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장의 참극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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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출처: 출판사 증정

추리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이름은 몰라도 '긴다이치 코스케'는 알고 있을 것이다.

194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 나왔던 시리즈라 원작을 읽어본 적은 없더라도 우리 세대라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소년 탐정 김전일'은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김전일의 가장 대표적인 대사가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였는데 이 대사 속의 할아버지가 바로 이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전설적인 명탐정이다.

개인적으로는 원작을 처음 접하는 것이라 굉장히 기대가 되었다.

검색을 좀 해보니 긴다이치 시리즈만 해도 총 70편이 넘고 그 중 일부가 국내에 세트 상품으로 발매된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은 해당 세트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고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모양이다.

작품의 배경은 '명랑장'이라고 하는 건물이다.

후미 해설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일본에는 특정 건물에서 펼쳐지는 추리, 미스터리 작품이 많은데 이 작품 역시 그러한 전형을 따르고 있다.

메이지 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갑자기 위세가 높아진 한 귀족이 암살당할 것을 우려해 곳곳에 비밀 탈출구를 만들어 두어 '미로장'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는 설정이다.

작품 속 현재 시점에는 숙박시설로 개조해 개업을 앞두고 있다.

이 건물에서는 과거에 미모의 여성을 둘러싼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었다.

당시 건물의 소유주가 미모의 후처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재산을 독차지할 목적으로 계모가 젊은 남성과 바람을 피운다고 이간질을 시켜 서로 죽고 죽이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후처와 불륜 관계라고 모함을 받은 젊은 남성은 왼팔 전체가 잘린 채 건물 근처의 동굴에 숨어들었고, 끝내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채 전설처럼 그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명랑장을 물려받은 아들은 건물을 유지하기는커녕, 생활고에 시달려 신흥 재벌에게 건물을 팔아버리게 되고 아름다운 아내마저 그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러던 중 앞서 죽은 사람들의 추모 행사를 위해 관계자들이 명랑장에 다시 모이게 되고, 왼팔이 덜렁거리는 사내를 보았다는 증언이 이어진다.

그러다 결국 한 명이 사망하게 되고 이 사건을 우리의 명탐정 긴다이치 고스케가 풀어가는 내용이다.

배경을 길게 풀어썼지만 여기까지가 초반 이야기고 이어서 몇 명의 사람이 더 죽어나간다.

다 읽고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역시나 유명한 작품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살인 사건이라는 소재 자체도 자극적이지만 이 작품은 거기에 치정 문제가, 그것도 대를 이어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소재가 주는 매콤함이 상당하다.

게다가 모든 트릭과 범인이 다 밝혀지고 나서야 등장하는 반전도 있어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추리소설로서 트릭이 주는 재미는 기대보다는 덜했다.

밀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트릭이어서 답을 찾기가 쉬운 편이고 미로장이라는 배경에도 무언가 엄청난 트릭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는데 생각보다 그렇지도 않았다.

(물론 옛날 작품인지라 여기저기서 오마주 되어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후 일본의 사회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귀족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당시 일본의 사회적인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차와 자동차가 공존하고 양복 입고 다니는 사람과 전통의상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공존하는 모습도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였다. (주인공 긴다이치 고스케는 곧 죽어도 하카마를 고수한다.)

물론 옛날 작품인지라 서술에서 느껴지는 차별적인 언어들이 다소 거슬릴 수는 있겠으나, 후미 해설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시대적인 한계는 감안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아쉬운 부분들을 감안하고서라도 재미만큼은 상당했기에 일본의 추리,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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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계단 수학여행 3 - 미확인 괴생명체의 습격 무한의 계단 수학여행 3
최재훈 지음, 김기수 그림, 장세원.김준 감수, 무한의 계단 원작 / 서울문화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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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인 우리 딸은 학습만화를 아주 좋아한다.

만화다 보니 아무래도 읽기가 편할 테고, 그러면서 갖가지 잡지식들을 얻어 아는 척을 할 수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여하간 그런 딸이 매우 좋아하는 학습만화인 무한의 계단 수학여행 시리즈도 벌써 3권이 나왔다.

이번 3권에서는 주인공 일행이 모험을 떠나기 위해 이용하는 '무한호'가 해왕성에 불시착하면서 시작된다.

곧이어 제목처럼 미확인 괴생명체들이 공격해오기 시작한다.

알고 보니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동물들.

인간도 감염시킬 수 있기에 도망 다니던 중 '태권소녀'라는 아이를 만나고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야기를 이어가는 중간중간에 수학 지식들이 알차게 등장한다.

막힌 문을 지나려고 할 때 풀어야 하는 암호 역시 수학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특정한 수를 지폐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각 금액권이 몇 장씩 필요한지 맞히는 내용이었다.

요즘은 다들 카드를 써서 아이들이 지폐를 쓸 일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세는 방법은 매우 중요한 지식인데 이렇게 학습만화를 통해 접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후반부에는 각도와 도형에 관한 정보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었다.

사각형도 모양에 따라 평행사변형, 사다리꼴, 마름모 등 불리는 이름이 각기 다르고 그 도형들마다 내각이 갖는 특징들도 달라지는데 이러한 점을 그림을 곁들여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게다가 책을 다 읽은 후 풀 수 있는 워크북도 포함되어 있어서 마냥 만화만 읽는다고 걱정할 부모들의 마음도 편안하게 해준다.

워크북의 경우 난이도가 제법 있는 편이어서 우리 딸은 지금은 풀 수 없지만, 잘 보관해 두었다가 나중에 해당 부분을 교과에서 배우고 나면 풀어보도록 해야 할 것 같다.

아이도 워낙 좋아하고 부모 입장에서도 권하고 싶은 시리즈여서 앞으로도 계속 나와주면 좋겠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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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피
나연만 지음 / 북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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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제목과 표지부터 선혈이 낭자할 것만 같은 작품이다.

본격적으로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 개인적으로 선혈이 낭자한 작품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라는 점도 말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준우'라는 남성으로 돼지 축사를 하던 아버지의 땅에 반려동물 화장터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적 어떤 남성에게 살해되는데, 범인은 12년형을 구형 받고 만기 출소한다.

범인에게 앙심이 남은 그는 출소한 범인을 죽이려고 찾아가지만 되려 범인에게 당하고 만다.

하지만 뜻밖에도 눈을 떠보니 범인은 이미 죽어있고 잡혀가기 싫으면 그 시체를 처리하라는 메시지가 도착한다.

그 무렵 한강 주변에서 훼손된 사체가 잇따라 발견되면서 경찰이 이를 추적한다는 내용이다.

준우에게는 '준서'라는 이부 누나가 있고 재직 중인 경찰이다.

그녀는 본 사건의 관할이 아닐뿐더러 개인적으로 얽혀 있기도 한지라 공식적으로는 사건을 추적하지 못한다.

따라서 사건의 주요한 추적은 그녀가 멘토처럼 모시는 '박한서'라는 베테랑 형사가 담당한다.

개인적으로 이 박한서라는 캐릭터가 상당히 멋있었는데, 성실해 보이지는 않지만 탁월한 센스로 사건의 흑막을 추적하는 데 크게 활약한다.

작품의 중반쯤 유력한 용의자가 작품에 직접 등장하기 때문에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이 작품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그가 왜 그런 짓을 하고 있는지, 그 인물의 배경에는 또 누가 있고, 그 인물들과는 어떤 관계로 이어져 있는지를 작품의 끝까지 읽어가며 파헤쳐야 한다.

제각각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던 인물들은 마지막에서야 한 장면으로 뭉쳐지고 모든 비밀들이 드러나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작품의 소재가 연쇄살인과 사적 제재인지라 잔인함의 정도는 상당하다.

하지만 각 인물들의 행보에서 느껴지는 서스펜스가 상당히 좋아서 잔인함이 생각보다 부각되지 않았다.

다만 아쉬웠던 부분은 결말이 아주 깔끔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다 읽고 나면 대충 그림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그들 사이의 관계가 작품 속에서 시원하게 밝혀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모처럼 재미있는 작품을 만난 것 같다.

배경도 스토리도 끔찍할 정도로 현실적이어서 영화로 만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박한서는 김윤석 같은 배우가 맡으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 캐릭터였다.)

물론 내용이 내용인지라 무조건 청불이겠지만 스토리 자체가 주는 매력이 있어서 책 내용만 그대로 따라가도 흥행하지 않을까 싶다.

아직 발표한 작품의 수가 많지 않은 작가인지라 앞으로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음 작품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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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블랙박스를 요청합니다
세웅 지음 / 팩토리나인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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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출처: 출판사 증정

이제 도로를 달리는 대부분의 차에는 블랙박스가 달려 있다.

이 기계의 보급으로 교통사고가 났을 때 책임소재를 밝혀내는 것이 매우 편리해졌다.

이런 세상이 되자 자연히 다음으로 우리 뇌에 블랙박스를 심는 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해 보는 SF 작가들이 많아졌다.

이 작품 역시 인간의 뇌에 블랙박스가 심어진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를 상상해 본 작품이다.

이전에도 사람의 머릿속을 모두 기록하는 장치가 등장하는 작품들은 많았지만, 보통은 인간의 기억이 휘발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특히 블랙박스를 심은 주체가 나쁜 의도를 가지게 될 경우 얼마나 큰 힘을 가지게 될지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작품들과는 차별성이 있었다.

작품의 배경은 약 30여 년 뒤의 한국으로 '더 블랙'이라는 기업이 뇌에 이식할 수 있는 블랙박스를 개발해 고독사나 의문사, 미해결 살인사건 등이 일어날 확률을 극단적으로 낮출 수 있게 된 사회이다.

모든 사람들의 뇌에 블랙박스가 심어져 있고, 사망하게 되면 블랙박스를 통해 사망 전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심장마비나 암 등의 질환으로 죽은 몇 명의 사람들에서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작품의 주인공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된 '큰별'과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를 꿈꾸는 '은하'로, 전혀 접점이 없던 두 인물이 연이어 발생한 의문의 죽음을 추적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단 소재가 주는 참신함이 좋았다.

머릿속 블랙박스는 이미 여러 작품에서 다룬 소재지만 이 기계에 대한 통제권이 국가 권력이 아닌 사기업에 있다는 설정이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왔고, 그 사기업이 언제까지나 공익으로 움직여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 역시 작품에 사실감을 더해주었다.

다만 인물들은 다소 평범했다.

지금 시대에 경찰로 복무했던 할아버지를 동경해 경찰이 되었다거나, 전 남자친구의 사망으로 사건에 휘말려 들게 되는 프리랜서 작가, 주인공들을 도와주려고 혈안이 된 것만 같은 주변 인물들까지 여타 작품들에서 너무도 흔히 본 것 같은 인물들이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특히 사건의 흑막이 굉장히 예상하기 쉬운 구조인지라 SF 소설이지만 살인 사건을 둘러싼 치열한 두뇌 게임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다소 김이 빠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흑막은 예상하기 쉽지만 평범한 형사와 작가가 국가와 재력으로 무장한 막강한 권력을 상대로 어떻게 사건을 마무리하게 될지는 마지막까지도 예상하기 쉽지 않았다.

스포일러가 될까 언급은 하지 않겠으나 열린 결말로 끝난다거나 마무리가 아쉽다는 느낌은 들지 않으니 안심하고 읽어도 좋을 것 같다.

200페이지 중반으로 얇고 글씨도 많지 않아서 읽기에 부담스러울 분량은 아니며, 호흡도 빠른 편이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재미나게 읽었고 넷플릭스 영화로 나오면 참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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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아제 바라아제
한승원 지음 / 문이당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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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출처: 출판사 증정

저자 본인도 유명 작가고 이 작품 역시 동명의 영화로 제작될 정도로 이미 유명하지만, 저자의 딸인 한강 작가가 대한민국에 노벨 문학상을 안기게 되면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작품이다.

오랜만에 한국 출판계에 전례 없는 활력이 돌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듯 내가 태어날 무렵부터 사랑받아온 작품의 개정판이 나와 이번 기회에 읽어보게 되었다.

제목이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이라는 점에서 보듯이 이 작품은 불교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작품의 주요 인물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고자 했던 두 명의 여성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한 삶을 살던 '수남'은 어느 날 이웃집에 살던 병약한 하숙생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녀를 향한 절절한 마음을 표하던 그 남성은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되고, 수남은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불교로의 귀의를 위해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은선 스님 밑으로 들어가 '진성'이라는 법명을 부여받는다.

또 다른 인물인 '순녀'는 승려의 자식으로 태어나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가지고 성장했다.

그러다 새로 부임한 국어 선생님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지만, 선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는 모함을 받아 결국 둘은 이별하게 되고 어머니의 내연남에게 강간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상처를 가득 안은 순녀 역시 은선 스님의 밑으로 들어가 '청화'라는 법명을 부여받게 된다.

이 둘의 궤적은 승려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은사인 은선 스님이 대학에 가 더 큰 세상을 보고 올 것을 권유하지만 진성은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며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책과 경전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한다.

하지만 청화는 어느 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남자를 구해주게 되고 그가 자신과 함께 살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자 결국 파계승이 되어 절을 떠나게 된다.

세상의 학자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편견을 가지고,

자기야말로 정말로 진리에 통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로 주장한다.

'이렇게 아는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다.

이것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직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그들은 이렇듯 다른 편견을 가지고 논쟁하면서

'저 사람은 어리석게 진리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자기야말로 진리에 이른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지만,

과연 그들 중에 누구의 말이 진실한 것일까.

(pg 152)

재미있는 점은 저자가 진성의 책과 경전을 통한 깨달음의 추구보다 인간으로서의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타인과 더불어 사랑할 수 있었던 청화의 구도를 더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작품 속에서 청화는 법명을 잃고 다시 순녀로 살아가게 되지만, 작품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진성의 종교관이 오히려 더 세속적이며 가식적이고, 청화의 종교관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의미에서는 보다 종교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깨달음의 진주는 그걸 얻기 위해서 억지로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감수하면서

정진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좁쌀 진주에 지나지 않아요. 적어도 그것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살아 있는 자들의 깨어 있는 넋 속에서

날마다 조금씩 자기 아픔의 삶과 함께 자라 가는 것입니다.

제가 은선 스님을 대단하게 여기는 것이 그 까닭입니다.

(pg 280)

또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극단적인 절제를 요구하는 것이 비단 불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물론 인간의 욕구에는 끝이 없기에 어느 정도의 절제를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볼 때 이득이 더 크다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본적인 욕구 자체를 거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자 역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지나치게 절제할 경우 오히려 비인간성이 드러난다는 점, 욕구가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면서도 충분히 타인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근원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잘 강조하고 있었다.

허황된 꿈을 꾸며 살아가는 것이나, 깨달음이라는 환상을 좇으며 살아가는 것이나,

결국 텅 비게 되기는 마찬가지여.

지옥도 극락도 결국은 니년의 그 텅 빈 우주 안에 있을 테니까.

(pg 323)

개인적으로 종교에 관심이 없기도 하고, 지금과는 사뭇 다른 당시의 고달픈 여성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들은지라 과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걱정했었는데 다 읽고 돌이켜보니 굉장한 기우였다.

저자의 문장이 읽는 재미를 주고 그러면서도 과연 사람답게 사는 삶이란 무엇인가, 이상을 좇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도 던져준다.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 안에 멀게는 동학농민운동부터 가깝게는 광주와 제주도에서 희생된 역사 속 민중들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어 이야기의 깊이를 더한다.

오래된 작품이고 400페이지 정도로 두꺼워 다소 부담이 될 수 있겠으나, 저자의 탁월한 문장과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주는 작품이어서 읽기가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다.

동명의 영화는 너무 옛날에 나온 터라 찾아보진 못했는데 검색을 좀 해보니 원작의 스토리라인은 그대로 따라가는 모양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원작의 재미가 스토리라인에 있다기보단(오히려 전개나 결말은 예상하기 쉬운 편이다.) 저자의 감성적이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문체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원작을 모른 채 영화만 보면 특별한 감동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래부터는 사족이지만 저자가 한 인터뷰에서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는 우수한 번역도 한몫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나도 잘 모르는 단어들도 꽤 나와서 중간중간 검색도 많이 해야 했던 데다 주변 풍광의 묘사가 굉장히 한국적인데 이 느낌을 과연 타 언어로 번역하기가 쉬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쪼록 이 작품을 포함해 한국의 우수한 문학 작품들이 세계 여러 나라로 소개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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