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인 거리에 따라서 동일한 현상이 비극이나 희극으로 색깔을 달리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이미 알려진 이야기들을 새롭게 작품화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가 바로이 해석의 차원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 P5
작품에서 줄리엣은 아직 14살이 되지 않았지만 부모의 동의 없이 결혼이 가능한 나이이다. 카풀렛 부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이미 줄리엣의 나이에 결혼해서 딸을 낳았다. 줄리엣과 로미오의 사랑이 비극으로 나가는 근본 원인은 두 집안의 해묵은 갈등관계로 표현되는 과거, 전통의 힘과 자유로운 개인의 욕망, 의지 사이의 해소될 수 없는 대립 때문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은 인습을 부정하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이를 여전히 포섭하고 봉쇄하고 있는 전통의 힘 사이에서 개인의 의지가패배하는 데 있다. - P7
사랑은 자신을 벗어나는 행위이다. 자신을 벗어난다는 것은 정신이육체에서 일탈한다는 의미일수도 있고, 반대로 정신이 완전히 육체 속으로 몰입해서 육체화 한다는 의미이기도하다. 어떤 경우이든 격정적이고 광기에 찬 사랑은 일종의 탈존(ex-stasis)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자아망각의 결정체인 죽음과 쉽게 동일시되어 왔다. 몰아의 상태를 의미하는 죽음은 또한 같은 의미에서 사랑의 정점이나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랑과 죽음은 서로 대척점에 있으면서도 역설적으로 한 쌍을 이루고 있다. - P9
안티고네와 하에몬의 사랑은 죽음이라는 상징적인 성적 결합을 통하여 완성된다. 불어 표현에서 성행위의 정점을 "작은 죽음"이라 부르는것도 흥미롭다. - P11
셰익스피어는 안티고네』와 매우 비슷한 결말을 통해 사랑과 죽음의동질성을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Anthony and Cleopatra)에서 보여준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의 죽음을 통해서 옥타비우스(Octavius)의 노예로서의 삶이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자신 안에 깃든 "불멸의 염원들"을 실현하기 위해 안토니를 따라 죽는다. 그녀는 죽음의 순간에 "남편이여, 내가 갑니다"(Husband, I come. 5.2.281)라고 외치는데, 이는 성적인 쾌감의 절정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죽음을 육체적인 사랑의 완성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이 전성기를 지난 성인들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 C. 1591-96)은 사랑과 죽음의 문제를 젊은이들의 세계를 중심으로 다루고있다. - P13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이 같은 사랑의 복잡한 이중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가장 두드러진 언어기법은 모순어법(oxymoron)이다. 모순어법이란 서로 반대되는 요소들을 함께 끌어 모아 얼핏 보면 어리석게 보이지만 다시 보면 예상 밖의 균형감각을 자아내는 기지에 찬 수사기법이다. - P15
모순어법은 이 작품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통일된 수사법이다. - P17
남성들끼리의 물리적인 폭력은 여성들을 향할 때는 "처녀들의 머리, 즉 처녀성"(1.1.24)을 자르려는 성적인 폭력으로 화한다. 이 작품은 시작부터 삶과 죽음, 사랑과 폭력과 같은 서로 이질적인 주제들이 한데 혼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주제를 표현하는 장치가 바로 모순어법이다. 따라서이곳의 모순어법은 단지 언어적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을구조적으로 이끌어가는 극적 장치이다. - P17
라이언이 주장하듯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유토피아적인 사랑은 탐욕적이고 계산적인 위계질서에 입각한 지배적인 사고에 오염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줄리엣의 사랑은 그녀를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대안이지만, 그 대상이 원수 집안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그녀는 여전히현실에 갇혀있다. 이것이 그녀의 사랑이 초월을 꿈꾸지만 처음부터 죽음과 맞물려 있는 이유이다. - P21
반복어법, 접속사 생략 등의 수사적 기법을 동원하고 있는 카풀렛의한탄은 자연의 주기, 시간의 힘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변화하는 이 작품의 주제를 잘 보여준다. 바뀐다는 것(turn)은 다시 말해서 수사비유(trope)에 대한 어원적인 의미이며, 의미의 뒤틀림(turn)이란 곧 비유(metaphor)의본질이다. 코러스가 얘기하듯이 이 작품에서 증오에서 사랑이 나왔고, 따라서 사랑이 폭력과 죽음의 씨앗을 처음부터 잉태하고 있다면, 그 반대로 죽음은 다시 사랑을 잉태하고 사랑을 완성하는 변화를 가져온다. - P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