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청춘 청춘
다자이 오사무 지음, 최고은 옮김 / 북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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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저자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 자를 좋아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말고도 '요설체'라 불리는 특유의 문장들이 읽기에 다소 거슬린다는 취향적인 이유도 있다. (이러한 문체를 '요설체'라 부른다는 사실은 '옮긴이의 말'에서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저자의 단편집이어서 읽기에 장편만큼의 부담을 주지는 않을 것 같다는 점, 그리고 책의 디자인이 너무 예뻐서 소장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단편집이지만 400페이지가 넘어 살짝 두꺼운 느낌이고 총 12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 작품은 저자가 일기처럼 쓴 글들을 두서없이 모아둔 것이어서 실질적으로는 11편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인간실격'이 저자의 삶을 그대로 소설로 풀어둔 느낌인데, 이 느낌과 비슷한 작품이 두 작품 수록되어 있다.

'어릿광대의 꽃'과 '우바스테'라는 작품인데 두 작품 모두 자살 시도를 했다가 실패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작품의 느낌은 두 작품이 매우 다른데, '어릿광대의 꽃'에서는 인물들 간의 부조화와 권태의 감정을 많이 보여준다면 '우바스테'는 보다 가볍고 밝은(?), 해학적인 느낌을 준다.

'인간실격'처럼 삶의 무게가 버거워 스스로 포기해버린 주제에 되도 않는 개똥철학을 나열하는 느낌이었다면 당장 책을 덮어버렸을텐데 다행히 그런 느낌은 주지 않아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당신도 알지? 내가 나약한 게 아니라, 괴로움이 너무 무거운 거야.

이건 투정이야. 원망이지.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아니,

당신조차 내 철면피의 힘을 과신하고, 그 남자는 괴롭다, 괴롭다 해도 척이다,

시늉이다, 하고 가벼이 여기잖아.

(pg 184, '우바스테' 中)

책의 포문을 여는 작품인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라는 작품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는데, 세입자의 뻔뻔함에도 무언가 모를 '천재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집주인이 계속해서 속아넘어가는 희극적인 작품이었다.

그밖에도 '등롱'과 '여학생'은 여성 화자가 이끌어가는 작품으로 다른 작품들과는 결이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청춘'이라는 키워드 아래 묶인 작품들이어서 젊은 세대의 고민과 방황이 잘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우리는 결코 찰나주의자는 아니지만, 너무 먼 산을 가리키며 저기까지 가면

경치가 좋을 거라고들 말한다.

그건 분명 맞는 말이고, 조금의 거짓도 섞이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지금 이렇게 심한 복통을 앓고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며 그냥 조금만

더 참아라, 저 산꼭대기까지 가면 다 해결된다, 하고 그저 그렇게만 가르친다.

(pg 262, '여학생' 中)

저자를 그리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잘 읽었다.

'인간실격' 대신 이 책으로 저자를 먼저 접했다면 이렇게까지 싫어하진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 싶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같이 출간된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책과 같이 두면 굉장히 예쁘기 때문에 책장 장식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심결에 사도 후회하지 않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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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사피엔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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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화된 작품들이 있어 유명한 작가지만 막상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내가 좋아하는 SF 장르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에 읽어보게 되었다.

제목만으로도 뭔가 인간에 반하는 존재가 등장할 것임을 알 수 있다.

등장인물은 AI 개발자로 엄청난 부와 명성을 쌓은 '케이시'와 그의 아내 '민주', 그리고 케이시가 사망한 뒤 민주의 새로운 남편이 된 '준모'까지 크게 셋이다.

AI의 거장이었던 케이시는 자신이 치료될 확률이 극히 낮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확률이 낮은 치료에 기대하기보다는 마지막 AI 연구에 전념하기로 결심한 그는 자신의 뇌를 실험 대상으로 삼아 인간과 완벽하게 상호 연결이 가능한 AI를 만들고 이를 '앨런'이라 부르기로 한다.

앨런은 케이시가 병으로 나약해져 있을 때의 뇌를 기반으로 한 AI이기 때문에 그가 가진 원망과 질투, 분노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우선적으로 학습한다.

스스로 과제를 설정해 학습하는 AI인지라 인간의 악의를 굉장히 폭넓게 학습한 앨런이 민주와 준모를 향한 악의를 드러낸다는 것이 작품의 줄거리다.

일단 케이시가 마지막으로 시도한 것이 일반적인 마인드 업로딩과는 다르다는 것이 특이하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인드 업로딩을 하되 자아를 가진 AI가 하나 더 딸려 있는 모양새인 것이다.

케이시는 그저 자신의 인지 능력 향상 정도를 기대했을지 모르겠으나, 자신만의 자아를 형성한 앨런은 당연히 그의 통제를 따르지 않게 된다.

이 설정에서 몇 가지 의문이 따르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케이시와 앨런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케이시가 원본, 앨런이 복제본일 텐데 실제 역학관계에서 케이시는 앨런의 기생충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이미지가 아닌 실물이니까요.

복제하거나 삭제하거나 제현할 수 없는 유일한 진본이죠. 빛과 어둠,

그리고 약간의 우연이 빚어낸 찰나의 진실 말이에요."

내 말은 딱딱하고 서툴렀지만 어색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녀가 되물었다.

"우리 인생처럼요?"

(pg 95)

또한 육체가 없는 정신이 개별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는지도 물음표다.

자의식이 있지만, 구체적인 형상이 없기 때문에 민주와 준모는 앨런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존재가 여러 기기들을 조종하며 현재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충분히 개별적인 존재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저자는 작품의 아이디어를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에서 알파고의 지시에 따라 바둑돌을 놓았던 구글의 한 연구진에서 얻었다고 한다.

실제로 작품 내에서 이 내용이 언급되기도 하고, 앨런에게 휘둘리는 준모를 통해 'AI의 지시를 받는 인간'이라는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어 냈다.

실제로 AI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을 대체할 것이다.

그에 따라 AI가 내놓은 결과물을 그대로 시중에 풀어놓기만 하는 인간도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는 인간이다.

울고 웃고 화내고 슬퍼하고 절망하다가 다시 희망을 찾고 미워하다가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기 때문에 다시 미워하고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고

그러다가 파멸하고 그러면서도 후회하지 않는 지구의 유일한 종.

(pg 280)

이렇게 엄청난 AI를 만들었는데 고작 한다는 짓이 치정 문제라는 점은 다소 불만스러웠지만 그 점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작가의 명성답게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힘이 있었다.

굉장히 찜찜하게 끝낼 수 있는 이야기를 그래도 납득이 갈 만하게 마무리한 점도 좋았다.

SF 소설이지만 아주 먼 미래의 모습을 상상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그의 작품들처럼 영상화하기에도 좋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문서는 사망진단서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때 그가 존재했다는 가장 분명하고 진실한 증거다.

심정지와 무호흡, 경직 상태의 무게와 형태는 삶의 정지 혹은 부재를 단호하게 선언한다.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며 한시적인 삶은 확정적이고 불변하며

영구적인 죽음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니 어찌 삶은 존재의 윤곽일 뿐이며 죽음이 그 실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pg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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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넛지 - 치밀하고 은밀한 알고리즘의 심리 조작
로라 도즈워스.패트릭 페이건 지음, 박선령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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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지'라는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대한민국에서도 가히 '신드롬'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개인적으로도 당시가 HRD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여서 모든 기업들이 마케팅에 넛지를 도입할 지점은 없는지 교육을 통해 찾고자 하는 시도가 유행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넛지'라는 단어는 그대로 써도 굳이 뜻을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일반화된 것 같다.

이 책은 그러한 '넛지'가 우리의 일상에 너무도 많이 도입되어서 되려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것들도 덩달아 늘고 있다는 통찰을 기반으로 한다.

행동과학자와 저널리스트인 저자들은 이렇게 사람들의 정신과 행동을 교묘하게 조종하는 해로운 넛지들을 통틀어 '다크 넛지'라 부르고 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께에 그야말로 '넛지'에 대한 온갖 사례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총 20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각 장마다 다른 방식의 '다크 넛지'를 소개하고 이를 회피하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한지를 정리해 주고 있다.

똑똑한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는 데 더 능숙하다.

연구에 따르면 지능은 '헛소리' 능력과 관련이 있으며,

똑똑한 사람은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더 크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정당화하는 데 능하므로

사기를 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 등이 밝혀졌다.

사람들은 살면서 자신이 도달하고 싶은 결론에 도달하지만,

똑똑한 사람들은 그에 대한 명분을 잘 찾아낸다.

(pg 108)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인터넷 포털이나 쇼핑몰 사이트 등 온라인에서만 이러한 현상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 매장에 퍼지는 특정한 향이 우리의 지갑을 더 잘 열도록 만들기도 하고, 들리는 음악에 따라 주문하는 와인의 가격이 달라지기도 하는 등 가장 원초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오감마저도 마케팅의 힘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물론 SNS를 비롯한 영상 매체의 파괴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저자들과 문화권이 달라서인지 이 부분에서 재미난 시각 차이를 발견했는데, 저자들은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 제고나 폭력에 반대하는 메시지, 성소수자 인식 개선 등 결과적으로 볼 때 긍정적이라 평할 수 있는 개입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상징이나 음모론 관련 내용들은 '진지하게 하는 말인가?' 싶을 정도로 생경한 느낌마저 들었다.

음모론을 예로 들면, 저자들은 음모론에도 모종의 진실이 숨어있을 수 있으니 섣불리 '음모론'이라는 프레임을 씌워서는 안된다고 보고 있다.

즉 메시지에 상관없이 사람들의 인식이나 행동을 교정하려는 시도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메시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사람들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넛지는 정부가 국민들에게 가장 좋은 게 뭔지 알고 있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넛지'라는 용어를 창안한 캐스 선스타인의 말처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

그들이 자신과 가족, 사회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 것을 더 쉽게 선택하도록 할 수 있다."

우리에게 가장 바람직한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 있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pg 291)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의견은 아니었다.

이미 있는 매체로 사회를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면 나는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역사를 통해 국가기관에 소위 '통수'를 맞아본 경험은 어느 국가에나 있을 테니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아직도 지구는 평평하며 모든 우주 지식들은 나사의 농간이라고 믿는 음모론에도 모종의 진실이 숨어 있을 수 있으니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는다.

워낙 충고들이 많아서 다 기억하기도 어려울 정도지만, 큰 줄기는 비슷비슷하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나에게 도달하는 쉬운 정보들은 되도록 경계하고 책이나 서면 등 적극적으로 곱씹고 이해할 수 있는 정보 위주로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는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해결책은 '다크 넛지'를 마치 '마술'과 같이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우리의 눈을 현혹하는 마술사들의 공연은 모르고 볼수록 재미가 있다.

예전에 마술에 숨겨진 트릭을 알려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마술들은 더 이상 청중들에게 신선함을 안겨주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접하는 정보 중 어떤 것들이 '다크 넛지'일 수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도달하는 정보들이 '다크 넛지'이기 쉬운지를 미리 알고 있다면 여기에 현혹될 확률이 극적으로 낮아진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흥미로운 주제의식과 다양한 사례가 넘쳐나는 책이다.

다만 문장들이 영 한눈에 들어오는 맛이 덜한데, 이는 번역의 문제라기보다는 원문 자체가 좀 장황한 느낌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책답게 불과 1-2년 전의 최신 사례까지도 포함하고 있어서 지금 읽기에 최적인 책임에는 틀림없다.

산에 틀어박혀 '자연인'으로 살아도 넘쳐나는 매체의 홍수를 온전히 피할 수는 없다.

게다가 우리에게 도달하는 정보에 얼마나 진실이 담겨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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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자 시리즈 세트 - 전3권 - 수확자 / 선더헤드 / 종소리 수확자 시리즈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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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드라이'라는 작품을 통해 긍정적인 인식이 박힌 작가인데 최근에 수확자 시리즈로 불리는 3권짜리 작품이 나와서 읽어보게 되었다.

시리즈지만 시리즈 자체 제목은 없고 각 권마다 별도의 제목이 붙어있어 편의상 수확자 시리즈라 부르겠다.

작품은 '선더헤드'라는 울트라 AI가 인류의 모든 지식을 흡수한 뒤 사회의 필요를 예측해 생산과 분배 등 사회의 모든 운영을 도맡아 하는 사회를 그리고 있다.

인류의 한계점이었던 질병과 죽음, 사고까지도 모두 극복되어 사람들은 '회춘'이라는 절차를 통해 원하면 언제든 20대의 몸으로 계속해서 돌아갈 수 있다.

다만 지구의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우주로 나가는 것은 계속해서 실패했으며 인간의 수명은 불멸이라는 설정인지라 지구의 인구 수를 인위적으로 조절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혹시라도 인류의 수명을 무한대로 늘리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주에 식민지도 하나 건설하지 못하는지 궁금하다면 3권에서 모든 의문이 해결되니 의문을 유지한 채 쭉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이 역할만은 AI에게 맡길 수 없었기에 '수확자'라는 계층을 두어 인구수를 관리하고 있다.

사망 시대의 인간은 얼마나 속이 좁고 위선적이었는지,

생명을 끝내는 자들은 혐오하면서도, 자연은 사랑했다.

그 시절에는 태어난 모든 인간의 목숨을 다 앗아간 그 자연을 말이다.

자연은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자동적인 사형 선고라 여겼고,

지독히도 한결같이 죽음을 가져왔다. 우리가 바꿨다.

우리는 이제 자연보다 더 큰 힘이다.

(1권, pg 238)

모든 수확자들에게는 일정 기간 동안 수확해야만 하는 할당량이 주어지지만 그 실행 방법 자체는 전적으로 수확자의 자유에 따르며 모든 수확자들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10가지 계명 외에는 그 어떤 법에도 구속받지 않는다.

각 수확자들은 개인의 도덕적인 기준이나 과거의 사망 통계를 활용하는 등 각자의 기준에 맞추어 수확을 행한다.

여기에도 수확자 제도가 창시될 시절의 엄격함과 청렴함을 올곧게 추구하는 일명 '보수파'와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의 신과 같은 존재라며 온갖 사치와 향락을 즐기며 수확 자체를 즐거움으로 삼는 일명 '신질서파'가 있다.

1권은 엄격한 보수파인 한 수확자가 평범했던 소년(로언), 소녀(시트라)를 수확자 수습생으로 거두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종의 사건 이후로 시트라는 보수파 중 한 명의 수습생이, 로언은 신질서파 수장의 수습생이 된다.

체제의 안녕을 위해 각자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달라지면서 이 둘의 궤적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2권의 제목이 세계를 관리하는 AI의 이름인지라 이 AI가 실은 모든 일의 배후였다는 식상한 전개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을 법한데, 다행이라면 그런 접근법은 취하고 있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스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언급하면, 저자가 선더헤드와 수확령 사이의 관계를 굉장히 절묘하게 잘 설정해두었기 때문에 선더헤드는 직접적으로 인류의 탄생과 죽음에 관여할 수 없다.

1권에서 세계관과 인물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면 2권에서는 보수파에서 신질서파로 힘의 위계가 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음파교라는 사이비 종교가 초반부터 등장하는데, 2권까지는 그저 농담처럼 등장하는 집단이지만 3권에서부터는 이야기에 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3권의 제목인 '종소리' 역시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음파교의 지도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너는 끔찍한 사람이야." 선더헤드가 말했다. "너는 훌륭한 사람이야."

"뭐야, 어느 쪽이야?" 그레이슨이 물었다.

그러나 똑같이 희미하게 들려온 응답은 답변이 아니라 또다른 질문이었다.

"어째서 둘 다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지?"

(3권, 475)

죽음과 질병이 극복된 세상, 누구나 일을 하지 않아도 굶어죽을 염려를 하지 않는 유토피아가 펼쳐져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세상이라면 우리가 지금의 감정과 정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내 목숨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할 수 있고, 증오할 수 있으며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행복할 수도,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고 싶을 정도로 좌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거세된 세상에서 저자는 오히려 타인의 목숨을 거두어야 하는 수확자들이야말로 그나마 인간적이라 부를 수 있지 않겠냐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죽을 운명이었던 사람들이 목적을 위해 더 분투했다고 믿는다.

그들은 시간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우리는 죽을 운명이었던 이들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모든 것을 미룰 수 있다.

죽음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라 예외가 되어 버렸기에.

(1권, pg 432)

전반적으로 매우 재미나게 읽었다.

물론 하드 SF는 아니기 때문에 약간 유치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기는 하다.

(개인적으로 바로 이전에 읽은 SF 소설이 '삼체'라서 그렇게 느꼈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세계관도 굉장히 매력적이고 등장하는 인물들도 개성이 잘 살아 있다.

총 3권이지만 페이지로는 1800페이지 정도라서 그리 짧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3권의 초반 전개가 다소 지지부진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전개도 빠르고 이야기에 군더더기도 없었다.

결말 역시 찜찜한 요소 없이 모두가 흡족할 만한 결말이어서 다 읽고 나서도 기분이 좋았다.

이미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는데, SF지만 배경이 아주 미래적인 느낌은 아니기 때문에 CG보다는 배우들의 액션 연기가 더 중요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시트라 역에 '헤일리 스타인펠드'가 딱일 것 같은데 과연 누가 나올지 궁금하다.

영화 역시 3부작으로 만들어도 재미있을 작품이어서 모쪼록 원작의 재미를 헤치지 않는 선에서 제대로 만들어져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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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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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상하게 들릴 테지만 오로지 책을 읽고 싶어서 휴가를 낼 때가 있다.

그런 날 재미있는 책을 읽어야 보람이 큰데, 그런 면에서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400페이지가 넘는 약간 두꺼운 책이었지만 휴가 낸 것이 아깝지 않게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작품은 두 여성의 시각으로 진행된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언니를 잃은 초보 작가와 자살로 아버지를 잃은 영화감독.

자살을 모티브로 한 영화로 이미 유명세를 얻은 감독은 다음 작품으로 15년 전에 한 마을에서 일어났던 살인사건에 주목하고, 그 마을 출신인 작가와 함께 사건에 숨겨진 전말을 함께 추적한다.

어린 시절에 그 마을에 살았던 것을 제외하면 전혀 접점이 없던 두 사람이지만 사건을 파헤쳐 감에 있어서 그 이상의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여성의 시각을 오가며 진행된다.

두 사람 모두 어린 시절에 겪은 상처가 있는데 초반에는 이 상처들이 현재까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가 조금씩 드러난다.

특히 소중한 누군가가 자살로 세상을 떠난 경험은 큰 상처로 남는다.

유족들은 그 죽음에 내 책임이 있지는 않은지 한참을 죄의식에 시달린다.

나 역시 친동생이 자살로 세상을 떠난 터라 인물들의 심정에 적잖이 공감할 수 있었다.

부모로부터의 학대 역시 상처의 큰 축을 이룬다.

아이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의 처벌이라는 극단적인 관심 속에 발생하는 학대와 방치와 외면이라는 극단적인 무관심 속에 발생하는 학대가 모두 다루어진다.

개인적으로도 아이를 키우는 아비다 보니 나는 아이에게 어떤 기대를 하고 있고, 아이 눈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체념하면 울 기력조차 없어지는 것일까.

그래도 역시 가슴으로는 울부짖었을지 모른다. 도와줘. 나 좀 도와줘, 하고.

그럴 때 누가 손을 내밀면, 손가락 끝으로 신호를 보내고,

서로를 격려하는 상대가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곧 생명의 은인 아닌가.

(pg 185)

두 사람과는 전혀 접점이 없어 보였던 사건이 실은 두 사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작품이 마무리되는데, 일가족 살인 사건이라는 끔찍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말이 꽤나 해피엔딩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두 사람 모두 소중한 사람이 떠난 이유가 본인 탓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결말이어서 책을 덮으면서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인식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실제로 발생한 일은 사실,

거기에 감정이 더해지면 진실이라고 인식하고 있어요.

재판에서 공표되는 내용은 사실뿐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공평하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행동에는 반드시 감정이 따르잖아요.

그 감정을 배려할 필요가 있으니 재판에서 판가름하는 것도 그 진실이어야 마땅할 탄데,

과연 그게 진짜 진실일지."

(pg 252)

앞서서도 언급했지만, 꽤 두꺼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흡인력이 좋아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사건의 베일이 한 꺼풀씩 천천히 벗겨지는 편이지만 지루한 느낌보다는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잔잔하면서도 끊임없이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매력이 있었다.

저자의 책은 처음 접했는데 이미 국내에도 소개된 작품이 적지 않아서 곧 저자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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