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경험만으로는 세계를 사람에게 가져다 줄 수 없다. 왜냐하면 경험은 사람에게 오직 ‘그것‘과 ‘그것‘과 ‘그것‘으로 이루어진, 즉 ‘그‘와 ‘그‘, ‘그 여자‘와 ‘그 여자‘, 그리고 ‘그것‘으로이루어진 세계를 가져다 줄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엇‘을 경험한다. - P11
사람이라는 존재의 삶은 타동사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Etwas)‘을 대상(對象)으로 삼는 활동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무엇인가를 지각(知覺)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감각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표상(表象)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의욕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이 모든 것과 이러한 따위의 일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 P9
사람은 관계의 의미를 약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관계란상호적인 것(Gegenseitigkeit)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무에게도 우리와 비슷한 의식이 있는 것일까? 나는 그런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런데 여러분은 또다시 성공할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분석할 수 없는 것을 분석하려고 하는가? 나는 나무의 영(靈, Seele)이라든가 나무의 요정(妖精, Dryade)이 아닌 나무 자체를 만나는 것이다. - P16
관계는 내가 ‘너‘라고 부르는 그 사람이 자기의 경험 속에서그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도 성립될 수 있다. 왜냐하면 ‘너‘는 ‘그것‘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것‘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일을 하며, ‘그것‘이 알고 있는 것이상의 일에 부닥친다. 여기까지는 어떠한 속임수도 미치지 못한다. 여기에 ‘참된 삶‘의 요람이 있다. - P18
만든다는 것은 퍼낸다는 것, 발명한다는 것은 찾아낸다는 것, 조형(造形)한다는 것은 발견한다는 것이다. 나는 구현(具現)함으로써 드러낸다. 나는 저 형태를 말하자면 ‘그것‘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만들어진 작품은 여러 사물 가운데 하나고 여러 가지 특성의총화로 경험되며 기술될 수 있다. 그러나 받아들이면서 바라보는사람에게는 그 형태는 때때로 몸을 가지고" 다가오는 수가 있다. - P20
-그렇다면 우리는 ‘너‘에 관해서 무엇을 경험하는 것일까? -전혀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를경험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너‘에 관해서 무엇을 아는 것일까? -오직 전체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에관한 개별적인 것은 하나도 모르니까. - P20
‘너‘는 나와 만난다. 그러나 ‘너‘와의 직접적인 관계에 들어서는 것은 나다. 그러므로 관계란 택함을 받는 것인 동시에 택하는것이며, 피동인 동시에 능동이다." 그것은 마치 온 존재를 기울인 능동적 행위에 있어서는 모든 부분적인 행위가 정지되고, 그리하여 모든 한갓 부분적인 행위의 한계에 근거를 둔 행위감각(行爲感覺)이 정지되기 때문에 그 행위의 능동성이 수동과 비슷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근원어 ‘나-너‘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해질 수 있다. 온 존재에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나의 힘으로 되는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너로인하여 ‘나‘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 P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