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탈이해관심의 동시적인 수립인 것이다. 자기를 위해는 자법이다. 자기의식을 의미화한다. 모두를 위해는 타자들에 대한 책임을, 우주의 떠받침을 의미화한다. 앞선 개입 없이 응답하는 이와 같은 방식, 즉타인에 대한 책임은, 인간의 형제애 그 자체이고, 자유에 선행하는 것이다. 근접성 속의 타자의 얼굴이것은 재현 이상의 것인데ㅡ은 재현할 수 없는 흔적, 무한의 방식이다. 그것은 존재들 가운데 자아가 목적을 좇는 한 존재로서, 즉 존재가 의미작용을 장악하여 우주가 된다는 목적을 좇는 한 존재로서 실존하기 때문이 아니다. - P253
타자와의 관계가 소통과 초월일 수 있는 것은, 또 그것이 확실함을 추구하는 또 다른 방식이나 자기와의 일치coincidence가 아닐 수있는것은, 자기로 이해된 주체성에서 출발해서다. - P259
소통이 자유로운 주체인 자아에서 시작하는 것이라면 소통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 자아에게, 모든 타자는 제한일 뿐이다. 전쟁, 지배, 주의, 첩보 등으로 이끄는 제한일 뿐이다. 소통한다는 것, 그것은 분명 자신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열림이 인식을 노리Jo 1261는 것이라면, 그것은 온전치 못하다. 열림이 온전한 경우는 그것이 "스펙터클"에, 또는 타자에 대한 인식에 열릴 때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책임으로 이뤄질 때다. - P260
현상학은 다가감을 기술하는 가운데 주제화를 무-시원으로뒤집는 길을 따를 수 있다. 윤리적 언어는 현상학이 느닷없이 내던져져 있는 역설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윤리는 정치적인것을 넘어서서 이 뒤집음의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 P264
우리는 이것을 원죄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그것은 창조의 본래적 선함이다. 박해받는 자는 언어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박해는 변명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해란 주체가 로고스의 매개 없이 공격당하거나타격을 입는 바로 그 계기를 뜻한다.2) - P265
열림에 대한 강조가 대신함에까지이르는 타자를 위한 책임이라는 것, 탈은폐의 타자를 위함, 타자에게 드러남이라는 타자를 위함이 책임의 타자를 위함으로 변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다. 소통의 열림은 진리를 자기 속에서 유지하는 대신 바깥에 위치시키기 위해 단순히 자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놀라운 것, 그것은 진리를 바깥에 놓는다는 발상또는 광기다. 소통은 단순히 덧붙여지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자아란, 즉 동일한 것의 견고함안에서의 대신함이란, 타인에게 연대 자체를 증언하는 데서 출발하는 연대이지 않은가?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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