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 조지 오웰 서문 2편 수록 에디터스 컬렉션 11
조지 오웰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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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정부가 후원하지 않은 책에 대해 정부 부처가 검열의 권한을 조금이라도 갖는 현상은 분명히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사상의 자유와 발언의 자유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정보부 같은 정부 기구의 직접적인 간섭이 아니다.

출판사와 편집자가 박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여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특정한 주제들의 출판을 꺼리고 있다.

이 나라에서 지식인의 비겁함은 작가나 기자가 직면하는 최악의 적이다. (pg 9)



읽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보게 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심지어 갖고 있던 책을 두 번 읽은 것이 아닌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다른 버전을 소장하게 되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책과는 달리 초판본 서문과 우크라이나판 서문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끌렸지만, 

예쁘게 단장된 표지도 눈길을 끌었다. 



에디터스 컬렉션이라는 시리즈로 발간되는 것 같은데, 이름답게 앞 표지만 보아도 소장 욕구를 마구 자극한다. 

표지에는 나폴레옹일 것으로 보이는 돼지가 눈을 날카롭게 치켜들고 농장 뒤편에 존재감을 드러내며 바라보고 있다. 

색감이 예쁜 핑크색이어서 보기에 좋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소설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표지 작가는 조지 오웰을 좋아하는 터키인이라 하는데, 원작에 대한 애정이 그림에 잘 표현된 것 같아서 더 좋았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책의 표지도 고난의 삶을 살았던 조지 오웰의 고뇌에 찬 듯한 모습이 담겨 있어서 좋긴 하지만, 

오래 되기도 했고 뭔가 너무 '세계명작전집'스러운 느낌이 강해서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썩 매력적으로 보일 것 같지는 않다. 



동물농장이라는 작품에 대해서는 별도로 내용을 기술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번역가가 달라지긴 했지만, 이전에 소장하고 있던 책의 번역도 좋았고 이번 책도 좋았어서 딱히 차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 접한 버전에 실린 초판본 서문과 우크라이나판 서문이었는데, 길이는 짧지만 많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초판본 서문에는 조지 오웰이 영국에서 처음 동물농장을 책으로 내려고 했을 때의 어려움이 기술되어 있다. 

그 때 작가가 느낀 어려움을 아래의 문단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부가 후원하지 않은 책에 대해 정부 부처가 검열의 권한을 조금이라도 갖는 현상은 분명히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사상의 자유와 발언의 자유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정보부 같은 정부 기구의 직접적인 간섭이 아니다.

출판사와 편집자가 박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여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특정한 주제들의 출판을 꺼리고 있다.

이 나라에서 지식인의 비겁함은 작가나 기자가 직면하는 최악의 적이다. (pg 9)


즉, 정부 부처에서 출판을 막는 것이 아니라 여론이 두려워 출판사 스스로가 몸을 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소련을 비판하는 소설을 발간하는데 왜 영국 출판사들이 눈치를 볼까 처음에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등장하는 사회적 배경을 읽다보니 금새 이해가 되었다. 


소련이 혁명 이후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노동 해방'을 표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에 대한 비판이 자칫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보일 수 있었던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더 실제적인 이유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어쨌든 소련 역시 독일에 대항하는 연합군이었기 때문에 

동맹국을 비판하는 것을 주저했던 사회적 분위기도 형성되어 있었다. 


소련에 열광하는 현재 분위기는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전반적인 약화를 나타내는 증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만약 정보부가 나서서 이 책의 출판을 적극적으로 막았다 해도, 영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에 무비판적으로 충성하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므로, 소련의 이익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들은 검열뿐만 아니라

고의적인 역사 위조조차 기꺼이 참아 넘긴다. (pg 22)


하지만 조지 오웰은 자신이 사회주의자로서 당시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사회주의가 아닌 전체주의임을 

동물농장이라는 작품을 통해 비판하고자 했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주장을 가로막지 말라는 메시지도 단호하게 전달한다. 


사상과 발언의 자유에 반대하는 모든 주장에 대해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

여기에 나는 간단히 답한다. 

나는 그런 주장을 납득할 수 없으며, 지난 400년 동안 우리 문명은 그 반대의 주장 위에 건설되었다고. 

지난 10년 동안 나는 지금의 소련 정권이 대체로 사악한 존재라고 믿었다. 

그리고 내게는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있다. (pg 24)


이어 등장하는 우크라이나판 서문에서는 조지 오웰이 직접 기술한 자신의 인생사가 짧게 소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조지 오웰이 왜 작품들을 썼고 어떻게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동물농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돼지와 인간이 마치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이는 본인이 의도한 것과는 다르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

나도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에는 '돼지가 모습만 다른 인간이 된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의도한 바가 두 계층 사이의 불협화음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다시 작품을 접하니 

돼지는 결국 인간과는 또 다른 형태의 지배계층이었다는 것이 더 명확하게 이해되는 것 같았다. 


현재 소장하고 있는 두 책 모두 소설 내용은 동일하지만, 함께 실린 서문이 달라서 둘 다 소장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소장한 두 권 외에도 버전이 엄청 많은데, 이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책에 어떤 서문이나 에세이가 포함되어 있는지

잘 보고 선택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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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의 섬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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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그는 눈앞의 여자를 이 섬을 탈출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있었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어린 시절로부터, 아내와 친구들로부터, 그들의 모든 애정과 요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정신이란 텅 빈 도시를 영원히 헤매고 다니기 위해서. (pg 183-184)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콘크리트'와 고립을 상징하는 '섬'이라는 단어가 합쳐져 묘한 느낌을 주는 제목에 끌렸다.

띠지에 '로빈슨 크루소의 전복적 오마주'라는 문구가 적혀있는데,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섬에서 벌어지는 고립과 생존의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졌다. 


보통 소설을 소개하면서 스토리에 대한 스포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워낙 옛날 작품이기도 하고 

스토리를 안다고 해서 작품의 매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되어 스토리와 감상을 섞어 기술하고자 한다. 



잘나가는 건축가로 살아온 로버트 메이틀랜드라는 한 남자가 런던 근교의 입체 교차로를 지나다 교통사고를 내게 된다. 

차가 도로 아래로 추락하면서 다리에 큰 부상을 입게 되는데, 떨어진 곳이 하필이면 고속도로로 둘러싸인 교통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엄청나게 많은 차들이 매시간 주변을 지나가지만 누구도 그곳에 사고로 고립된 사람이 있을 것이라 쉽게 예상할 수 없는 그런 곳.

메이틀랜드는 부서진 차에 실린 자신의 짐과 주변 환경을 이용해 섬에서 탈출하고자 노력한다. 


작품 속 교통섬의 느낌이 나는 사진을 찾아보았는데, 아래처럼 고가도로로 둘러싸인 널찍한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속에 부서진 채로 방치된 방공호, 극장 건물 등의 잔해들과 메이틀랜드의 차와 마찬가지로 사고로 버려진 차들이 잔뜩 있는 

널직한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Under the Westway 

(사진 출처: https://www.r2h.co.uk/j-g-ballards-concrete-island)


일단 이런 교통섬에 갇힌다는 설정 자체가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이 작품의 배경이 1970년대라는 것이다.

휴대폰이나 GPS 같은 시설이 전무하고 도로의 비상전화도 부상당한 다리로 가기에는 거리가 제법 된다고 묘사되어 있다. 

물론 현대사회라 하더라도 교통사고로 휴대폰이 파손되거나 비가 많이 와서 고장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니 요즘이라고 아주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읽으면서 몇 년 전에 본 '김씨표류기'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물론 이 책이 훨씬 전에 나온 것이니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영화가 이 책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그 영화가 고립이라는 주제를 조금은 코믹하게 풀어냈다고 한다면, 이 작품에서의 고립은 처절하고 냉소적인 느낌을 준다.

아내와 자식, 내연녀까지 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던 그는 이 섬에서 한 순간 잡초와 같은 존재로 전락한다. 


그는 열린 문을 통해 안쪽을 기웃거리며 그의 다리로 손을 뻗는 짓밟힌 풀잎들 사이에서 좌석에 기댔다.

이 강인한 잡초야말로 행동과 생존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존재였다. (pg 73)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존재인 잡초. 

그는 잡초와 쓰레기로 가득찬 섬에서 탈출을 시도하지만 부상만 늘려가고 체력은 소진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비틀거리는 동안, 메이틀랜드는 육신에 대한, 그리고 염증에 부어오른 다리의 고통에 대한 관심이 흐릿해져감을 깨달았다.

그는 육체를 부분으로 나누어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중략-

섬을 그 자신이라 여기게 된 그는 폐차 무더기 쪽의 자신의 자동차를, 철조망 울타리를, 

그리고 뒤편에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중략-

그는 자신의 육신을 성체성사에 봉헌하는 성직자처럼 큰 소리로 선언했다. "나는 섬이로다." 

하늘에서 빛살이 드리웠다. (pg 89-90)


책의 중반부를 지나면서 그 섬에 사실은 원주민이 둘이나 있었고, 이들은 스스로를 섬에 가둔 존재들이어서 메이틀랜드 때문에 외부인이

섬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가면서 그는 기묘한 변화를 보여준다.


그는 눈앞의 여자를 이 섬을 탈출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있었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어린 시절로부터, 아내와 친구들로부터, 그들의 모든 애정과 요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정신이란 텅 빈 도시를 영원히 헤매고 다니기 위해서. (pg 183-184)


그에게 섬이란 것이, 그리고 고립이라는 것이 사실 그가 바라던 바였을지도 모른다. 

책임과 의무가 동반되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오는 권태감과 피로감을 떨쳐내고 싶었을수도 있겠다. 

비록 버려진 음식으로 연명하는 삶이지만 온전한 고독감, 

자기 자신마저 더이상 인지되지 않을 정도의 처절한 고독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섬과 자신을 일체화한 그는 결국 다시 혼자 섬에 남겨지게 된다. 


초반부를 읽을 때만 하더라도 도심 속 섬에서의 고립이라는 소재로 어떻게 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230여 페이지로 두꺼운 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길게 풀 수 있는 소재라는 생각이 별로 안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SF문학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달린 작가의 작품답게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고 읽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보면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겹쳐졌다. 

우리는 서로 부대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고독할 수 있는 시간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최근 한국의 중년 남성들에게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열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와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고 싶어하면서 자신만의 섬에 틀어박히고도 싶은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책의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메이틀랜드 역시 탈출하고 싶지만 탈출하고 싶지 않은 기묘한 느낌을 준다.

무의미한 탈출 시도를 계속하는 메이틀랜드를 보며 되지 않을 시험을 계속 붙들고 있는 장수생 청년들의 모습도 겹쳐보였다. 
어쩌면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는 것보다 그 목적을 향해 힘쓰는 자신의 모습에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지 않은 작품이지만 작품 자체가 다소 어둡고 처절한 느낌이어서 쉽게 손이 넘어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접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드는 걸 보니 역시 거장은 거장인가보다 싶다. 
발전된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조명해주는 작품들을 좋아하는 개인 성향에는 아주 잘 맞는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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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로지 - 히어로 만화에서 인문학을 배우다
김세리 지음 / 하이픈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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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빌런은 스스로를 결코 악한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의를 구현한다고 믿는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들을 엄밀히 구분해야만 한다. 

힘이 있음에도 약자 편에 서는 자들은 영웅이다. 

힘 있는 자들에게는 감히 대적하지 못하면서 약자만을 괴롭히는 자는 빌런이다. (pg 282)



엔드게임 이후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몸살을 겪으면서 전 세계 영화 시장을 주름잡던 마블의 위세도 다소 꺾인 느낌이다.

하지만 2030은 물론 그 윗세대까지 슈퍼히어로라는 다소 유치해보이는 소재로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둔 것은 놀라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만화 기반의 캐릭터들에게 푹 빠지게 만드는 마블의 방대하고도 매력적인 세계관을 소재로 한

인문학 책이 나왔다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읽기 시작했을 때의 첫인상은 저자가 MCU로 대표되는 마블의 영화들은 물론이고 경쟁사라 할 수 있는 DC코믹스까지도 

초기작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충실하게 섭렵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속된 말로 '진성 덕후'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세세한 부분까지 책에 녹여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곳곳에 보였다.


특히 개인적으로도 슈퍼히어로 관련 그래픽노블 중 최고로 꼽는 '왓치맨'과 '다크나이트 리턴즈'에 대한 분석이 인상적이었다.

그 두 작품에서 보여지는 슈퍼히어로들은 우리가 흔히 만화책에서 기대하는 권선징악의 전형적인 히어로물과는 확연히 다르다.


간단히 말하면 슈퍼히어로들끼리의 분쟁이라고 보면 되는데, 양쪽이 모두 대의적인 명분에서는 '선'의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한 쪽을 명백하게 '악'으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단순히 악당이 나쁜 짓을 하면 슈퍼히어로가 나타나 이를 응징하는 단순한 패턴에서 벗어나 슈퍼히어로란 무엇이며

그 존재가 어떤 도덕적 딜레마를 불러 일으키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하면 된다. 

작가는 이 두 작품에서 시작해 마블의 초대박 이벤트였던 '시빌워'로 논지를 확장해 나간다. 


그러면서 마블의 히어로들이 고대부터 인류에게 존재했던 '신화'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마블이 그리스 로마 신화나 북유럽 신화처럼 종교와 결합된 형태는 아니지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를 상상해보고 그들을 통한 도덕적, 철학적 질문들을 던져주고 있다는 것이다.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MCU를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마블의 캐릭터들을 그들과 유사한 신화속 인물들과 비교하면서 

소개해주는데, 그러면서 저자가 내린 슈퍼히어로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이를 통해 슈퍼 히어로라는 존재의 기본적인 가닥이 잡힌 셈이다.

초인적인 힘, 혹은 그에 준하는 또 다른 힘(재력이나 권력)이 수반된 상태, 

확고부동한 그들의 윤리의식(다시 말해 정의관), 가면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충족되었다면 그는 슈퍼 히어로라 불릴 만하다. (pg 71)



저자가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소개해가면서 궁극적으로 다루고자 한 문제는 '시빌워'를 비롯한 최근의 슈퍼히어로물에서 보이는 

히어로들 간 가치관의 충돌이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슈퍼히어로물에서의 정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고 있다. 


캡틴 아메리카가 '미국의 이상'을 상징하는 히어로라면, 아이언맨은 '미국의 현실'을 상징하는 히어로이며, 

어떻게 보면 미국 정부의 행태를 대변하는 히어로이다. (pg 109)


위 구분은 다분히 코믹스 기반의 구분이기는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보여준다. 

'현실 감각이 다소 떨어지는 이상의 추구'와 '이상을 포기한 현실에의 순응' 사이의 갈등이기 때문이다. 

독자에 따라서 어느 쪽이 옳다고 쉽게 편을 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물론 그래픽노블 역시 다수의 독자를 타겟으로 한 가벼운 장르이므로 결과적으로는 작가가 어느 한 쪽 편을 들게끔 유도하지만,

그 대립이 주는 주제는 생각해볼만한 도덕적 질문을 던져준다. 


저자는 양쪽의 주장을 벤담의 '공리주의'와 칸트의 '정언명령'을 빌어 해석한다. 

긴 이야기를 요약하면, 저자는 '슈퍼히어로가 추구해야 할 정의란 결코 공리주의에 기반을 두어서는 안된다'라는 입장이다. 


우리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행위나 방식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정의 자체를 선택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선택적 정의란 있을 수 없다. 정의가 선택이라는 명제 자체가 이미 그것이 정의가 아님을 증명한다.

감히 선택할 수 없는 것, 이미 우리 마음속에 정답을 갖고 태어난 것. 

이것이 바로 '정의의 정의(The definition of justice)'이다. (pg 280)


즉, 결과적으로 잘 되었다 하더라도 행동의 의도와 수단이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았다면 그 행동은 영웅적일 수 없고 

결과가 참담했다 할지라도 행동의 의도와 수단이 도덕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행동은 영웅적이라는 뜻이다. 


위에서 저자가 예로 들었던 '왓치맨'의 결말을 보면, 뉴욕 인구의 절반을 희생해 냉전을 종식하고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쪽과

거짓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평화는 의미가 없으므로 이를 폭로해야 한다는 쪽이 나뉘게 된다. 

저자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지는 명백하다. 


종합적인 느낌으로는 '마블로 학문을 해보겠다' 라는 의미로 지어진 '마블로지'라는 제목의 거창함에 비하면, 

내용이 그렇게까지 알차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마블이나 DC의 원작 코믹스를 두루 섭렵하지 않았다면 책을 읽어감에 있어서 약간 소외감(?)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다. 

(저자가 '이 정도는 알겠지' 하고 써 내려간 부분이 이해가 안될 수 있다.)


하지만 두께도 얇고 글씨도 큰 편이라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아서 이쪽에 흥미가 있다면 충분히 재미나게 읽어봄직한 책이다. 

(실제로 나도 처가댁에 놀러간 주말 사이에 모두 읽었을 정도로 재미는 충분했다.)

진지빨고 이게 맞네 틀리네 논쟁할 수준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던 캐릭터들과 유사한 신화 속 인물들을 만나보고 

최근의 슈퍼히어로물에서 보이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사색에 잠시 빠져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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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들
태린 피셔 지음, 서나연 옮김 / 미래와사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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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우리는 외롭지 않으려고 바쁘게 지내고, 사회생활과 사랑하는 사람, 아이들에게서 목적의식을 찾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려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던 것들은 언제라도 빼앗길 수 있다.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기분이 나아진다. 

온 세상이 나와 마찬가지로 허술하고 외롭다. (pg 421-422)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재밌게 읽었다.

너무 재밌게 읽어서 내 서평이 이 작품을 접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미친 스토리를 이렇게 재미나게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몰입감이 대단한 작품을 만났다.


스토리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기 때문에 최대한 스토리 스포를 자제하려고 하는데,

기본 스토리를 안적으면 글 진행이 어려워서 출판사에서 적어둔 정도만 옮긴다. 


상상해보자. 내 남편에게 두 명의 아내가 더 있다고.
난 다른 아내들을 만난 적이 없고,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 이 독특한 합의 때문에 남편을 일주일에 단 하루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남편을 너무 사랑하니까. 아니, 남편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나 자신을 타이른다.
하지만 어느 날, 빨래를 하다가 남편의 주머니에서 종이를 발견한다. 해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에게 발행된 청구서다. 

해나가 다른 아내라는 것은 단박에 알 수 있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난 그녀를 추적하고, 거짓으로 우정을 나누기 시작한다. 해나는 내가 누구인지 꿈에도 모른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러 나온 해나의 몸에는 숨길 수 없는 멍이 보인다. 그녀는 남편에게 학대받고 있다. 

물론 그 남편은 내 남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 폭력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이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리고 남편의 비밀스러운 세 번째 아내는 누구일까?

(출처: 네이버 책 소개,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657809)


위 책 소개만 봐도 미친 스토리라는 것이 잘 느껴진다.

읽고서 '와이프가 셋이라고? 완전 좋겠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필시 미혼일 것이다.

결혼 생활을 좀 했다면 느낄 수밖에 없다. 

배우자는 하나로 매우 충분하며 인류가 일부일처제를 택한 것은 위대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여하간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아내가 셋 있는 남자의 두 번째 아내다.

(주인공의 이름 조차도 스포가 될 것 같아 그냥 주인공이라 쓰기로 했다.)

남편은 매주 목요일에만 만나고 다른 날은 다른 아내들에게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지는 작품 속에서 확인 가능한데, 사실 이 관계의 현실 가능성은 작품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무슨 소린지는 읽어보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심경 변화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엄청 상세한 편이다. 

세밀한 심리 묘사 덕분에 내가 저런 상황을 겪어봤을리도 없고, 심지어 여성도 아닌데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엄청 잘 되는 느낌이었다.

심지어는 몰려드는 감정의 강도가 너무 쎄서 중간중간 책을 내려놔야 할 정도였다.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은 감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작품의 큰 줄기는 주인공이 다른 아내들의 신상을 알게 되면서 겪는 심리적인 변화이다. 

처음에는 기묘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남편을 사랑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지독하게 독특한 우리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그게 바로 사랑이다. 그렇지 않은가?

배우자에게 딸린 것도 함께 해결하는 것이 사랑이다. 내 배우자에게는 다른 여자 둘이 딸려 있다. (pg 51)


쉬 이해가 가진 않지만 누군가를 너무도 사랑하면 그 사람의 단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듯이 

그녀는 남편을 일주일에 하루라도 차지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하지만 다른 아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과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다른 아내들에게는 자신에게 없는 다른 매력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질투와 불안감이 그녀를 덮친다. 


이런 심경 변화 덕분에 사건은 결국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작품의 마지막까지도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도무지 끝을 예상할 수 없는 미궁을 헤쳐가는 듯한 긴장감을 이어간다. 


덕분에 4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두께임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이 읽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외롭지 않으려고 바쁘게 지내고, 사회생활과 사랑하는 사람, 아이들에게서 목적의식을 찾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려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던 것들은 언제라도 빼앗길 수 있다.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기분이 나아진다. 

온 세상이 나와 마찬가지로 허술하고 외롭다. (pg 421-422)


작가가 페미니스트인 것 같은데 스토리에 페미니즘적 시각이 거부감 없이 잘 담겨 있는 것도 장점이다. 

최근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가스라이팅'의 위험성도 간접적으로 경험해볼 수 있다. 

가부장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 가스라이팅에 능한 남자에게 이용당하는 주인공의 삶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도 크게는 '인간 관계'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인간 관계가 그렇겠지만 사실 일방적인 관계는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가깝게 지내는 사이일수록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더욱 중요해지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배우자는 하나로 충분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평생을 살아도 옆에서 잠든 사람의 속도 잘 모르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물론 '절대 바람은 피지 말아야겠다' 정도의 저렴한 감상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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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여니 양자역학이 나왔다 - 읽을수록 쉬워지는 양자역학 이야기
박재용 지음 / Mid(엠아이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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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돌이인 주제에 양자역학을 이해해 보겠다며 이 책 저 책을 기웃거리고 있다.

불행히도 그 중 서평쓰기에 성공한 책은 단 하나도 없었다.

분명 읽긴 다 읽었는데 책을 덮은 후 뭘 읽었는지 정리하자니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 역시 나의 양자역학 짝사랑의 연장선상에서 접하게 된 책이다.

뭔가 제목부터 '쉽게 설명해줄게 츄라이 츄라이'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결과적으로는 이 책이 내가 서평을 남길 수 있는 첫번째 양자역학 책이 되었지만 사실 쓰는 입장에서도 썩 개운한 기분은 아니다. 

지금도 내가 양자역학에 대해 뭘 알고 있는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책을 덮은 후의 감상을 먼저 짧게 남기자면 문돌이 입장에서는 이 책 역시 결코 쉽지는 않았다.

기존에 양자역학을 쉽게 설명해주는 책을 조금이나마 접해본 입장에서도 모르는 용어들이 너무 많아서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특히나 'A라는 것이 있는데 이 것이 B와 만나면 C의 상태가 되고 우리는 이를 D라고 부른다'라는 식의 설명이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데, 

문장 속 A부터 D까지 전부 모르는 용어인 경우가 많으니 당연히 이해가 더딜 수밖에 없다. 


물론 나의 이해 부족이 저자나 책의 잘못은 아니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해한 바를 조금 정리해 두려고 한다. 


먼저 양자역학은 엄청나게 작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

물론 그 작은 것이 모여 우리가 사는 세상을 형성하고 있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현실 세계(거시 세계)와 양자 수준의 미시 세계는 적용되는 물리법칙이 다르다. 

때문에 양자역학 관련 서적을 처음 접하면 이해가 쉽지 않은 것이다. 


가장 먼저 입자와 파동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상 생활에서는 모든 것들을 입자와 파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것이 입자인지 파동인지를 알면 그 움직임을 측정하고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 수준으로 시각을 좁히면 입자와 파동의 경계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 시작점이 바로 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 책에서도 기나긴 역사 속에서 빛의 입자성 혹은 파동성을 증명하고자 애썼던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결과만 정리하자면 결국 빛은 입자와 파동 두 가지의 성질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세상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에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돌고 있는데, 

이 전자 역시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것이 양자역학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이중슬릿 실험과 슈레딩거의 고양이을 비롯한 양자역학의 재미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시작된다. 

전자라는 것이 관측하는 순간 입자처럼 움직이고 그냥 두면 파동의 형태로 움직인다는 것이 결론이기 때문이다. 

파동이라는 것은 동시에 여러 군데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므로 당연히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전자라는 것의 위치 역시 마치 행성들이 태양 주변을 돌듯 원자핵 주변을 전자가 일정한 궤도로 뺑뺑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존재할 수 있는 확률로만 계산할 수 있다고 한다. 

결국 확률이 0이 아닌 이상 그 범위 내 어디든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익숙해 보이는 왼쪽 그림이 아니라 오른쪽 그림처럼 표현된다는 의미이다. (그림: pg 64)


결국 우리 몸도 원자로 이루어졌다고 본다면, 우리 몸 속의 전자들도 관측하지 않으면 파동이 된다.

(물론 바로 옆 원자들이 서로를 관측하는 셈이니 결코 관측되지 않는 형태로 존재할 수 없겠지만)

바로 이 부분에서 각종 SF물에 등장하는 워프니, 멀티버스니, 시공간의 초월이니 하는 개념들이 파생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현실과 괴리된 사례 대신 우리 실생활 속에서 양자역학적 지식으로 밝혀낸 것들을 함께 알려준다. 

물론 양자역학이 어떻게 여기에 관여하고 있는지를 전문적으로 풀면 독자 대부분이 이해를 못할테니

'이런 이런 부분이 양자역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더라' 정도의 설명이 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그 중 가장 신기했던 것이 광합성의 원리이다.

사실상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체는 식물의 광합성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생명의 근원적인 활동인데,

이 광합성 과정에 양자역학적 움직임이 없다면 식물이 이 정도의 속도로 광합성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또한 양자역학이 일반 대중들에게도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유명 IT 회사들에서 만들고 있는 양자컴퓨터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이 책에서는 양자 컴퓨터에 대한 소개도 비교적 상세히 해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일반적인 컴퓨터와 무엇이 다른지 궁금했는데 일면 궁금증이 해소된 것 같다. 

 

세상이 발전할수록 컴퓨터에 요구하는 성능은 계속 높아지고 이 요구를 수용하려면 선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속도로 선폭이 좁아지면 결국 이 양자터널링 현상이 발목을 잡게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양자컴퓨터인 것이지요. (pg 156-157)


컴퓨터에 들어가는 반도체의 집적도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반면 크기는 계속해서 작아지고 있는데 이런 기술 개발 과정이 반복되어 

결국 그 크기가 양자역학적으로 유의미할 정도로 작아져서 양자터널링 현상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전류가 흘렀다 끊겼다 하면서 데이터를 전송하는 것이 반도체인데, 인근 반도체와의 거리가 너무 좁아서 양자터널링이 

발생하면 계속해서 전류가 흐르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매일 쓰는 컴퓨터의 기술 개발이 이 정도인 것도 신기하고 이를 양자컴퓨터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한 부분이었다. 


총평을 하자면 이 책은 저자가 쉽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여실히 보인다.

그림도 많고 서술도 친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전공자가 보기에 쉬운 책은 결코 아니었다. 

설명하고자 하는 개념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히려 양자역학의 기초적인 지식을 조금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얻을 것이 더 많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족이지만, 책에 옥의 티가 있다. 

아래의 그림은 책의 148페이지인데, 도체와 부도체 그림이 서로 뒤바뀌어 있다. 

설명을 읽으면 이해가 가긴 하지만, 설명을 돕는 그림인데 그림이 틀려 있으니 처음에는 엄청 헷갈렸다. 

내가 이해한 바 내에서는 이것밖에 못찾았지만, 혹시라도 다음 판본이 나온다면 이런 오류들이 다 수정되길 바란다. 

(pg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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