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의미가 영원성 가운데서 발견되어야 한다면, 시간은 당연히 바로 이 영원성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할것이다. 이로써 이 연구의 출발점과 길이 미리 결정된다:영원성에서 시간으로. - P5
철학자는 신앙하지 않는다. 철학자가 시간에 대하여묻는다면, 그는 시간을 시간으로부터 이해하려고 결단한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언뜻 영원한 것(aei)처럼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간적인 것에서 추상화한결과로서의 영원성(aei)에서부터 시간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 P7
지금 말하고 있는 학문 이전의 영역이란 우리의 이고찰은 이러한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게 되는데철학과과학이 개념적으로 서로 왕래한다고 하는 다소 완고한전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영역이다. 철학과 과학의 가능성은 각각의 연구자들이 그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하여 설명하는 데 있다. - P9
변화는 시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체험(Begegnisart) 방식에서 시간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곳(worin)로서 존재하는가? - P11
시계는 물리적인 체계이다. 이 체계위에서는 동일한 시간적인 상황의 연쇄가 지속적으로반복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려면 외부의 영향을 통해서 변화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반복은순환적(zyklisch)이다. 각 시기는 동일한 시간의 지속을간직하고 있다. 시계는 바로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동일한 지속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이 반복되는 지속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이러한 시간의 길이를 나누는것은 임의적인 것이다. 시계는 시간을 간직하지 않는다. - P12
시간이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한 물음은 현존재에 대한우리들의 고찰을 지시해 준다. 여기서 현존재라는 말은우리가 인간적인 삶으로서 알고 있는 존재 가운데 있는존재자를 의미한다. - P16
타자와 더불어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독특한존재 규정이다. 타자와 더불어 공유하는 세계 가운데서존재하는 현존재의 근본 방식은 말함(Sprechen)이다. 말함은 그 충실한 의미에서 보자면 타자와 더불어 어떤것에 대하여 밖으로 발설하여 말하는 것을 뜻한다. - P19
현존재는 평균적인 어떤 존재자가 아니고 모두와 더불어 존재하는 존재자이다. - P20
시간은 결코 길지 않다. 왜냐하면 시간은 근원적으로 길이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미리 달려가 봄이 앞서감의 언제와 얼마 만큼에 대한물음으로 이해되면 그 자체로 와해된다. - P32
무엇이 이러한 물음으로 시간을 잃어버리게 하는가? 시간은 어디로 가는가? 시간을 계산하는 현존재는 바로 손에 있는 시계와 더불어 살아간다. 이렇게 시간을 계산하면서 사는 현존재는 지속적으로말한다. 나는 시간이 없다. 이것은 시간을 형성하는 것자체를 배반하지 않는가? 시간을 잃어버린 곳에서 비로소 거기에서 시계가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현존재의 섬뜩함이 드러나지 않는가? - P34
현존재는 자신의 본래적인현재 속에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나고 싶어 한다. 일상성 속에서 세계 사건은 시간으로, 현재로 마주하게된다. 우리는 시계와 더불어 일상성을 살아간다. 이것은배려가 끊임없이 지금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이것은지금, 지금에서 다음으로, 그리고 다음의 지금에로를 말한다. - P36
. 본래적인 역사로서의 과거는 어떻게 속에서 반복될 수 있다. 역사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은 현존재가현재를 그때마다의 현재를 이해하면서 미래적임을 이해하는 가능성 가운데 근거해 있다. 이것이 모든 해석학의제1명제이다. 이 명제는 역사성 그 자체인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어떤 것을 말하고 있다. 철학은 역사의 무엇인가에 대해 결코 다가갈 수 없다. 철학이 역사를 방법론의대상으로 분류하는 한 말이다. 역사의 수수께끼는 역사적으로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대답에 달려 있다. - P43
우리는 시간을시간적으로 말해야 한다. 우리는 시간이 무엇인가, 라는물음을 시간적으로 반복하려고 한다. 시간은 어떻게 이다. 우리가 시간이 무엇인가라고 되물을 때, 우리는 성급하게 이것과 이것이 시간이라고 대답해서는 안 된다. 즉, 언제나 어떤 무엇을 말하는 방식으로 대답해서는 안 된다. - P46
시간이란 무엇인가에서 시간이란 누구인가로 말이다. 보다친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우리 자신이 시간인가? 혹은보다 더 친숙하게는 나는 나의 시간인가? 이러한 질문을통해 나는 가장 친숙한 것에 이른다. 그리고 내가 이 물음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그 물음과 더불어 모든것이 진지하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이러한 물음은 그때마다의 나의 것으로서의 시간에 이르는 가장 적합한 길이고, 또 시간을 가장 적절하게 다루는 길이다. 이렇게될 때 현존재가 비로소 다시 물음(Fraglichsein)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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