편이 공감하게 되면서 그들은 투쟁의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니까 싸워야죠." 잠든 줄 알았던 남편이 중얼거렸다.

"싸워서 못 하게 해야죠."

"그렇지만 어떻게요? 게는 집게발이 전부인데 이걸 다 어떻게 막아요?"

"이길 것 같으니까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pg 66)

후미에 저자의 말에서 저자 스스로도 고백하고 있듯이 본래 하나의 스토리로 엮을 의도로 집필된 작품이 아니다.

때문에 읽는 입장에서도 솔직히 서사가 탄탄하다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사실 주요 내용을 간추리면 '바다를 터전으로 진화한 외계의 지성 생명체가 지구에 협력 차 왔다가 우리가 지구를 오염시키는 모습에 실망하여 떠나기로 결심하는' 것이 전부다.

심지어 한 어린이의 동화 같은 체험을 보여주는 '개복치' 편은 굳이 읽지 않아도 전체 서사를 이해하는데 지장이 없다. (물론 상당히 재미있기 때문에 그냥 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단순한 서사가 저자의 쫀쫀한 문장들에 힘입어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마법으로 변한다.

"어째서요? 돌고래는 착한 동물 아니었어요?"

"착하거나 나쁜 동물 같은 건 없습니다." 검은 정장 사람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그냥 동물입니다."

(pg 172)

해양생물을 닮은 외계인이라는 조금은 유치한 소재도 저자의 체험과 진짜 우리 사회의 사건들이 결합되자 독특한 생명력을 발하며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기존 SF 작품들처럼 외계인들이 인류에게 실존적인 위협을 가하지도 않는다.

그저 같은 종을 착취하고 환경 따위는 나 몰라라 하는 경향은 외계인이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떠날 뿐이다.

비인간 생물종을 위해 인류가 멸종해야 한다 해도 남편만은 살아남기를 원한다.

가능하면 나도 같이 살아남으면 더 좋다. 나도 결국은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pg 208)

250페이지가 조금 넘는 얇은 분량에 대화도 많아서 읽는 부담이 적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탁월한 재미가 있어서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소재로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준 작품이지 않을까.

저자의 작품 중 이 작품보다 더 유명한 작품들이 꽤 많아서 빠른 시일 내에 다른 작품을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 그리고 응급실에서 기다리면서,

나는 하늘과 바다가 뒤집히던 순간 온몸을 통과하던 파동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세상이 맥박 치고 우주가 진동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물속을 질주하던 빛나는 존재들은 서로에게 외쳤다. - 저항하라.

(pg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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