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어쨌든 정립은 일정한 변양을 겪는다. 정립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그대로 남아 있는 동안, 우리는 예컨대 그 정립을 ‘작용중지‘ 하고(‘auber Aktion‘setzen), ‘배제하고‘ ‘괄호친다‘. 정립은, 괄호 속에인 것처럼, 접속의 연관 밖에 배제된 것처럼, 여전히 계속 거기에 존재한다. 즉 정립은 체험이지만, 우리는 정립에 관한 ‘어떤 것도 사용하지‘ 않는데, 이것은 물론 결여 (우리가 ‘그는 어떤 정립을 사용하지 않았다‘라고 무의식으로 말할 때처럼)로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경우, 모든 평행하는 표현의 경우처럼, 근원적인 단순한 정립(현실적이고심지어 술어적인 존재정립이든 아니든간에)으로 접근해 그 정립을 바로 독특하게 재평가하는 일정한 독특한 의식방식을 예시하면서 지시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이러한 재평가는 우리의 완전한 자유의 소관사항이며, 본래의 단어의미에서 일반적인 모든 태도를 취함과 같이, 정립과 어울릴 수 있고 ‘동시‘(Zugleich)의 통일성 속에 정립과양립할 수 없는 모든 사유의 태도를 취함에 대립해 있다. - P126
나 실제적 인간인 나는 자연적 세계 속의 다른 객체처럼 하나의 실재적 객체다. 나는 사유작용 (cogitationes), 즉 더 넓거나 좁은의미에서 ‘의식의 작용‘을 하며, 이 작용은 이 인간적 주체에 속하는것으로서 동일한 자연적 실제성의 사건이다. 그리고 그밖의 내 모든체험도 마찬가지이며, 이 체험의 변화하는 흐름으로부터 특수한 자아작용은 매우 독특하게 빛나고, 서로 뒤섞이며, 종합으로 연결되고, 끊임없이 변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의식이라는 표현(물론 이 경우 별로 적합한 표현이 아니다)은 모든 체험을 함께 포함한다. - P132
‘깨어 있는‘ 자아를 우리는 그 체험의 흐름 안에서 사유주체의 특수한 형식으로 의식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으로서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그 깨어 있는 자아가 이러한 체험을 끊임없이 또는일반적으로 술어적 표현으로 이끌고 또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않는다. 실로 동물적 자아주체도 존재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던 것에 따라, 깨어 있는 자아의 체험의 흐름에 본질에는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사유작용의 연계가 끊임없이 비현실성의 매개에 의해 에워싸여 있고, 이 비현실성은 언제나 현실성의 양상으로 이행할 준비가되어 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현실성은 언제나 비현실성으로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 P139
체험 자체의 본질은 이 체험이 존재한다는 것뿐아니라, 그 체험이 무엇에 관한 의식이고 규정되거나 규정되지 않은일정한 의미에서 무엇에 관한 의식이라는 것도 포함한다. 그래서 체험은 비현실적 의식의 본질 속에도 포함되어 있고, 위에서 말한 변양우리가 ‘주목하는 시선을 이전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으로의전환‘이라 부른 것을 통해 체험이 어떤 종류의 현실적 사유작용으로 이행될 수 있다. - P140
사물과의 모든 본질적 통일체에서 벗어나 있어 사물의 현존(Existenz)도 물론 전제된다. 체험 자체의 고유한 본질을 통해 규정된 순수한 통일체는 오직 체험의 흐름에 통일체다. 또는 어떤 체험은 단지 (다른) 체험과 더불어서만 하나의 전체에 결합될 수 있고, 그 총체적 본질은 이러한 체험의 고유한 본질을 포괄하며, 이 체험 속에 기초지어진다. 이 명제는 나중에가서 더 명석하게 밝혀지고 그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 P146
현상학적 태도에서 우리는 원리적 일반성으로 그러한 사유에 따른 모든 정립의 수행을 금지한다. 즉 수행된 정립을 새로운 탐구를 위해 ‘호치고‘ ‘이 정립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 정립 속에 살아가고 이 정립을수행하는 대신, 이 정립을 향한 반성작용을 하며, 이 정립 자체를 그것이 있는 그대로 절대적 존재로 파악한다. 우리는 지금 철저하게 2차적 단계의 그러한 작용 속에 살고 있다. 이 작용이 주어진 것은 절대적 체험의 절대적 장(場)현상학의 근본 장이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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