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인물 가상 인터뷰집 - 소설가의 상상력으로 실감나게 풀어낸 역사속 소문의 진상
홍지화 지음 / nobook(노북)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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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상상력으로 실감나게 풀어낸 역사속 소문의 진상

 

노북에서 출판한 홍지화 작가님의 <한국의 역사인물 가상 인터뷰집>은 역사 속 인물을 현재로 소환해 작가와 인터뷰를 나누는 소설이다. 소설가의 기발한 상상력으로 21명의 자료 조사와 함께 역사 속 인물을 실감나게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Part 1. 나라와 백성을 위한 촛불이 되다

백전무패, 불멸의 이름이 된 이순신

조선 문명의 꽃을 피운, 발명왕 장영실

삼국 통일의 주역, 김유신과 김춘추

화약의 아버지, 최무선

「동의보감」의 저자 구암 허준

조선 최고의 학자, 다산 정약용

농업강국의 씨를 뿌린, 고무신박사 우장춘

20세기 현대 이론물리학의 금자탑을 세운 이휘소 박사

한국 최초의 여성경제학사, 최영숙

‘한국의 파브르’, 나비박사 석주명

 

파트1에서 가장 인상적인 분은 우장춘 박사다. 1950년 한국에 귀국한 우 박사는 ‘서로 다른 두 종은 교배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종을 탄생시키기도 한다.“는 ’종의 합성‘의 원리로 우리 농업을 과학적이고 자주독립의 단계로 도약시켰다. 한국전쟁 후 한국은 육정학은커녕 하루 세끼를 못 먹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단, 그는 오로지 육종학의 불모지인 한국에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해준 위인이나 다름없다.

 

우 박사는 한국에 9년 5개월이란 짧은 기간 동안 머물렀지만, 그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유인즉, 개화파 무신이었던 아버지 우범선은 급진개화파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당시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서 군인 동원의 총책임자였으며 황후의 소각된 시신 처리에도 가담했다고 알려진다.

 

우범선은 일본으로 도망쳐 일본 여인과 결혼해 자녀를 낳았고, 그가 우장춘이다. 우범선은 옛 동료인 고영근의 칼에 죽임을 당했다.

 

이 사실을 알고 우장춘은 충격받았고, 자신의 아버지가 고국에 진 빚을 갚으려 다짐했다.

 

아버지가 비명횡사하고 나서 가정형편이 어려워진 까닭에 일본인 어머니는 나를 잠시 고아원에 맡겼는데 이지메(왕따)를 혹독하게 당했습니다. 원생들 사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선생들조차 잘못한 게 없는데도 나를 때리고 나무랐습니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요. 하지만 나는 내 운명에 굴복할 수 없었습니다. (104쪽)

 

한국에 지내는 동안 일본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일본으로 상례에 참가하고자 정부에 여권을 발급하고자 하나 이승만 정부는 우 박사가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해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는 우리 토질에 맞고 잘 자랄 수 있는 우량종자를 개발했다. 그 결과 단기간에 배추, 무,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등 20여 품종에서 우수 종자를 얻었다. 지금 우리 식탁에 오르는 거의 모든 채소는 우 박사가 개발한 것이다.

 

 

 

이휘소 박사에 관한 유명한 소설은 그를 핵물리학자로 둔갑시켜버렸다. 그는 핵물리학자가 아니라 이론물리학자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핵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군사정권을 도와주다 미국 정보당국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인 양 굳어져 유가족은 작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이휘소 박사는 학자로서 20년도 안 되는 짧은 연구 기간 동안 게이지이론의 재구격화, 참 쿼크입자 제시, 힉스입자 예견 등등 그 어떤 물리학자보다 경이로운 연구 성과를 냈다.

 

그가 중점적으로 연구한 분야에서 노벨물리학상이 두 번이나 나왔고,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원장인 오펜하이머 박사는 자신의 밑에 아인슈타인과 이휘소가 있었지만, 이휘소가 더 뛰어난 학자였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여성 경제학자인 최영숙의 이야기는 못내 안타까웠다. 최영숙은 동양인 최초로 스톡홀름대학을 졸업하고 조국에 돌아왔지만 그녀가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1930년대 5개국어 능통자에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 출신이었지만 그녀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던 그녀는 미나리, 콩나물을 파는 구멍가게 야채 장수였고, 사람들의 입방에 오르내리다 결국 생활고로 요절했다.

 

 

 

Part 2.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영원한2인자

왕이었으나, 왕이 되지 못한 광해군

아비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

삼봉 정도전이 꿈꾸었던 성리학적 이상세계

 

 

조선왕조 5백년 역사상 왕위에 올랐으니 반대 세례에 의해 추출 당한 왕은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연산군이야 폭정으로 악명 높았으나, 광해군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논쟁이 격렬하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당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다. 사실 아버지인 선조 임금이 무능했기에 그를 대신해 임진왜란을 수습하고자 세자로 책봉된 후 7년 동안 이어진 왜란 이후의 민심 수습과 실리외교를 추구했지만, 이이첨 같은 간신배들 때문에 실정을 막지 못했다.

 

왕위를 지키기 위해 동복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어린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것도 이이첨 등 대북파 간신들의 농락에 넘어가 패륜 짓을 저질렀다.

 

광해군 재위 시절 역모 사건이 50여 차례나 일어나 무수한 신하들이 목숨을 잃었다.

 

광해군은 왕권을 강화하고자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켰지만, 오히려 백성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사도세자만큼 많이 이야기되는 왕자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와의 불화로 인해, 혹은 붕당정치의 희생양으로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은 비운의 세자로 잘 알려져 있다.

 

임오화변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많이 다루는 주제로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의 악행을 참다못해 뒤주에 가둬 죽이는 사건이다.

 

영조는 장자인 효장세자를 보내고, 영빈 이씨와 옹주만 다섯을 낳은 끝에 왕자인 사도세자를 생산했다. 사도세자 역시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나타내 영조의 기대는 더 컸다.

 

영조의 편애는 심각했다. 자신이 애지중지 여기는 자녀의 집에는 덜 사랑하는 자녀가 머물지 못 하게 하고, 불길한 일을 당했을 때는 애틋하지 않은 자녀를 불러서 불길함을 떠넘기는 ’귀 씻기‘ 대상으로 삼았다.

 

영조는 효심과 충심을 시험하는 ’선위 쇼‘를 벌였고, 대리청정을 계기로 더욱 멀어졌다.

 

사도세자는 점점 포악하게 변했고, 신경을 건드리면 환관이고 후궁이고 할 것 없이 목을 베고, 동궁 안에서도 히스테릭하고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사도세자는 의대병이라는 신경증을 앓았고, 자식을 낳았던 사랑하는 후궁 빙애를 죽였다.

 

이 일은 1년 6개월 후, ’나경언의 고변’을 통해 사도세자의 비행이 모두 알려졌다. 임오화변이 있기 전날 밤, 사도세자가 부친과 아들 세손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를 낳은 어머니 영빈 이씨와 혜경궁 홍씨는 친정 가문과 세손을 지키기 위해 그를 버렸다.

 

 

<한국의 역사인물 가상 인터뷰집>에는 역사 속 뛰어난 인물을 현재로 불러와 당시 상황을 들어보는 시간이었다. 역사에 관심을 가진 분은 이 책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한국의역사인물가상인터뷰 #홍지화 #노북 #소설 #역사소설 #책과콩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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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찬란한 어둠 - 뮤지컬 음악감독 김문정 첫 번째 에세이
김문정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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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음악감독 김문정 첫 번째 에세이

 

흐름출판의 김문정 감독의 <이토록 찬란한 어둠>은 제목에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뮤지컬 피트(무대 앞 연주공간인 어둡고 긴 구덩이)에서 음악이 시작되면 뮤지컬은 시작된다.

 

일전에 티비 프로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무대를 지휘하기 전 음악감독으로서 하나의 실수도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요소를 확인하는 모습을 보고 무대 앞 피트에서 벌어지는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관객은 화려한 무대를 바라보고 피트에서 서서 어둠 속에서 찬란한 무대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그녀의 인생 여정을 에세이는 담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지인 집에서 처음 마주한 피아노를 보고 그녀는 소리가 나는 장난감으로 매료되었다. 오랜 시간 피아노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고 모임을 초대한 집의 어머니가 피아노를 그만 치게 하자 김 감독의 어머니는 피아노에 빠진 딸의 모습과 어쩔 수 없이 가지고 놀지 못한 피아노를 적금을 해지하고 바로 사들인다. 이렇게 피아노는 그녀의 인생에 젖어 들었다.

 

                 Photo by Kyle Head on Unsplash

 

대학 입시를 앞두고 갑자기 음악을 공부하자는 친구 희열의 말에 용기를 얻지 못하고 서울예전에서 실용음악을 공부하며 음악의 길로 인생의 행로가 이어진다.

 

그녀의 첫 번째 뮤지컬 작품은 <명성황후>의 피아니스트였다. 음악감독의 피아노 소리에 관한 지적으로 김 감독의 오케스트라와 뮤지컬의 피아노 연주 타이밍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고, 음악감독이 되고 싶은 열망에 빠진다.

 

음악감독은 뮤지컬의 총괄 지휘자다.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 연주자의 악기와 연주, 구성 하나하나에 음악감독은 잘못된 점을 알아야 한다. 그 말은 자신이 모든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 정통해야 한다는 뜻이고, 그녀는 가능한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노력한다.

 

이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뮤지컬 음악감독인 김문정 감독이 지난 30년을 돌아봤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점은 역시 사람이다.

 

혼자 음악을 감상할 때보다 여러 사람과 함께 할 때 더 즐겁다는 걸 알았다. 첫 음악감독 작품인 <둘리>를 공연할 때 아이들의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흥분하고 보육원 출신 아이들의 둘리가 엄마를 찾는 장면을 보고 즐거워하지 못한 관객을 보자 자신이 헤아리지 못하면 관객이 상처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공연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많은 돌발변수를 경험한 ‘둘리’는 그녀에게 다음 작품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준다.

 

             Photo by Larisa Birta on Unsplash

 

<둘리> 공연을 마치고, <명성황후>의 런던 공연을 위한 슈퍼바이저 제안을 받고 본격적인 음악감독으로 역량을 만들어간다.

 

이후 원작과 같은 공연을 해야 하는 레플리카 공연, 논 레플리카 공연, 창작 뮤지컬 공연 등 50여 작품을 감독한다. 레플리카 작품은 배우를 제외한 무대, 동선, 조명, 음악 등 나머지 전체를 원작과 완전히 동일하게 만들어야 하기에 연출진으로서는 매력이 조금 덜 한다.

 

창작 뮤지컬인 <내 마음의 풍금>과 김승현 씨가 전해준 이영훈 작곡가의 바람이 담긴 <광화문 연가>는 가슴이 찡한 사연이 있다. 이영훈, 이문세 콤비의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라 그런지 <광화문 연가>에서 이영훈 작곡가의 인생이 겹쳐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작품마다 사연과 배우, 연주자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든다. <명성황후>로 시작한 뮤지컬은 <영웅>을 만들게 된다. <영웅>은 안중근 기념사업회 관계자가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게 조선이 국모를 시해한 죄이기에 <명성황후>에 관한 뮤지컬을 만들었으니, 안중근 이야기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계속 찾아왔고, 이런 사정이 뮤지컬 <영웅>이 탄생환 비화이다.

 

김 감독은 2005년 <맨 오브 라만차> 초연 때 만들어진 The M.C 오케스트라를 시작으로 지금 THE PIT 오케스트라와 함께하고 있다. 찬란한 무대의 바로 옆 어두운 공간에서 연주자들은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뮤지컬에 관한 정보를 시작으로 김문정 감독의 작품에 관한 이야기와 배우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마술과도 같은 뮤지컬 무대를 빠져들고 싶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이토록찬란한어둠 #김문정 #흐름출판 #뮤지컬 #에세이 #명성왕후 #맘마미아 #책과콩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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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상가 이건희
허문명 지음 / 동아일보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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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대, 위대한 경영자에게 길을 묻다.

 

동아일보사에서 출판한 허문영 기자님의 <경제사상가 이건희>는 이건희 회장의 평전이다. 허문영 기자는 1990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현재 출판국 부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25일 이건희 회장의 부고가 전해진 날, 한 기업인이 이건희 회장을 추모하는 광고를 보고 이건희 회장의 삶에 관해 쓰고 싶다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지금까지 3권의 평전을 썼다. 30대 시절 정신적으로 힘들 때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 앞장선 숭산 큰스님의 평전 <삶의 나침반>, 40대 때 <김지하와 그의 시대>를 통해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산업화와 민주화 세대의 화해를 시도했다.

 

50대에 ‘삶이란 밥’이라는 자각하에 밥벌이의 소중함과 기업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이건희 회장이 걸어온 길이 ‘밥벌이’를 고민하고 만들어오는 과정임을 절실히 느꼈다.

 

                      Photo by Babak on Unsplash

‘기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미국의 철학자 니컬러스 버틀러는 말했다. 한국의 국력을 나타내는 것은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기업이고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모르지만, 대기업의 이름은 아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기업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기업에 근무하는 사람,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 그리고 기업활동의 결과가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원동력임을 깨닫고 경제사상가로 이건희 회장의 삶에 대해 알아보자.

 

 

 

저자는 단언한다. “한국의 산업사는 ‘비포(BEFORE) 이건희’와 ‘애프터(AFTER) 이건희’로 나뉜다”라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브랜드. 삼성. 세계 대도시 곳곳에 삼성의 간판을 마주하고 삼성 휴대폰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한국 제품이 사랑받는 모습에 뿌듯함을 느낀다. 삼성은 한국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기업임이 틀림없다. 오늘날 500조 원에 근접하는 삼성전자도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1987년에는 2조 4천억 원에 해당하는 기업이었다. 2020년 기준으로는 매출 246조 원에 수많은 세계 1등 품목을 만들었다.

 

그는 취임 후 5년 동안 공식 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은둔의 경영자’로 알려졌다.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와 혁신을 요구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심취했고, 통찰과 깊이는 컸다.

물리학, 수학, 사회학, 아동심리학에 관심을 가졌고, 개성화, 소프트웨어, 디자인의 시대가 될 것이며 로봇이 지배할 거라는 말을 듣고 “미래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라고 했다.

 

그는 오랜 시간 사색하고 한 가지 주제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태어나 얼마 후 할머니 댁에서 자랐고, 이후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녔다. 일전에 이병철 선대 회장님의 수필에서 기록된 기억을 돌이키면 일본 학교에 다니는 이건희 회장에 대한 걱정을 남겼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소학교 시절,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보다 혼자서 관찰하고 생각에 빠지는 것을 좋아했고, 이후 부산교대부속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도 비슷한 성향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주변의 친구를 관찰하고 자신에서 해를 가하지 않을지 친하게 지내도 되는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고교 시설 서울로 상경한 그는 연대 상경학부에 합격하지만, 그는 자퇴한 후, 와세다대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는 일본을 알고 따라 할 수 있는 길만이 다시는 식민상태가 되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그가 평소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즐겨 시청하고, 특히 탐사보도를 즐겨보는 것을 자신이 관심 분야에 몰입하는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전자제품과 자동차를 무엇보다 좋아했다. 그래서 즐겨보던 책은 이공계 관련 도서, 우주과학, 공학책이 주를 이루었는데 와세다 재학 시절 중고자동차를 분해해서 새로 조립한 후 판매해서 용돈을 벌어들인 일화는 유명하다.

 

                Photo by Zana Latif on Unsplash

 

결정적으로 삼성가에서 벌어진 왕자의 난을 통해 위로 형이 두 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장직을 오르게 되는 이 회장은 일본 기술자들이 한국에 올 때는 승지원에 초청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공학 및 전자 기술을 배우게 된다.

 

1987년 삼성전자 회장에 취임하고 각종 혁신조치를 취하지만 사원들은 좀처럼 타성에 젖은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출퇴근 시간을 7·4제로 운영해 4시 이후에는 퇴근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하도록 강조했다. 유연한 사고가 삼성을 2류 기업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알았다.

 

그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비로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것도 전자 산업에 대한 미래의 청사진을 구상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1993년 삼성전자 디자인부에 속한 후쿠다의 ‘후쿠다 보고서’를 기점으로 그는 삼성의 신경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마누라만 빼고 다 바꿔라”라는 말로 유명해진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서 열렸던 ‘삼성 사장단 회의’의 발언이었다.

 

고문을 활용하라는 주문에도 주저하는 사원들에게 고문 활용을 인사고과 점수에 부여에 강압적으로 일본의 고문에게 기술을 교류하고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신경영선언 이후 품질관리는 삼성이 일류로 도약하는 최우선 과제였다. 1995년 당시 휴대폰 불량률이 10% 이상이어서, 이 회장은 애니콜과 불량률이 기준에 못 미치는 제품 500억 원어치를 화형에 처해버리는 충격요법을 시행한다.

 

이를 기점으로 삼성은 휴대폰에서 갤럭시 신화를 만들고, 반도체 사업에서도 승승장구한다.

 

 

 

저자는 이건희 회장 지인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일본에서 역도산을 만난 것과 홍사덕 의원은 한강의 완공된 양화대교를 보고 감탄하고 있을 때, 이 회장은 통일이 되면 한강으로 화물선이 다녀야 하는데 교각이 너무 좁다고 지적하는 모습을 보고 그의 깊은 사고에 놀랐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의 작고 후 그가 그동안 모았던 미술과 문화 예술품이 화제가 되었다. ‘메이드 인 코리아’를 세계 일류 반열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이 회장의 문화에 대한 기여는 삼성의 성장과 함께했다.

 

삼성은 ‘이건희 컬렉션’의 기부로 “이건희 회장의 미술품을 국민과 함께 즐기기 위해 국가에 기증한 뜻을 계승하고자 상설전을 열어 무료로 운영하기로 했다”라고 설명한다.

 

이건희 회장이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여러 사례에서 드러난다. 창원 다호리 고분군 유적지 발굴과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최순우 선생의 생가를 지키는 일에도 이 회장의 지원이 마중물이 되었다.


 

그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잘 알았고, 삼성이 추구하는 명품 정신을 선조들의 정신에서 찾으려 했다. 이건희 컬렉션을 대중에게 공개해 국보를 포함한 수준 높은 우리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희 회장의 평전을 읽는 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기업가 정신을 알게 되었다.

 

“어느 국가, 사회, 기업을 막론하고 진정한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며 그 힘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398쪽)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경제사상가이건희 #허문영 #동아일보사 #삼성전자 #컬처블룸서평단 #컬처블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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퀀텀의 세계 - 세상을 뒤바꿀 기술, 양자컴퓨터의 모든 것
이순칠 지음 / 해나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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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뒤바꿀 기술, 양자컴퓨터의 모든 것!

 

해나무에서 출판한 양자컴퓨터 연구의 권위자 이순칠 교수님의 <퀀텀의 세계>는 양자컴퓨터에 관해 수식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저술한 책이다. 많은 이들이 양자컴퓨터에 관해 궁금하지만 쉽게 개념과 작동원리, 하드웨어, 프로그램 등 궁금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정작 양자물리학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양자물리학부터 이해하기가 만만치는 않다.

 

저자인 이순칠 교수님은 카이스트 물리학과 교수이다. 양자컴퓨터 과학의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물리학자. 국내 최초로 병렬처리 양자컴퓨터를 개발해 주목을 받았다. 1989년에 미국의학과학학회가 수여하는 실비아 소킨 그린필드상을 수상했다. 2015년부터 한국물리학회 응집물질물리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 퀀텀의 세계 책날개 중 ]

 

‘양자’를 뜻하는 퀀텀을 자주 접하는 경우는 경제학,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퀀텀 점프’이다. ‘퀀텀점프’는 양자물리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양자세계에서 양자가 어떤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계단의 차이만큼 뛰어오르는 현상을 의미한다. 양자역학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고전역학의 사고 체계를 바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체계이다.

 

저자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소설의 형식을 빌려 양자컴퓨터에 관한 보고를 받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시인인 아내가 원고를 함께 검토했다고 한다. 상황극 속 대통령이 해킹과 핵무기 유도를 위해 양자컴퓨터 기술이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만 다른 분야의 과학 기술에도 양자정보기술의 활용도가 광범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순칠 교수는 대한민국 양자정보 1세대 연구자로서, 국내 최초로 병렬처리 양자컴퓨터를 개발하여 “대한민국 양자컴퓨터 연구를 개척한 물리학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쉽게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잘 알고 대중이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 책은 어려운 양자역학과 양자컴퓨터에 관해 가장 쉽고 이해하기 좋게 저술된 책 중 한 권이다.

 

양자역학이 고전역학은 다르지만 우리 일상을 설명하는데 필수적이다. 저명한 과학자들 역시 양자역학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을 곧잘 했다는 것은 우리 사고 체계에 익숙하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양자역학의 출발을 알린 것은 하이젠베르크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를 직접 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전자가 상식대로 행동할 거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오로지 직접 알 수 있는 물리량들만 가지고 이론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의 원자 이론에서 불연속적인 상태가 존재한다는 개념을 확장해 전자도 점프를 할 때 빛을 흡수하거나 방출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원자는 행렬이다’라고 선언했다.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은 서로 대립되는 면이 있었으나 슈뢰딩거와 에커르트에 의해 두 이론이 매우 다르지만 서로 동등한 것임이 증명되었다.

 

양자역학에 대한 두 공식인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이 정립되자 양자이론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원자, 분자, 고체에 적용되었고 헬리움, 별의 구조, 초전도체의 본질, 자석의 성질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였다.

 

양자역학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중첩성의 원리이고, 양자역학이 확률에 기반하는 학문이다. 슈뢰딩거를 고양이를 이용한 사고 실험으로 양자 역학의 중첩성에 관한 개념을 널리 알렸다.

 

 

 

양자컴퓨터를 위한 다음 단계는 얽힘의 활용이다. 양자전산이 고전전산보다 빠른 이유는 중첩에 의한 현상 가운데서도 얽힘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양자물리의 확률적 해석에 끝내 동의할 수 없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 보리스 포돌스키, 네이선 로즌은 공동으로 ‘EPR 패러독스’라는 논문을 출간했다.

 

이는 양자물리는 불완전하다는 결론은 내린 논문이다. 역설적으로 EPR 논문은 양자물리의 철학적 문제점을 지적한 논문으로 몇 십년 후에 양자물리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양자컴퓨터의 작동원리와 그 용도를 설명한다.

 

 

애초에 컴퓨터의 출현이 포탄의 예상 포격지점을 계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946년의 애니악의 무게가 30t이었다는 점은 놀랍다. 컴퓨터 기술은 발전했고, 10진법을 숫자를 사용해 숫자를 표현하는 사람과 달리 컴퓨터는 0과 1로 된 이진법을 사용한다.

 

컴퓨터의 발전은 처리 속도의 발전과 궤를 함께한다. 컴퓨터가 계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계산이 꼬이거나 바이러스가 발생하는 문제로 속도가 지연되었다. CPU의 개선과 CPU 숫자를 늘리는 방법은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CPU를 한없이 늘린 슈퍼컴퓨터는 일반컴퓨터보다 월등히 빨라진 계산을 처리한다. 슈퍼컴퓨터는 CPU의 여러 개 병렬로 나열한 것이다. 전력을 많이 사용하고 발열도 심하다.

 

이에 도이치 박사는 컴퓨터의 이진법을 양자역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양자컴퓨터의 기본 단위는 고전 컴퓨터인 비트를 대신한 큐비트가 사용된다.

고전컴퓨터에서 비트라고 부르는 이진수 한자리를 양자컴퓨터에서는 퀀텀 비트라는 뜻에서 ‘큐빗’이라고 부른다. 비트와 큐빗의 차이는 비트는 0이나 1 둘 중 하나의 값만 가지지만 큐빗은 0과 1뿐 아니라 둘의 어떤 중첩상태도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양자컴퓨터는 미국과 중국이 서로 경쟁하듯 더 많은 큐빗을 활용한 컴퓨터를 만들어내고 있다. 양자정보기술의 상징적인 세 가지 기술, 양자컴퓨터와 양자암호통신과 양자원격이동도 새로운 기술로 고전기기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

 

양자컴퓨터에 관해 궁금한 분은 <퀀텀의 세계>를 꼭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퀀텀의세계 #이순칠 #해나무 #양자역학 #양자컴퓨터 #과학 #책과콩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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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 최신 언어로 읽기 쉽게 번역한 뉴에디트 완역판, 책 읽어드립니다
혜경궁 홍씨 지음, 신동운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3월
평점 :
품절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궁중비사

 

스타북스에서 출판한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은 영조, 정조, 순조 대의 궁중비사를 다루고 있다. 최근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으로 정조와 성덕임(의빈 성씨)의 사랑에 주목하고 있다. 한중록은 혜경궁의 입궁 하게 된 계기를 시작으로 사도세자(경모궁)가 죽임을 당하는 임오화변(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 홍씨 집안의 내력과 억울함, 혜경궁의 회상을 서술한다.

 

 

혜경궁 홍씨는 조선 21대왕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빈이자 조선 22대왕 정조의 생모이다.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의 차녀로 1735년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이다. 열 살의 나이에 사도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했으며, 의소세손과 정조, 청연공주와 청선공주를 낳았다. 맏아들 의소세손이 세 살 만에 죽고, 남편 사도세자는 당쟁의 대립 속에 영조의 노여움을 사 뒤주에 갇혀 죽는 비운을 겪었다. 마흔두 살 때 둘째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올랐는데, 아버지 홍봉한을 비롯한 외가가 정조의 즉위를 방해한 세력으로 간주되어 배척당하게 된다. 1800년 손자 순조가 즉위했지만 나이가 어려 영조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고,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인물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되면서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도 처형되었다.

[ 한중록 책날개 중 ]

 

평소 즐겨 읽는 역사블로거 히스토리님의 글에서 자주 다루었던 <한중록>으로 평소 궁금하던 내용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누구나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고 정치적인 의도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한중록’ 역시 임오화변이 일어난 원인, 몰락한 풍산홍씨 가문의 재건을 부탁하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작성되었다.

 

총 네 번에 걸쳐 저술된 한중록을 스타북스에서는 최신 언어로 읽기 쉽게 번역했다. 안 그래도 한자어가 많을까 걱정 아닌 걱정을 했는데, 생각보다 읽기에는 수월했고 평소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혜경궁은 1735년에 태어난 1815년까지 생존해 당시 수명을 생각하면 장수했으며, 열 살에 궁에 들어와 임오화변이 있었던 직후 잠시 친정에 왔을 뿐 70여 년 평생을 궁에서 생활했으니 조선 후기 궁에 관해 가장 정통한 사람 중 한 명이다.

 

혜경궁의 5대조가 선조의 사위로 집안은 재상 가문이다. 하지만 재산을 물려받지는 않아 살림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녀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잘 키우라며 유모를 보냈다. 아버지 홍봉한은 성균관의 진사로 송시열의 문묘에 배향하자는 상소를 올려 영조에게 불만은 산다.

후일 사도세자가 성인이 되고, 베필을 알아볼 때 홍봉한의 집안이 부마 집안(왕의 사위)으로 혜경궁을 세자빈으로 염두에 둔다.

 

세자빈을 간택할 때, 세 번의 간택 과정을 거치지만 혜경궁은 미리 낙점이 된 듯하다. 홍봉한은 딸의 세자빈 간택으로 권력의 중심으로 거듭난다.

영조 후기와 정조 초기 권세를 누렸던 집안이 풍산홍씨 가문이다.

 

임오화변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많이 다루는 주제로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의 악행을 참다못해 뒤주에 가둬 죽이는 사건이다. 이에 대해 영조가 노론의 정치력에 굴복한 사건이라는 의견과 영조의 의지로 실행한 사건이라는 의견이 분분하다.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의 병이 심해져 이를 참다못한 영조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 한다.

 

정조가 성덕임을 향한 사랑이 진심이듯, 영조 또한 사랑하는 영빈 이씨(선희궁)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불행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선희궁과 낳은 화평 옹주를 지극히 사랑했다. 문제는 그녀가 일찍이 출산하는 과정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영조의 상실감이 아들인 경모궁(사도세자)에 불똥이 튄 거로 보인다. 혜경궁은 경모궁의 일탈이 시작한 것이 상궁에 의해 어린 시절 칼을 들고 놀게 한 것에 비롯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 경모궁이 상궁을 죽이고 악행을 저지르며 의대증(옷을 입지 못하는 병)을 겪는 것은 그가 극심한 우울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에 할머니 선희궁, 할아버지 홍봉한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하나 실은 영조의 눈밖에 벗어날 수밖에 없던 경모궁의 일탈이 원인이었다.

 

오히려 혜경궁은 임오화변(1762) 때 자신 역시 죽으려 자결을 실행했으나 동석한 이의 제지로 죽을 수 없었고, 이후 세손(정조)의 앞날을 생각해 마지못해 살았다고 회상한다.

 

혜경궁은 10살에 간택되어 15세에 합궁을 하고 첫째인 의소세손을 낳았지만, 그는 3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사망한 해 정조가 태어난다. 혜경궁은 20살 이전에 자식을 보내고 새로운 자식을 얻는 삶의 희로애락을 겪었다.

남편인 경모궁이 후궁을 살해하고 박하게 대했을 때도 후궁들에게 동정과 연민을 느꼈다.

 

 

 

풍산홍씨 가문의 홍봉한과 홍인한 형제는 영조 후기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한 사연으로 정조가 왕위로 오르자 화완옹주, 정후겸과 함께 가장 먼저 처벌을 받는다. 혜경궁의 입장에서는 아들이 왕에 오르자 친정이 몰락한 모습을 지켜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일에 앞장선 이가 자신의 10촌 형제인 홍국영이었다.

 

홍국영은 세도정치를 처음 시행했던 이로 정조의 복심이라고 알려졌으나, 동생 원빈 홍씨를 정조의 후궁으로 삼는다. 원빈 홍씨가 가례를 치른 후 1년 만에 죽자 홍국영은 은언군(사도세자 3남)의 아들을 양자로 삼고 이름을 완풍군으로 고친다. 이는 왕실의 완산(전주), 풍산의 앞 글자를 딴 이름이다. 이 일로 홍국영은 정조에게 미움을 사고 처벌받는다.

 

<한중록>은 첫 번째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정조가 승하하고 어린 왕 순조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다. 혜경궁의 <한중록>은 <인현왕후전>, <계축일기>와 더불어 대표적인 궁중문학 작품으로 평가된다. 현대 언어로 새롭게 선보인 스타북스의 <한중록>으로 조선 후기 궁중에서 벌어진 많은 궁금증을 알 수 있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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