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상가 이건희
허문명 지음 / 동아일보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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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대위대한 경영자에게 길을 묻다.

 

동아일보사에서 출판한 허문영 기자님의 <경제사상가 이건희>는 이건희 회장의 평전이다허문영 기자는 1990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현재 출판국 부국장으로 일하고 있다지난해 10월 25일 이건희 회장의 부고가 전해진 날한 기업인이 이건희 회장을 추모하는 광고를 보고 이건희 회장의 삶에 관해 쓰고 싶다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지금까지 3권의 평전을 썼다. 30대 시절 정신적으로 힘들 때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 앞장선 숭산 큰스님의 평전 <삶의 나침반>, 40대 때 <김지하와 그의 시대>를 통해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산업화와 민주화 세대의 화해를 시도했다.

 

50대에 삶이란 밥이라는 자각하에 밥벌이의 소중함과 기업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이건희 회장이 걸어온 길이 밥벌이를 고민하고 만들어오는 과정임을 절실히 느꼈다.

 

                      Photo by Babak on Unsplash

기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미국의 철학자 니컬러스 버틀러는 말했다한국의 국력을 나타내는 것은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기업이고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모르지만대기업의 이름은 아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기업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생각한다기업에 근무하는 사람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그리고 기업활동의 결과가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원동력임을 깨닫고 경제사상가로 이건희 회장의 삶에 대해 알아보자.

 

 

 

저자는 단언한다. “한국의 산업사는 비포(BEFORE) 이건희와 애프터(AFTER) 이건희로 나뉜다라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삼성세계 대도시 곳곳에 삼성의 간판을 마주하고 삼성 휴대폰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한국 제품이 사랑받는 모습에 뿌듯함을 느낀다삼성은 한국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기업임이 틀림없다오늘날 500조 원에 근접하는 삼성전자도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1987년에는 2조 4천억 원에 해당하는 기업이었다. 2020년 기준으로는 매출 246조 원에 수많은 세계 1등 품목을 만들었다.

 

그는 취임 후 5년 동안 공식 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은둔의 경영자로 알려졌다.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와 혁신을 요구했다그는 다양한 분야에 심취했고통찰과 깊이는 컸다.

물리학수학사회학아동심리학에 관심을 가졌고개성화소프트웨어디자인의 시대가 될 것이며 로봇이 지배할 거라는 말을 듣고 미래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라고 했다.

 

그는 오랜 시간 사색하고 한 가지 주제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태어나 얼마 후 할머니 댁에서 자랐고이후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녔다일전에 이병철 선대 회장님의 수필에서 기록된 기억을 돌이키면 일본 학교에 다니는 이건희 회장에 대한 걱정을 남겼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소학교 시절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보다 혼자서 관찰하고 생각에 빠지는 것을 좋아했고이후 부산교대부속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도 비슷한 성향이었다그때부터 그는 주변의 친구를 관찰하고 자신에서 해를 가하지 않을지 친하게 지내도 되는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고교 시설 서울로 상경한 그는 연대 상경학부에 합격하지만그는 자퇴한 후와세다대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는 일본을 알고 따라 할 수 있는 길만이 다시는 식민상태가 되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절감한다그가 평소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즐겨 시청하고특히 탐사보도를 즐겨보는 것을 자신이 관심 분야에 몰입하는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그는 전자제품과 자동차를 무엇보다 좋아했다그래서 즐겨보던 책은 이공계 관련 도서우주과학공학책이 주를 이루었는데 와세다 재학 시절 중고자동차를 분해해서 새로 조립한 후 판매해서 용돈을 벌어들인 일화는 유명하다.

 

                Photo by Zana Latif on Unsplash

 

결정적으로 삼성가에서 벌어진 왕자의 난을 통해 위로 형이 두 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장직을 오르게 되는 이 회장은 일본 기술자들이 한국에 올 때는 승지원에 초청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공학 및 전자 기술을 배우게 된다.

 

1987년 삼성전자 회장에 취임하고 각종 혁신조치를 취하지만 사원들은 좀처럼 타성에 젖은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출퇴근 시간을 7·4제로 운영해 4시 이후에는 퇴근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하도록 강조했다유연한 사고가 삼성을 2류 기업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알았다.

 

그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비로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것도 전자 산업에 대한 미래의 청사진을 구상했기 때문이다드디어 1993년 삼성전자 디자인부에 속한 후쿠다의 후쿠다 보고서를 기점으로 그는 삼성의 신경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이른바 마누라만 빼고 다 바꿔라라는 말로 유명해진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서 열렸던 삼성 사장단 회의의 발언이었다.

 

고문을 활용하라는 주문에도 주저하는 사원들에게 고문 활용을 인사고과 점수에 부여에 강압적으로 일본의 고문에게 기술을 교류하고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신경영선언 이후 품질관리는 삼성이 일류로 도약하는 최우선 과제였다. 1995년 당시 휴대폰 불량률이 10% 이상이어서이 회장은 애니콜과 불량률이 기준에 못 미치는 제품 500억 원어치를 화형에 처해버리는 충격요법을 시행한다.

 

이를 기점으로 삼성은 휴대폰에서 갤럭시 신화를 만들고반도체 사업에서도 승승장구한다.

 

 

 

저자는 이건희 회장 지인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일본에서 역도산을 만난 것과 홍사덕 의원은 한강의 완공된 양화대교를 보고 감탄하고 있을 때이 회장은 통일이 되면 한강으로 화물선이 다녀야 하는데 교각이 너무 좁다고 지적하는 모습을 보고 그의 깊은 사고에 놀랐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의 작고 후 그가 그동안 모았던 미술과 문화 예술품이 화제가 되었다. ‘메이드 인 코리아를 세계 일류 반열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이 회장의 문화에 대한 기여는 삼성의 성장과 함께했다.

 

삼성은 이건희 컬렉션의 기부로 이건희 회장의 미술품을 국민과 함께 즐기기 위해 국가에 기증한 뜻을 계승하고자 상설전을 열어 무료로 운영하기로 했다라고 설명한다.

 

이건희 회장이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여러 사례에서 드러난다창원 다호리 고분군 유적지 발굴과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최순우 선생의 생가를 지키는 일에도 이 회장의 지원이 마중물이 되었다.


 

그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잘 알았고삼성이 추구하는 명품 정신을 선조들의 정신에서 찾으려 했다이건희 컬렉션을 대중에게 공개해 국보를 포함한 수준 높은 우리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희 회장의 평전을 읽는 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기업가 정신을 알게 되었다.

 

어느 국가사회기업을 막론하고 진정한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며 그 힘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398)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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