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 좌절의 시대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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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몇 번 접한 바 있는 장강명 작가의 산문집이다.

읽고 나면 기억에 남는 것이 적은 것 같아 짧은 글들을 모아둔 책은 되도록이면 잘 읽지 않으려고 하는데 제목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뭔가 우리 시대를 잘 관통하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막상 해당 제목을 가진 글은 그다지 임팩트가 있지는 않았다.

언제부턴가 국가적으로도 '경제개발 00개년 계획'과 같은 장기적 계획을 수립하지 않고 있듯이 우리 경제나 사회의 발전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보니 무언가를 계획한다는 것 자체가 점차 힘들어지는 현상을 지적하고 있는 글이었다.

그러면서도 상호의존성은 점점 높아져서 바로 내일의 일을 계획하더라도 다른 누군가, 외부의 일정이나 사정 때문에 번번이 그 계획이 틀어지곤 한다.

그렇게 세세한 계획들이 틀어지다 보면 '에라, 계획 따위 세워서 뭐해.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라는 심리가 되기 쉽고 이러한 현상을 저자가 미세 좌절의 시대라 이름 붙이고 있다.

하지만 기자 출신의 저자가 쓴 글들을 모아놓은 책인지라 대체로는 읽는 재미가 좋은 글들이 많았다.

특히 저자가 글을 쓴 시점이 문재인 정부 말부터 현 정부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 있기 때문에 양 정권에 대한 쓴소리들이 많이 담겨 있어서 지금 현안들을 돌아보기에 적합한 주제들이 많았다.

저자는 보수주의자라고 자처하고 있지만, 이 구분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민주당 대 국민의힘으로 나눠지는 좌우 구분이라기보다는 보다 어원 그 자체에 근거한 구분인 것 같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의 양쪽 정치 진영 모두는 진보나 보수로 명쾌하게 가르기 힘든 영역에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저자도 여러 차례 지적하고 있듯이 이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정권 획득이기에 정책에서의 차별성이 그다지 없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다.

따라서 저자 역시 어느 한 정권의 편에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양 정권을 겪은 시민이자 유권자 중 하나로서 느낀 아쉬운 부분들을 잘 토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글들에서 우리 사회가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무언가 목표를 상실한 느낌, 가야 할 방향을 잃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을 많은 글에서 강조하고 있다.

사실 무력감으로 귀결되는 이야기의 결말을 바꾸면 고전적인 영웅서사다.

가진 게 없었고, 시련을 겪었으나, 결말은 창대한. 미

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같은 소재로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그

러므로 희망이, 목표가 필요하다.

(pg 36)

우리는 지금 혼미하다.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서다.

막연하게 소망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을 감성적인 구호 이상의,

길고 차분하고 현실에 부합하는 논리로 풀지 못한다.

거기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그냥 다 같이 시시해졌다고.

(pg 191)

꼭 정치나 사회에 대한 날선 비판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40대 후반인 저자가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소회들도 담아내고 있다.

워낙 여러 분야에 걸친 글들의 모음이라 몇 가지 주제로 압축하기 쉽지는 않지만, 기억에 남았던 몇 구절을 소개하고자 한다.

특히 아래의 '꿈'을 '친구'로 치환해 보는 구절은 언젠가 술자리에서 한번은 써먹지 않을까 싶은 부분이었다.

'꿈이 꼭 있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친구가 꼭 있어야 하느냐'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친구가 의식주만큼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그러나 친구 없는 삶은 황폐하다.

친구가 있으면 덜 외롭고, 힘들 때 위로를 얻는다.

혼자라면 시도하지 않을 일을 친구가 있으면 같이 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진다.

(pg 232)

너무도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해야 하는 현대인의 피로도 저자가 주목하는 것 중 하나였다.

AI의 발달이 예술 창작 분야에까지 실존의 위협으로 다가오는 시대가 되었다.

누구나 자신의 일은 언제까지고 안전할 것이라 믿고 싶지만 사실 확실하게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직업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변화의 속도는 계속해서 빨라지기만 할 뿐, 멈춤의 가치는 아직도 철학과 종교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도시락을 든 채 생각했다. 이게 한계라고. 사람이 이보다 더 바빠질 수는 없다고.

이대로 가다간 쓰러지거나 사고가 난다고.

사람이 너무 바빠지면 현재를 살피지도 미래를 대비하지도 못하게 되는데,

우리 사회 전체가 그 단계에 이른 것 같다고.

(pg 416)

또한 저자는 스마트 기기의 보급과 SNS의 범람으로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타인과 가깝게 연결되어 있지만 정작 외로움은 더욱 심하게 느껴지는 것 같고, 타인과 진정으로 소통하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조차도 점점 잊어가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법한 주제들이었다.

나는 한국뿐 아니라 주요 선진국들 모두 지금 '대중의 기분'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의 기분은 사납고 변덕스럽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며 책임지지도 반성하지도 않는다.

- 중략 - 그래서 짧고 강하게 조롱을 잘하는 이들이 몇 년 전부터 여론을 이끌고 있다.

(pg 69)

기자 출신이니 글 잘 쓰는 것은 기본이었겠지만, 그럼에도 저자가 소설만 재미나게 쓰는 작가가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아직 읽지 못한 저자의 책들이 좀 있어서 조만간 다시 소설로 그를 만나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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