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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인물 가상 인터뷰집 - 소설가의 상상력으로 실감나게 풀어낸 역사속 소문의 진상
홍지화 지음 / nobook(노북) / 2021년 12월
평점 :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r/e/reimmagen/IMG_korean_interview_00.jpg)
소설가의 상상력으로 실감나게 풀어낸 역사속 소문의 진상
노북에서 출판한 홍지화 작가님의 <한국의 역사인물 가상 인터뷰집>은 역사 속 인물을 현재로 소환해 작가와 인터뷰를 나누는 소설이다. 소설가의 기발한 상상력으로 21명의 자료 조사와 함께 역사 속 인물을 실감나게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Part 1. 나라와 백성을 위한 촛불이 되다
백전무패, 불멸의 이름이 된 이순신
조선 문명의 꽃을 피운, 발명왕 장영실
삼국 통일의 주역, 김유신과 김춘추
화약의 아버지, 최무선
「동의보감」의 저자 구암 허준
조선 최고의 학자, 다산 정약용
농업강국의 씨를 뿌린, 고무신박사 우장춘
20세기 현대 이론물리학의 금자탑을 세운 이휘소 박사
한국 최초의 여성경제학사, 최영숙
‘한국의 파브르’, 나비박사 석주명
파트1에서 가장 인상적인 분은 우장춘 박사다. 1950년 한국에 귀국한 우 박사는 ‘서로 다른 두 종은 교배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종을 탄생시키기도 한다.“는 ’종의 합성‘의 원리로 우리 농업을 과학적이고 자주독립의 단계로 도약시켰다. 한국전쟁 후 한국은 육정학은커녕 하루 세끼를 못 먹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단, 그는 오로지 육종학의 불모지인 한국에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해준 위인이나 다름없다.
우 박사는 한국에 9년 5개월이란 짧은 기간 동안 머물렀지만, 그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유인즉, 개화파 무신이었던 아버지 우범선은 급진개화파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당시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서 군인 동원의 총책임자였으며 황후의 소각된 시신 처리에도 가담했다고 알려진다.
우범선은 일본으로 도망쳐 일본 여인과 결혼해 자녀를 낳았고, 그가 우장춘이다. 우범선은 옛 동료인 고영근의 칼에 죽임을 당했다.
이 사실을 알고 우장춘은 충격받았고, 자신의 아버지가 고국에 진 빚을 갚으려 다짐했다.
아버지가 비명횡사하고 나서 가정형편이 어려워진 까닭에 일본인 어머니는 나를 잠시 고아원에 맡겼는데 이지메(왕따)를 혹독하게 당했습니다. 원생들 사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선생들조차 잘못한 게 없는데도 나를 때리고 나무랐습니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요. 하지만 나는 내 운명에 굴복할 수 없었습니다. (104쪽)
한국에 지내는 동안 일본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일본으로 상례에 참가하고자 정부에 여권을 발급하고자 하나 이승만 정부는 우 박사가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해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는 우리 토질에 맞고 잘 자랄 수 있는 우량종자를 개발했다. 그 결과 단기간에 배추, 무,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등 20여 품종에서 우수 종자를 얻었다. 지금 우리 식탁에 오르는 거의 모든 채소는 우 박사가 개발한 것이다.
이휘소 박사에 관한 유명한 소설은 그를 핵물리학자로 둔갑시켜버렸다. 그는 핵물리학자가 아니라 이론물리학자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핵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군사정권을 도와주다 미국 정보당국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인 양 굳어져 유가족은 작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이휘소 박사는 학자로서 20년도 안 되는 짧은 연구 기간 동안 게이지이론의 재구격화, 참 쿼크입자 제시, 힉스입자 예견 등등 그 어떤 물리학자보다 경이로운 연구 성과를 냈다.
그가 중점적으로 연구한 분야에서 노벨물리학상이 두 번이나 나왔고,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원장인 오펜하이머 박사는 자신의 밑에 아인슈타인과 이휘소가 있었지만, 이휘소가 더 뛰어난 학자였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여성 경제학자인 최영숙의 이야기는 못내 안타까웠다. 최영숙은 동양인 최초로 스톡홀름대학을 졸업하고 조국에 돌아왔지만 그녀가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1930년대 5개국어 능통자에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 출신이었지만 그녀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던 그녀는 미나리, 콩나물을 파는 구멍가게 야채 장수였고, 사람들의 입방에 오르내리다 결국 생활고로 요절했다.
Part 2.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영원한2인자
왕이었으나, 왕이 되지 못한 광해군
아비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
삼봉 정도전이 꿈꾸었던 성리학적 이상세계
조선왕조 5백년 역사상 왕위에 올랐으니 반대 세례에 의해 추출 당한 왕은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연산군이야 폭정으로 악명 높았으나, 광해군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논쟁이 격렬하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당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다. 사실 아버지인 선조 임금이 무능했기에 그를 대신해 임진왜란을 수습하고자 세자로 책봉된 후 7년 동안 이어진 왜란 이후의 민심 수습과 실리외교를 추구했지만, 이이첨 같은 간신배들 때문에 실정을 막지 못했다.
왕위를 지키기 위해 동복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어린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것도 이이첨 등 대북파 간신들의 농락에 넘어가 패륜 짓을 저질렀다.
광해군 재위 시절 역모 사건이 50여 차례나 일어나 무수한 신하들이 목숨을 잃었다.
광해군은 왕권을 강화하고자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켰지만, 오히려 백성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사도세자만큼 많이 이야기되는 왕자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와의 불화로 인해, 혹은 붕당정치의 희생양으로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은 비운의 세자로 잘 알려져 있다.
임오화변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많이 다루는 주제로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의 악행을 참다못해 뒤주에 가둬 죽이는 사건이다.
영조는 장자인 효장세자를 보내고, 영빈 이씨와 옹주만 다섯을 낳은 끝에 왕자인 사도세자를 생산했다. 사도세자 역시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나타내 영조의 기대는 더 컸다.
영조의 편애는 심각했다. 자신이 애지중지 여기는 자녀의 집에는 덜 사랑하는 자녀가 머물지 못 하게 하고, 불길한 일을 당했을 때는 애틋하지 않은 자녀를 불러서 불길함을 떠넘기는 ’귀 씻기‘ 대상으로 삼았다.
영조는 효심과 충심을 시험하는 ’선위 쇼‘를 벌였고, 대리청정을 계기로 더욱 멀어졌다.
사도세자는 점점 포악하게 변했고, 신경을 건드리면 환관이고 후궁이고 할 것 없이 목을 베고, 동궁 안에서도 히스테릭하고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사도세자는 의대병이라는 신경증을 앓았고, 자식을 낳았던 사랑하는 후궁 빙애를 죽였다.
이 일은 1년 6개월 후, ’나경언의 고변’을 통해 사도세자의 비행이 모두 알려졌다. 임오화변이 있기 전날 밤, 사도세자가 부친과 아들 세손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를 낳은 어머니 영빈 이씨와 혜경궁 홍씨는 친정 가문과 세손을 지키기 위해 그를 버렸다.
<한국의 역사인물 가상 인터뷰집>에는 역사 속 뛰어난 인물을 현재로 불러와 당시 상황을 들어보는 시간이었다. 역사에 관심을 가진 분은 이 책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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