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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메아리처럼
앤절라 미영 허 지음, 임슬애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페미니즘 소설인가? 하는 생각이 어설프게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82년생, 김지영도 떠올랐다. 근데 이 작품은, 그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설화와 우리의 고전 작품들을 통해 펼쳐낸다. 오랜 과거와 엘사의 어린 시절 기억 그리고 현재의 이르기까지 그 모든 시대가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음매 속에서 그 안에 숨죽여있던 아픔들이 하나 둘 풀어진다.
너랑 나, 우리는 삶이 흔해 빠진 옛날이야기로 전락해 버린 여자들의 후손이야.
우리는 메아리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반복하고 그들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 위대함은 닮지 못해.
어리석은 비극만 반복할 뿐이야.
우리는 그들의 삶에서 그것밖에 기억하지 못하니까.
전쟁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엄마, 가정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는 능력 없는 가장 아빠, 똑똑하지만 결국 스스로 포기하고 간질증을 앓으며 독실한 과 무능력함 사이를 걷고 있는 오빠. 이민 가정에서 자란 엘사는 그런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14살에 집을 떠나 유학에 오른다. 뛰어난 머리 덕분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엘사는 그렇게 입자 물리학 박사가 된다.
엘사가 준비한 연구에 문제가 생겼던 날, 오래도록 보이지 않았던 속치마만 입고 빨강 댕기를 한 그 친구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유색인종이라고, 여자라고 대놓고 괴롭힘을 당했던 엘사와 놀던 유일한 친구. 하지만 그 친구와의 놀이는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선녀와 나무꾼, 심청전, 바리데기 공주, 에밀레종... 이 소설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바로 등장하는 여성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고통에 그대로 노출되고, 결국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희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작품 속 주인공과 연결이 된다.
원치 않는 결혼과 관계, 임신과 출산을 한 엄마. 오빠를 낳고, 뱃속에 딸을 가진 채로 무작정 한국으로 도망 친엄마는 딸을 잃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막내인 엘사를 낳는다. 유학을 떠나기 얼마 전, 목욕탕을 찾은 엄마는 꼭꼭 숨겨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 말이 엘사에게는 곧 다가올 자유를 빼앗으려는 울부짖음 같이 들려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엄마는 말을 잃고, 십수 년을 요양원에서 지낸다. 남들은 사고라고 생각했지만, 글쎄... 그게 사고일까?
엄마의 이야기는 선녀와 나무꾼 속의 선녀를 닮아있다. 종이 소리가 나지 않아, 여자아이를 넣었다는 에밀레종 이야기도, 우리는 익숙하지만 책 속에는 색다르게 담겨있는 심청 이야기도... 모두가 누군가를 닮아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게 여성은 고통받고, 희생을 강요당했다!로 끝나지 않는다. 스스로 그 문제들을 걷어내는 방법들을 조금씩 발견해간다. 그리고 당연히 사산되었다고 알았던, 엄마의 첫 번째 딸의 존재까지도 드러난다.
우리조차도 깨닫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엮어 저자는 그 안에 담겨있는 여성사를 엘사라는 여성을 통해 드러낸다. 색다르고 신선했다. 단순하게 읽어나가기에 그 안에 담긴 묵직한 여운과 부채감이 너무 컸다. 고전소설과 이민자의 삶 그리고 과학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가 한데 묶여 색다른 맛과 생각할 여지를 선사했던 시간이었다.
과거 82년생 김지영을 읽기 전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사실을 깨달은 것 처럼, 이번에도 그런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