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와 역사와 로맨스가 이 한 권에 다 담겨있다. 오색의 다양한 물감의 결이 느껴지는 표지 속에 한 여인의 옆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오색의 빛깔은 꽃이 되고 나뭇잎이 된다. 그 모퉁이 집에서 일어난 80년의 이야기가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책의 시선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와 현재 그리고 15년 전을 오고 간다. 시간의 주인공은 다르지만, 그들은 또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들 사이에는 꽃이 있다. 그리고 꽃을 통해 서로를 주고받는다.
진주 현지 마을에서 하나 꽃집을 경영하는 동우. 용남 부부는 세 자녀가 있다. 큰 딸인 마디와 쌍둥이 마린과 마룬. 마디는 아쟁 연주가다. 얼마 전 큰 사고로 손을 다쳐서 한동안 아쟁을 잡지 못했다. 지금은 회복하는 중이다. 마을의 모퉁이 집이 한 채 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저주받은 집이라 불리던 집에 두 남자가 이사를 온다. 마디네 하나 꽃집에서 매일같이 절화 꽃다발을 주문하는 터라, 알바로 바쁜 마린을 대신해 집으로 돌아온 마디가 모퉁이 집 배달을 맡았다. 사실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마디는 그 집을 이끌렸다. 집 안에 커다란 정원이 있는 것일까? 가득 꽃내음이 뿜어져 나온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보던 중, 주인을 마주한다. 첫인상부터 날카롭기만 한 그 남자 모도유. 처음 보는 마디에게 생채기 나는 말들을 쏟아내지만, 왠지 마디는 도유가 무섭거나 어렵지 않다. 그가 차갑게 대해도 말이다. 모퉁이 집에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성서휘는 도유와 반대로 무척 자상하다. 덕분에 누구와도 어렵지 않게 친해진다. 어려서부터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진주 경찰서 정보관인 정아서. 왕 할머니라 부르는 증조할머니와 불미스러운 사고가 있은 후부터 집을 떠났다. 시간이 지나도 얼굴의 상처만큼 진하게 남은 상처 때문에, 옆집인 마디의 집은 오고 가지만 본가에는 가지 않는다.
시간은 다시 80년 전으로 건너간다. 동아염직소 사장인 고윤송은 경무부 부국장 등과의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차에 뛰어든 한 여인을 마주하게 된다. 강은조였다. 도와달라는 그녀의 말에 은조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윤송. 은조는 그날 술자리에서 아쟁을 연주한 예인이었다. 은조에게서 나는 창포향 때문일까? 그날 이후 은조는 윤송의 집에서 머물게 된다. 은조에게 마음이 있는 윤송은 어떻게든 은조와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 하지만, 은조는 이미 뱃속에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윤송은 은조의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 양 소문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다. 윤송의 집에서 일하는 여자아이인 옥이의 도움을 받는 은조. 윤송이 집을 비운 사이, 은조는 몰래 집 밖으로 빠져나간다. 그곳에는 일본 경찰 다카키가 있었다. 과연 은조와 다카키는 무슨 사이일까? 이 둘은 왜 몰래 만난 것일까? 그리고 이들의 비밀 얘기를 옥이 듣게 되는데...
책 속에 등장하는 해눈이라는 존재와 천년도 그리고 꽃과 이야기를 나누는 존재 등 판타지적 요소가 가득하다. 식물의 소리가 들린다는 설정은 책 속 인물들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능력은 대를 이어가며 등장한다. 잠깐의 기다림도 지루한데, 15년을 기다리고, 100년을 기다릴 수 있다며 마음을 쓴 이야기가 왠지 모를 안타까움과 설렘을 만들어 낸다. 책의 초반에 **으로 처리된 그 이름을 마주하게 되자, 퍼즐이 하나 둘 맞추어진다. 과연 이들의 관계는 어떤 결말을 향해 나아갈까?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일제강점기라는 끔찍한 시기를 지나며 스러져 간다. 하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은조와 구헌의 사랑 마디풀과 도유의 우정, 그리고 은조와 마디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가진 해눈의 이야기는 물이 땅에 스미듯 조금씩 풀어져 가며 또 다른 여운을 남겼던 것 같다.