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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평점 :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소설가..를 떠올리면 누구의 이름이 먼저 등장할까. '무라카미 하루키', '히가시노 게이고', '기욤 뮈소', '베르나르 베르베르' 등.. 여러 명의 외국인 소설가들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언제부턴가 오프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보면 상위권에 위치한 책들은 전부 한국 작가들의 책이다. 이번에 읽은 책은 그런 책들 중에서도 최근 화제성에서는 단연 첫 번째로 꼽힐 것 같은 책, '정유정' 작가님의 [완전한 행복]이다.
엄마 유나와 아빠 준영이 이혼한 후 일곱 살의 '지유'는 시골집에서 몇 년 만에 아빠를 만났다. 그날 밤 지유는 악몽을 꾸고 다음날 엄마는 아빠가 바쁜 일이 생겨 먼저 갔다고 한다. 아빠는 왜 먼저 가버렸을까.. 엄마는 오리 먹이를 만들고 있었던가.. 어젯밤 되강오리는 왜 그렇게 울어댔을까.. 어린 지유는 다락방에서 찾은 '아빠 인형'으로 불안감을 달래고 있다.
유나의 언니인 '재인'은 준영의 동생 '민영'의 방문에 의아함을 느낀다. 민영은 준영이 지난 화요일부터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유나는 문제의 그 날 아침 준영으로부터 받은 연락과 그와 만났던 것을 기억해 낸다. 갑자기 만나자고 했고,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후 연을 끊다시피 했던 유나로부터 연락이 온다. 유나와 재혼한 남자 '은호'의 아들이 돌연사 했다는 연락이.
3년 전, 은호는 이혼한 전처의 결혼 소식을 듣고 심란한 마음에 러시아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세 번이나 우연히 마주친 유나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지만,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다. 그리고 현재, 그는 갑작스런 아들의 죽음의 '가해자'로 의심받고 있다.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나는 그러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어."
책을 읽기 전, 제목과 표지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었다. '완전'과 '행복' 한없이 긍정적인 두 단어가 만나서 왜 이토록 불길한 울림을 주는 것인지. 한없이 다정해보이는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그린 일러스트가 왜 기묘한 불안감을 자아내는 것인지.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이 책을 쓴 작가가 '정유정'이라서 그런 것인지. 궁금증 반, 두려움 반의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아주 초반을 읽으며 이 책이 몇 년 전에 있었던 아주 유명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평범하게 읽어 넘겼던 극초반, '유나'가 오리 먹이를 만들던 장면이 떠올랐고 몇 년 전 읽은 후 나를 독서 슬럼프에 빠뜨렸던 어떤 책과 오버랩이 되었다. 내가 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까.. 하는 후회가 찾아왔다.
소설은 유나를 중심으로 한 세 명의 인물을 화자로 전개된다. 유나의 딸인 '지유', 유나와 재혼한 남편인 '은호', 유나의 언니인 '재인'. 유나는 한 번도 화자로 등장하지 않지만 이들 세 명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오히려 화자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더 압도적으로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절대적인 존재, 마치 신과 같은 존재.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듯하면 사정 없이 천벌을 내릴 수 있는. 각자가 유나에게 품고 있는 감정, 유나가 이들에게 '품도록 만들었을' 그 감정이 생생하게 보이며 독자 역시 그 속을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가 더해가게 된다.
안다는 건 모르는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그중 어떤 유의 '앎'은 '감당'과 동의어였다.
사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미제 사건이라서 아무도 그 진실을 모르는 사건에 작가가 상상력을 더해 나름의 진실을 이끌어 내는 류의 소설은 흥미롭지만 이미 범인과 범행이 명확한 사건을 소재로 하는 것은 다소 거부감이 있다. 아무리 이 책이 허구라고 외쳐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실제 사건과 소설을 연결지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떤 끔찍하고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왜' 그랬는지를 궁금해 한다. 가해자에게 어떤 동기가 있었는지, 혹은 그에게 어떤 불우한 사정이 있었는지,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막연한 사건에 이유를 부여해 가해자는 보통과는 다른 사람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는 '사이코패스'니까..라는 것이 엽기적인 사건에 가장 큰 '해답'이 되기도 한다. 원래부터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그래서 우리와는 다르니까..라는 느낌. 그래서 뭔가 현실의 사건이 소재가 되는 소설이 아직은 조금 모자란 실제 사건의 조각들을 애써 채워넣어 '아, 역시 그런 사람이니까..' 라는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싫어서, 아마도 이 책이 특정 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걸 알았다면 손에 들지 않았을 지도.. 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 소설로서만 놓고 본다면 그동안 읽은 정유정 작가의 책 중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유나라는 인물에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혹은 알면서도- 조종당하고 있는 이들의 때로는 무모하고 때로는 어리석은 행동들이 만들어 낼 결말도 궁금했고 가장 중요한 인물을 화자로 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대단하다 싶었다. 소설적인 재미를 위해서인지 한없이 답답한 행동들을 통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도 나름 긴장감을 유발하고 유지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린 시절부터 유나로 인해 고통받아온 언니, 유나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편, 태어났을 때부터 유나가 자신의 전부인 딸. 각기 다른 위치에 있지만 모두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무방할 세 명은 화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었고 그들의 눈으로 보는 유나의 모습과 그들의 기억 속에서 짜맞춰지는 유나의 과거 행적 역시 그 실체가 드러날 수록 끔찍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일들을 유나를 화자로 하지 않음으로써 그녀에게 어떤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는 것, 아주 조금의 면죄부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만 개인적으로 결말의 연출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리셋 단추를 누른 것 같았다. 집 전체가 태평한 시절로 돌아간 모양새였다. 흠결 없이 평온한 풍경이었다. '행복'이라는 신화를 이룬 한 가족의 불가침 왕국으로 보였다. 이곳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아무 일도 없었노라, 선언하는 듯.
자신의 행복을 위해 불행의 가능성을 하나씩 없애나가는 여자. 그녀의 불행의 가능성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잃어야 하는 사람들. 묘사가 직접적이지 않아도 -아니, 이 정도면 충분히 직접적인가 싶기도 하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한여름에 서늘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이래저래 쓸데없이 글이 길어졌지만 500페이지 남짓한 분량이 지루할 틈이 없는 흥미로운 책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리 작가의 말에서 '모든 것은 소설적 허구다!'라고 말해도 실제 사건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점은 못내 아쉽다.(모든 것을 허구라고 하기에는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너무 많이 가져왔다ㅠ) 이 책으로부터 시작되는 '욕망 3부작'의 나머지는 지금과 같지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