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돌봄이 돌보는 세계 - 취약함을 가능성으로, 공존을 향한 새로운 질서
김창엽 외 지음, 다른몸들 기획 / 동아시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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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시작하기 전에는 인스타그램을 많이 했다. 자신의 병명 혹은 ‘#chronicillness’라는 해시태그를 단 계정들을 팔로우하면서 안되는 영어로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고통으로 닫혀버린, 내 방 침대에 가장 진하고 깊은 점이 그려진 삶에서 벗어나 낯선 것을 배우는 사람처럼 용기를 내어 소통을 시작했다. 아픈 사람들의 연대는 물리적 거리를 넘어서 확장되었다. 그들은 한국의 질환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묻고 격려해 주었고, 닫혀버린 내 마음을 열어 다시 세상과 소통하게 만들었다.
나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서사를 쓰고, 그 이야기를 계기로 연결되었으면 한다. 처음에는 단지 비명밖에 기록할 수 없다고 해도, 이야기함으로써 다시 조직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질환자들의 이야기들이 모이고, 우리 사회가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의료의 주체인 질환자, 돌봄 당사자, 의료 종사자 간에 더 건강한 관계가 정립될 수 있다고 믿는다.

-알라딘 eBook <돌봄이 돌보는 세계> (김창엽 외 지음, 다른몸들 기획)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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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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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입으로 대변이 나오는 광경은 과학적이라지만,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인 겁니다. 그들이 목도한 똥을 토하는 입이 그 과학과 논리의 아슬아슬한 접점에 있었다고나 할까요. 이토록 의학은 과학이지만 인문학적인 순간들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요.

-알라딘 eBook <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의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중에서

응급실은 병원 안에 있지만, 바깥세상의 한복판에 있기도 합니다.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응급실에서도 고스란히 그 일과 관련된 소동이 벌어집니다. 그래서인지 병원에서 근무하기도 하지만, 사회 한복판에서 일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답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슬픔에 젖곤 하지만, 사회라는 곳이 꼭 슬픔만 가득찬 곳이 아니듯 응급실에도 가끔씩 기쁘거나 미묘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날 저는 환자를 하나 잃고 다른 환자들을 정리한 다음 의국에 돌아오자마자 우루과이의 추가골 장면과 우리 대표팀의 패배를 똑똑히 지켜봤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것은 그날의 축구 경기보다 그 순간의 그 표정일 겁니다. 그것이 응급실이라는 미묘하고 특수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인간사가 주는 재미라고 해야겠지요.

-알라딘 eBook <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의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중에서

우리나라 법규상 사망의 판단은 의사 면허를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다. 소방대원들은 당연히 의사 면허가 없다. 그래서 소방대원들이 현장에서 사체를 발견하면, 법적으로 사망을 선고할 권리가 없다. 사망한 지 너무 오래 되어 사체 강직이 있고, 시반이 뚜렷하며, 부패가 시작된 상태여도 법적으로 소방대원은 사체를 살리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부패가 시작되고 구더기가 끓는 사체의 입을 벌려 기관 삽관을 하고 심폐소생술을 하는 일은 얼마나비효율적인데다가 충격적인가.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다. 의료 지도 의사가 대신 그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뻣뻣하게 굳은 사체를 발견하면 근무중인 나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현장의 상황과 사체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한다. 나는 그 설명을 가려듣고 객관적인 증거를 찾는다. 그리고 그 죽음이 명백하다고 판단되면 이렇게 말한다. "네, 심폐소생술은 유보하겠습니다. 사후 조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것이 내가 할 일의 ‘거의’ 전부다.

-알라딘 eBook <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의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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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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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처럼 그 말이 내 몸속에 들어온 순간, 머릿속에 들어차 있던 혈압, 맥박, 산소포화도 등이 싹 달아나버렸다. 이곳에서 이 말을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내가 주치의였다. 나는 의사라는 명찰을 달고 내 환자의 존엄과 고독은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자기혐오가 들어 구역감이 밀려왔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열어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했다. 그것은 내가 몇 년 만에 사용하는 중국어였다.
"당신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곧 편히 잠들 것이고, 눈을 뜨면 당신의 남은 세계가 펼쳐질 겁니다. 당신은 죽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당신을 살려낼 겁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더이상 중얼거리지도 않았다. 의외의 모국어를 들어서인지, 아니면 의식이 떨어져서인지 그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 그러고 고개를 바로 놓고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곧, 그를 실은 침대가 수술방으로 빨려들어갔다.

-알라딘 eBook <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의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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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 의학과 인문학의 경계 넘기
황임경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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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추법은 보편적인 규칙과 특수한 경험을 개별적인 사례와 연결시키는 과정을 포함한다. 즉, 사례 중심의 추론case based reasoning은 연역법, 귀납법과 구별되는 가추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연역법은일반적인 규칙을 예외 없이 적용하고, 귀납법은 일반적인 규칙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사례를 중심에 두고 있지 않다. 반면에 가추법은 일반적인 규칙을 바탕으로 사례가 제기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실천적 구조를 취한다는 점에서 사례 중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례라는 것은 특정한 조건과 맥락 속에 놓여 있고 일정한 시간적 순서를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조건과 맥락, 순서는 특정한 인과관계를갖는 이야기, 즉 서사를 통해서만 표현되고 이해될 수 있다. 가추법이의사의 진단 과정에 부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서사적 추론narrativereasoning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 때문이다. 의사는 환자의 이야기를듣는 것으로 진료를 시작한다. 흔히 병력 청취라고 불리는 과정을 통해 증상과 징후에 관한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현재력historyof present illness, HPI‘이라는 간단한 서사로 완성한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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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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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분의 통증을 치유할 수 없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통증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밖에요. 대신, 6개월을 다 살아내셨으니, 지옥을 바라보는 대신 당신의 일상이 하늘에서 떨어진 축복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환자 분이 겪는 그 통증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그들이 바랐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환자 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 같은 삶이겠지요. 그냥 스스로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살아보시면 어떨까요? 제가 해드릴 말은 이런 것들밖에 없습니다. 혹여 너무 외롭고 힘드시면, 입원을시켜드리지요."

-알라딘 eBook <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의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중에서

그는 급기야 정신을 놓고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구급대원이 심폐소생술을 할 때까지만 해도, 자기 연인이 저러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장면을 상상했을 것이다. 침대가 병원 문턱을 넘어갈 땐 이제 살았다고, 잠에서 깨어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강직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이 모든 것을 선고했다. 재판이라면 항소할 수도 있고, 돈이라면 다시 벌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압제자 앞에서는 항소할 수도, 하소연할 수도 없다. 죽음을 되돌릴 수도 그 결과를 바꿀 수도 없다. 모든 의사의 발언은 전부 최종심이다. 그는 조금씩 그런 상황을 납득해갔다.

-알라딘 eBook <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의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중에서

의사가 최선의 노력을 한다고 해서 외상으로 인한 실혈失血을 따라잡을 수 있는가? 이것은 나를 오랫동안 지독하게 괴롭힌 문제다. 그리고 이 질문은 처음부터 성립해서는 안 된다. 있다, 라고 답한다면 그간 죽음을 선고했던 수많은 외상 환자들에 대한 나의 실수를 인정하는 셈이다. 내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못해,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되돌리지 못한 것이므로. 그러니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무조건 없다, 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없다, 라는 답을 얻기 위해서 나는 일말의 불가항력적인상황도 피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예감한 실혈 환자에게 강박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해댄다. 그렇지 않으면 환자의 죽음을 선언하고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말을 할 때 의사로서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므로. 의사가 되어, 최선을 다하지 못한 이에게 사망선고를 하는 일은 정말 최악이다. 그것만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알라딘 eBook <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의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중에서

나는 매달 하루, 100여 개의 파일을 연속해서 듣는다. 인간이, 같은 인간의 최악의 순간을 여과 없이 듣는다. 음성일 뿐이지만, 전해오는 것은 그 공간이다. 사랑하는 이를 눈앞에서 막 잃어버린 절망이 감도는 공간.
나는 일일이 슬퍼하다가, 슬픔에 지쳐 분노하다가, 분노에 지쳐 허탈해하다가, 내겐 감정의 껍데기만 남는다. 머릿속에는 "우리 오빠가…… 지금…… 목을 매달고……"라든지, "어머니, 대답 좀 해보세요. 아악…… 어머니"라든지, "우…… 우리 아이가 엎어져 강물에 떠 있어요." 이런 말들이 떠돈다. 이 일을 마치면 한동안은 불면에 시달린다. 그 공간이 내 침실에 고스란히 옮겨진 것처럼 나는 매일 밤 몸서리친다.
인간이 무슨 권리로 다른 인간의 여과 없는 마지막 순간을 엿듣는가. 아니, 이것을 이 악물고 들어야 하는 일이 같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하지만, 나에게서 모든 게 빠져나가 빈껍데기만 남을지라도 해야 한다. 인간에게 고통이 있고 그것이 조금이라도 덜어지는 일이라면.

-알라딘 eBook <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의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중에서

"우리 어머니를, 죽여주세요."
"……"
"저희 오남매는 전부 동의했습니다. 서류 같은 건 몇 번이고 쓰겠습니다."
"안 됩니다. 저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입니다. 지금도 경기를 멈추기 위해 약을 투여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요."
"선생님이 살린다고요? 최선…… 그래요. 당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겠죠. 솔직히 어머니가 살아날 확률이 있습니까?"
"이 정도면 거의 없기는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살아나는 사람은 의사 생활을 통틀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살아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기적이란 것도 있을 수 있고요. 그래서 그렇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적어도, 돌아가실 때까지는 최선의 처치를 할 겁니다"

-알라딘 eBook <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의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중에서

밤이 깊어 응급실의 불행은 쏟아지고 있었다. 구토하는 사람, 손가락이 잘린 사람들이 내 앞을 에워싸고 나는 그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나는 병원에서만 먹고 자고 깨어 있었고, 다른 환자와 이야기하면서도 줄곧 할머니의 경기를 생각했다. 이제는 내 머릿속의 신호가 엇갈려 손발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의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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