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로부터의 탈출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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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설'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다. 나는 몇 살이며 언제, 어떻게 이 시설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방을 뒤적이고 일기장을 읽던 중 숨겨진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곳은 '감옥'이라고 하는 메시지를. 탈출을 결심한 사부로는 동료를 찾기로 결심하고, 관찰 끝에 믿음직한 세 명의 동료를 만든다. 하지만 탈출을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하던 중 동료가 연달아 사라지고, 며칠 후 돌아온 동료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탈출은 쉽지 않다. 동료들을 더이상 위험하게 할 수는 없다. 결국 사부로는 홀로 탈출을 감행하는데..



한 걸음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 그게 미래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야.



매일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오늘 하루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반복되는 하루 중 무언가 느껴지는 위화감.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얼굴과 손, 휠체어가 없으면 1미터 앞을 나아가기도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진 몸, 치매인가.. 싶을 정도로 사라져버린 과거의 기억까지. 소설은 자신을 100세 정도 되었다고 '추정'하는 사부로를 화자로 해서 전개된다. 부족할 것이 없이 편안한 시설에 살고 있지만 직원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고 -정확히는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만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다- TV에서는 자신이 젊었을 때 활약하던 선수들이 여전히 젊은 채 스포츠 경기를 진행하고 있다. 시설에 들어온 기억도 없고, 당연히 나갈 기약도 없다. 심지어 시설 밖으로는 나갈 수 없게 굳건히 잠겨 있다. 일기장을 읽고 탐색한 끝에 시설을 나갈 방법은 찾았지만 밖은 숲 속이었고, 일정 거리 이상은 휠체어가 나가주지 않아 결국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 시설 밖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누구일까, 여러 가지 궁금증은 사부로와 동료들로 하여금 탈출 계획을 세우도록 만든다.



내가 있는 편안한 이 장소가 사실은 나를 가두고 있는 곳이었다는 것, 그래서 탈출을 계획한다는 설정 자체는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주인공이 100세 노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탈출은 다른 탈출과 상당히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다. 일단 이들은 휠체어가 없으면 이동이 쉽지 않고, 자그마한 충격으로도 신체에 큰 무리가 될 수 있다. 추격자가 따라올 경우 이들을 뿌리치고 달아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완벽한 계획과 완벽한 수행이 뒷받침 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사부로가 처음 위화감을 느낀 순간부터, 단서를 찾고 동료를 마련해 탈출을 시도하기까지, 모든 과정은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사부로를 포함한 일명 '헌드레즈' 멤버들이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준비하고, 논의하고, 그 과정에서 다투고, 혹은 은밀한 '연심'을 품는 것까지, 읽는 사람까지 두근두근해지는 탈출 드라마(?)의 정석과도 같은 전개.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이 뭔가 예상이 가면서도 연출이 참 '세련되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소설 [미래로부터의 탈출]은 총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재미있게도 한 소설 안에서 '장르'를 달리 하고 있다. 일단 첫 번째 장은 앞선 줄거리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확연히 '미스터리'이다. 그런데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라고 해야할 것 같다. 첫 번째 장의 미스터리는 첫 번째 장에서 그 답을 알려주지 않고 다음 장으로 이어진다. 장르를 달리한 두 번째 장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전개가 되고, 어느 정도 첫 번째 장의 미스터리를 해결해 주는 역할도 한다. 그리고 세 번째 장에서는... 어떻게 될지는 직접 읽어보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전체 분량이 300페이지 정도로 각 장 역시 100페이지 내외의 분량이지만, 그 한정된 분량 안에서 해당하는 장르의 매력을 물씬 느끼게 하는 것이 정말 놀랍다. '죽이기 시리즈'를 비롯한 작품들이 통통 튀고 색다른 매력이 있고, 어딘가 '젊은' 혹은 '어린' 느낌이 있었다면 [미래로부터의 탈출]은 주인공들은 100세 가량의 노인으로 설정해서일까,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겁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진중하면서도 유쾌하고, 나이듦과 젊음이 공존하는 느낌이다. '아, 정말 이렇게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공감을 절로 들게 하고, 동시에 이 영리하기 짝이 없는 제목에 대한 감탄까지 빼놓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이 책이 쓰여진 시기가 작가가 투병 생활을 하던 때라는 것을 생각하면 제목의 '미래'가 좀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그 '죽이기 시리즈'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의, 그렇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책 [미래로부터의 탈출]. 그래서일까, 이 책이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이 너무 아쉽게 느껴진다.(물론 국내에는 작가의 미출간 작품이 출간될 수도 있겠지만..) 인기를 끌었던 시리즈와 유사한, 안전한 길 대신 색다른 매력을 안겨주며 기대감을 자아내는 이 작품이 마지막이라니... 보통 재미있게 읽은 책의 리뷰는 말미에 '작가의 다른 작품이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다려야겠다'라고 적을 때가 많은데 이번에는 뭐라고 적어야 할지 어렵다. 오로지 책에 대한 감상만을 남기면, 누구나 흥미롭게 읽지 않을까.. 싶은 좋은 책이었습니다...라는 걸로.



출판사로부터 책만을 협찬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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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 독자
막스 세크 지음, 한정아 옮김 / 청미래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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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마녀 사냥' 시리즈의 작가 '로저 코포넨'은 독자와의 만남에서 한 남성으로부터 '작가님이 쓰신 것이 두려우신가요?'라는 질문을 받고 당황한다. 그리고 얼마 후, 로저는 아내 '마리아'가 자택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검은색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웃고 있는 마리아의 시체. 그리고 그 모습은 소설 '마녀 사냥' 속 살해 방법과 동일한 것이었다. 소설 속에는 여러 건의 살인이 발생한다. 누군가 로저의 소설을 모방한 것이라면 이 살인 사건은 한 건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범인은 사건 현장과 도처에 증거들을 남겨놓았다. 하지만 꼼꼼한 살인과 어울리지 않는 허술한 증거들은 사건을 담당한 '제시카' 경사를 비롯한 형사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범인이 만들어 놓은 길로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통 서양권 소설, 콕 집어 영미 또는 북유럽 스릴러를 생각하면 일단 사소한 인물 한 명,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서사를 안겨주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섬세한 작가, 그래서 한도 끝도 없이 두꺼워지는 벽돌같은 책이 떠오른다. 여기에 꼭 과거가, 역시나 콕 집어 과거의 상처가 있는 주인공이 등장하고,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깊이 파고들면 현재의 사건은 이 주인공의 과거의 상처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되어 있어야 한다. [모방 독자] 역시 북유럽 스릴러에 500페이지 가량의 볼륨을 생각했을 때 이러한 특징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래서 읽기 전부터 걱정이 좀 되었는데 극초반에 이미 이러한 걱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인공 제시카 경사의 과거가 -과거라는 언급도 없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과거와 현재의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고리가 있을 거라는 예상은 되지만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모방 독자]에는 물론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지는 서사는 소설에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였고, 조금 더 길게 서사가 주어지는 인물은 그 서사가 소설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그 외의 분량은 사건에 집중하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 시간이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는데도 속도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짧은 시간 안에 연이어 발생하는 살인 사건, '마녀 사냥' 소설과의 유사점, 지루할 틈 없이 하나씩 드러나는 사실들, 그리고 그럼에도 끝까지 감추고 있는 진실까지. 이 작가는 어떻게 하면 독자가 책을 내려놓을 수 없는지 참 잘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을 써내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하루를 살아냄으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죠. (중략) 저는 제 책을 펼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적혀 있든 상관없이 작가를 존중하고 존경해주기를 바랍니다. 특별한 내용이 없는 부분이 나오더라도 계속 읽겠다고 말해주기를 바랍니다. 제 이야기에 집중하는 독자를 원합니다. 충실한 독자를요."



등장인물의 서사에 분량을 많이 할애하지 않는 만큼 작가는 다른 곳에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 바로 우리에게는 낯선 핀란드의 헬싱키라는 사건의 배경이 되는 지역의 묘사, 소설 속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중세의 마녀 사냥에 대한 묘사, 그리고 실제로 소설 속에서 현재 발생하고 있는 사건에 대한 묘사이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지명이 생생한 묘사와 함께 조금씩 익숙해지고, 소설 속 헬싱키의 겨울이 현재의 추위와 묘하게 겹치고, 중세의 마녀 사냥과 이를 소재로 한 소설 속 소설 '마녀 사냥', 그리고 이를 모방한 연쇄 살인의 궁금증이 증폭되면 결국 독자는 범인이 누구인지, 왜 소설을 모방하고 있는지, 그것이 제시카의 과거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결말을 향해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다. 강력한 호기심을 자아내는 도입부와 진실을 예측할 수 없어 그저 책장을 넘기기만 하는 중반부를 지나 맞이한 결말이 생각과 다르기도 하고 분량을 좀 더 할애해서 좀 더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 모든 것들을 아우를 만한, 개연성과 반전이 있는 결말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에서는 초중반의 복선이 회수되면서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역자 후기에 의하면 이 [모방 독자]는 시리즈로 이미 2권이 출간되었고, 작가는 3권을 집필 중이라고 한다. 결말을 보고 '이건 시리즈로 이어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던 터라 그 사실이 참 반갑게 느껴졌다.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고, 그 마음에 드는 책이 시리즈로 이어가는 건 더더욱 쉽지 않다. 하지만 [모방 독자]는 이미 그 쉽지 않은 두 가지는 넘겼으니(?) 천천히 다음 책이 나오기를 기대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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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와 박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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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수와 가격을 보고 당연히 양장일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좀 놀랐네요ㅎ 히가시노 게이고가 선인세가 높아서 다른 작가의 책보다 더 빠르게 가격이 올라가는 것 같긴 합니다만..(더군다나 이건 정말로 신간이니까) ‘재인‘으로부터 시작된 가격이 이제는 일상처럼 보이니 무섭네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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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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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소설가..를 떠올리면 누구의 이름이 먼저 등장할까. '무라카미 하루키', '히가시노 게이고', '기욤 뮈소', '베르나르 베르베르' 등.. 여러 명의 외국인 소설가들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언제부턴가 오프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보면 상위권에 위치한 책들은 전부 한국 작가들의 책이다. 이번에 읽은 책은 그런 책들 중에서도 최근 화제성에서는 단연 첫 번째로 꼽힐 것 같은 책, '정유정' 작가님의 [완전한 행복]이다. 




엄마 유나와 아빠 준영이 이혼한 후 일곱 살의 '지유'는 시골집에서 몇 년 만에 아빠를 만났다. 그날 밤 지유는 악몽을 꾸고 다음날 엄마는 아빠가 바쁜 일이 생겨 먼저 갔다고 한다. 아빠는 왜 먼저 가버렸을까.. 엄마는 오리 먹이를 만들고 있었던가.. 어젯밤 되강오리는 왜 그렇게 울어댔을까.. 어린 지유는 다락방에서 찾은 '아빠 인형'으로 불안감을 달래고 있다.


유나의 언니인 '재인'은 준영의 동생 '민영'의 방문에 의아함을 느낀다. 민영은 준영이 지난 화요일부터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유나는 문제의 그 날 아침 준영으로부터 받은 연락과 그와 만났던 것을 기억해 낸다. 갑자기 만나자고 했고,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후 연을 끊다시피 했던 유나로부터 연락이 온다. 유나와 재혼한 남자 '은호'의 아들이 돌연사 했다는 연락이.


3년 전, 은호는 이혼한 전처의 결혼 소식을 듣고 심란한 마음에 러시아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세 번이나 우연히 마주친 유나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지만,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다. 그리고 현재, 그는 갑작스런 아들의 죽음의 '가해자'로 의심받고 있다.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나는 그러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어."



책을 읽기 전, 제목과 표지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었다. '완전'과 '행복' 한없이 긍정적인 두 단어가 만나서 왜 이토록 불길한 울림을 주는 것인지. 한없이 다정해보이는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그린 일러스트가 왜 기묘한 불안감을 자아내는 것인지.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이 책을 쓴 작가가 '정유정'이라서 그런 것인지. 궁금증 반, 두려움 반의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아주 초반을 읽으며 이 책이 몇 년 전에 있었던 아주 유명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평범하게 읽어 넘겼던 극초반, '유나'가 오리 먹이를 만들던 장면이 떠올랐고 몇 년 전 읽은 후 나를 독서 슬럼프에 빠뜨렸던 어떤 책과 오버랩이 되었다. 내가 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까.. 하는 후회가 찾아왔다.



소설은 유나를 중심으로 한 세 명의 인물을 화자로 전개된다. 유나의 딸인 '지유', 유나와 재혼한 남편인 '은호', 유나의 언니인 '재인'. 유나는 한 번도 화자로 등장하지 않지만 이들 세 명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오히려 화자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더 압도적으로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절대적인 존재, 마치 신과 같은 존재.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듯하면 사정 없이 천벌을 내릴 수 있는. 각자가 유나에게 품고 있는 감정, 유나가 이들에게 '품도록 만들었을' 그 감정이 생생하게 보이며 독자 역시 그 속을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가 더해가게 된다.



안다는 건 모르는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그중 어떤 유의 '앎'은 '감당'과 동의어였다.



사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미제 사건이라서 아무도 그 진실을 모르는 사건에 작가가 상상력을 더해 나름의 진실을 이끌어 내는 류의 소설은 흥미롭지만 이미 범인과 범행이 명확한 사건을 소재로 하는 것은 다소 거부감이 있다. 아무리 이 책이 허구라고 외쳐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실제 사건과 소설을 연결지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떤 끔찍하고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왜' 그랬는지를 궁금해 한다. 가해자에게 어떤 동기가 있었는지, 혹은 그에게 어떤 불우한 사정이 있었는지,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막연한 사건에 이유를 부여해 가해자는 보통과는 다른 사람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는 '사이코패스'니까..라는 것이 엽기적인 사건에 가장 큰 '해답'이 되기도 한다. 원래부터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그래서 우리와는 다르니까..라는 느낌. 그래서 뭔가 현실의 사건이 소재가 되는 소설이 아직은 조금 모자란 실제 사건의 조각들을 애써 채워넣어 '아, 역시 그런 사람이니까..' 라는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싫어서, 아마도 이 책이 특정 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걸 알았다면 손에 들지 않았을 지도.. 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 소설로서만 놓고 본다면 그동안 읽은 정유정 작가의 책 중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유나라는 인물에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혹은 알면서도- 조종당하고 있는 이들의 때로는 무모하고 때로는 어리석은 행동들이 만들어 낼 결말도 궁금했고 가장 중요한 인물을 화자로 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대단하다 싶었다. 소설적인 재미를 위해서인지 한없이 답답한 행동들을 통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도 나름 긴장감을 유발하고 유지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린 시절부터 유나로 인해 고통받아온 언니, 유나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편, 태어났을 때부터 유나가 자신의 전부인 딸. 각기 다른 위치에 있지만 모두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무방할 세 명은 화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었고 그들의 눈으로 보는 유나의 모습과 그들의 기억 속에서 짜맞춰지는 유나의 과거 행적 역시 그 실체가 드러날 수록 끔찍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일들을 유나를 화자로 하지 않음으로써 그녀에게 어떤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는 것, 아주 조금의 면죄부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만 개인적으로 결말의 연출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리셋 단추를 누른 것 같았다. 집 전체가 태평한 시절로 돌아간 모양새였다. 흠결 없이 평온한 풍경이었다. '행복'이라는 신화를 이룬 한 가족의 불가침 왕국으로 보였다. 이곳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아무 일도 없었노라, 선언하는 듯.


자신의 행복을 위해 불행의 가능성을 하나씩 없애나가는 여자. 그녀의 불행의 가능성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잃어야 하는 사람들. 묘사가 직접적이지 않아도 -아니, 이 정도면 충분히 직접적인가 싶기도 하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한여름에 서늘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이래저래 쓸데없이 글이 길어졌지만 500페이지 남짓한 분량이 지루할 틈이 없는 흥미로운 책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리 작가의 말에서 '모든 것은 소설적 허구다!'라고 말해도 실제 사건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점은 못내 아쉽다.(모든 것을 허구라고 하기에는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너무 많이 가져왔다ㅠ) 이 책으로부터 시작되는 '욕망 3부작'의 나머지는 지금과 같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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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범인
쇼다 간 지음, 홍미화 옮김 / 청미래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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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버스 정류장 인근에서 타살로 추정되는 남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신원을 조사하던 중 피해자가 무려 41년 전, 유괴 살인 사건 피해 아동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이 사건은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게 된다. 26년 전, 시효 종료를 1년 앞두고 다시 한 번 특별수사반을 꾸려 조사를 거듭했지만 결국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채 시효를 맞이했던 사건. 왜 지금에 와서 피해자의 아버지는 살해당한 것일까. 41년 전 사건의 진실을 이 살인 사건으로부터 밝혀낼 수 있을까.


소설은 현재의 살인사건을 담당하는 '구사카' 형사의 시점으로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구사카가 현재의 살인 사건이 과거의 유괴 살인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후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시게토' 관리관을 찾아가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최초 사건 발생 시에 범인은 아이의 몸값을 몇 차례 요구했지만 끝내 몸값은 가져가지 않았고, 결국 아이는 시신으로 발견된 채 사건은 장기 미제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14년 후, 시게토 관리관은 팀을 새롭게 꾸려서 그 때와는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사건에 접근하고자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건은 해결되지 못한 채 영구 미제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당시 피해자의 아버지가 사망하며 다시 한 번 당시의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350페이지 정도로 책이 두껍지 않아서 방심(?)했는데 아무래도 유괴 살인 사건이 발생했던 41년 전, 재수사를 하게 된 26년 전, 그리고 살인 사건이 발생한 현재, 이 세 개의 시점을 오가다 보니 전개도 다소 복잡하게 느껴지고 등장인물도 상당히 많았다. 여기에 경찰소설이라면 빠지지 않는 내부의 알력 다툼까지 더해져서 분량 대비 꽤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가 워낙 시점을 능숙하게 오가고 수많은 등장인물 각각의 서사는 거의 배제한 채 사건에 집중하고 있어 실제로 사건의 전개를 따라가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한데 그 속에서 어떤 '단서'를 포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보통은 결말에 가까워지면서 어떤 복선이 드러나면 '아, 그건 어디쯤에 있었지!' 하고 다시 보게 되는데 [진범인]은 워낙 시계열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 책이라서 복선의 위치를 다시 찾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여기에 작가가 아무 것도 아닌 양 너무 완벽하게 복선을 숨겨놓아서 나중에 그것이 복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놀라움도 상당했다. 반전의 정석같은 느낌이랄까? 독특한 사건 전개에도 메인 사건에의 중심을 잃지 않고 적절한 복선의 제시와 회수로 개연성 있는 결말을 이끌어 내는 것이 소설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여기에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특별히 복잡하게 분량을 할애해가며 보여주지 않는데도 캐릭터들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신기했다.



어떤 사건이 공소시효가 만료된 후에 아주 유사한 수법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결국 과거의 사건까지 해결되는 패턴의 책들은 종종 있어왔지만 [진범인]은 비슷하면서도 다소 결을 달리 하는 책이었다. 시간이 흐른 후에 유사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당시 피해자의 가족이 살해되면서 여러 가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과연 이 피해자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당시 이 사람은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 단순히 아들을 잃은 아버지? 혹은 아들의 유괴 살인 사건에 어떤 계기를 만든 사람? 그것도 아니면 혹시...?? 여기에 불과 1~2년만 지나도 새로운 단서나 목격자를 찾기 힘든데 무려 41년이나 지난 사건을 새롭게 수사하는 과정과 26년 전, 사건의 재수사를 담당했지만 결국 미제로 남으며 한이 맺혀서, 당시 자료를 보고 또 봐서 외울 정도가 된 형사들의 모습까지.. 사건의 진실과 더불어 여러 모로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의 책이었는데 흥미진진한 시놉시스 이상의 재미를 안겨운 책 [진범인]. 오랜 시간에 걸친 방대한 내용 대비 가독성도 좋은 편이고, 궁금증을 끝까지 이어나가는 작가의 능력도 탁월해서 여러 모로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워낙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많아서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쿠사카 경위 시리즈'로 2015년에 출간된 [진범인] 외에 2018년에 출간된 [유괴범]이라는 책이 더 있는 것 같아 혹시 이 책도 출간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된다. [진범인]에 버금가는 책으로 이 작가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다려 봐야겠다.



출판사로부터 책만을 협찬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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