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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로부터의 탈출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1년 12월
평점 :
'사부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설'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다. 나는 몇 살이며 언제, 어떻게 이 시설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방을 뒤적이고 일기장을 읽던 중 숨겨진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곳은 '감옥'이라고 하는 메시지를. 탈출을 결심한 사부로는 동료를 찾기로 결심하고, 관찰 끝에 믿음직한 세 명의 동료를 만든다. 하지만 탈출을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하던 중 동료가 연달아 사라지고, 며칠 후 돌아온 동료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탈출은 쉽지 않다. 동료들을 더이상 위험하게 할 수는 없다. 결국 사부로는 홀로 탈출을 감행하는데..
한 걸음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 그게 미래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야.
매일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오늘 하루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반복되는 하루 중 무언가 느껴지는 위화감.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얼굴과 손, 휠체어가 없으면 1미터 앞을 나아가기도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진 몸, 치매인가.. 싶을 정도로 사라져버린 과거의 기억까지. 소설은 자신을 100세 정도 되었다고 '추정'하는 사부로를 화자로 해서 전개된다. 부족할 것이 없이 편안한 시설에 살고 있지만 직원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고 -정확히는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만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다- TV에서는 자신이 젊었을 때 활약하던 선수들이 여전히 젊은 채 스포츠 경기를 진행하고 있다. 시설에 들어온 기억도 없고, 당연히 나갈 기약도 없다. 심지어 시설 밖으로는 나갈 수 없게 굳건히 잠겨 있다. 일기장을 읽고 탐색한 끝에 시설을 나갈 방법은 찾았지만 밖은 숲 속이었고, 일정 거리 이상은 휠체어가 나가주지 않아 결국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 시설 밖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누구일까, 여러 가지 궁금증은 사부로와 동료들로 하여금 탈출 계획을 세우도록 만든다.
내가 있는 편안한 이 장소가 사실은 나를 가두고 있는 곳이었다는 것, 그래서 탈출을 계획한다는 설정 자체는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주인공이 100세 노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탈출은 다른 탈출과 상당히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다. 일단 이들은 휠체어가 없으면 이동이 쉽지 않고, 자그마한 충격으로도 신체에 큰 무리가 될 수 있다. 추격자가 따라올 경우 이들을 뿌리치고 달아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완벽한 계획과 완벽한 수행이 뒷받침 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사부로가 처음 위화감을 느낀 순간부터, 단서를 찾고 동료를 마련해 탈출을 시도하기까지, 모든 과정은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사부로를 포함한 일명 '헌드레즈' 멤버들이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준비하고, 논의하고, 그 과정에서 다투고, 혹은 은밀한 '연심'을 품는 것까지, 읽는 사람까지 두근두근해지는 탈출 드라마(?)의 정석과도 같은 전개.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이 뭔가 예상이 가면서도 연출이 참 '세련되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소설 [미래로부터의 탈출]은 총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재미있게도 한 소설 안에서 '장르'를 달리 하고 있다. 일단 첫 번째 장은 앞선 줄거리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확연히 '미스터리'이다. 그런데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라고 해야할 것 같다. 첫 번째 장의 미스터리는 첫 번째 장에서 그 답을 알려주지 않고 다음 장으로 이어진다. 장르를 달리한 두 번째 장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전개가 되고, 어느 정도 첫 번째 장의 미스터리를 해결해 주는 역할도 한다. 그리고 세 번째 장에서는... 어떻게 될지는 직접 읽어보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전체 분량이 300페이지 정도로 각 장 역시 100페이지 내외의 분량이지만, 그 한정된 분량 안에서 해당하는 장르의 매력을 물씬 느끼게 하는 것이 정말 놀랍다. '죽이기 시리즈'를 비롯한 작품들이 통통 튀고 색다른 매력이 있고, 어딘가 '젊은' 혹은 '어린' 느낌이 있었다면 [미래로부터의 탈출]은 주인공들은 100세 가량의 노인으로 설정해서일까,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겁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진중하면서도 유쾌하고, 나이듦과 젊음이 공존하는 느낌이다. '아, 정말 이렇게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공감을 절로 들게 하고, 동시에 이 영리하기 짝이 없는 제목에 대한 감탄까지 빼놓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이 책이 쓰여진 시기가 작가가 투병 생활을 하던 때라는 것을 생각하면 제목의 '미래'가 좀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그 '죽이기 시리즈'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의, 그렇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책 [미래로부터의 탈출]. 그래서일까, 이 책이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이 너무 아쉽게 느껴진다.(물론 국내에는 작가의 미출간 작품이 출간될 수도 있겠지만..) 인기를 끌었던 시리즈와 유사한, 안전한 길 대신 색다른 매력을 안겨주며 기대감을 자아내는 이 작품이 마지막이라니... 보통 재미있게 읽은 책의 리뷰는 말미에 '작가의 다른 작품이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다려야겠다'라고 적을 때가 많은데 이번에는 뭐라고 적어야 할지 어렵다. 오로지 책에 대한 감상만을 남기면, 누구나 흥미롭게 읽지 않을까.. 싶은 좋은 책이었습니다...라는 걸로.
출판사로부터 책만을 협찬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